<반도에 살어리랏다> 한줄 관람평
이지윤 | 가장 뭣같은 순간에, 흥이 폭발한다
조휴연 | 개운치도 않게 씁쓸함이 남는 뒷맛
최대한 | 내려놓으니 유쾌하다
이가영 | 선택의 기로에 놓여도 신념은 잃지 말길
김신 | 헬조선의 삶은 고단하고, '나만 힘들어죽겠어' 서사는 오늘도 타인을 응시하지 못한다.
남선우 | 속도감 있는 전개와 그 속도를 견디며 달리는 캐릭터들의 계급 소동극
<반도에 살어리랏다> 리뷰: 현실이라는 꿈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선우 님의 글입니다.
46세의 연극영화과 시간 강사 오준구는 ‘상황에 따른 즉흥 연기’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한껏 몰입한 채 주어진 설정에 맞는 대사와 몸짓을 선보인 그에게 학생들은 감탄한다. 맨 앞줄 학생 하나가 ‘교수님, 요즘은 작품 활동 안 하시냐’ 묻자 준구는 대답했다. 연기자는 기다리는 직업이야.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준구의 기다림에 대한 세상의 짓궂은 응답과 이에 따른 준구의 반응이 빚어내는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다. 어느 날 갑자기 꿈이냐 현실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 준구의 모습이 펼쳐지는 초반은 익숙한 딜레마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의 꿈과 현실은 각각 '드라마 출연'과 '정교수 취임'이다. 전자는 준구의 오랜 소망인데 반해 후자는 가족, 그 중에서도 아내의 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인물을 두 갈래 길에 세워둔 채 어떤 길을 택하는 게 옳은 일일지 고민하게 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가 꽤 간단히 그 고민을 봉합해버린다. 자식의 사고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긴 준구는 끝내 오디션 장소인 ‘길흥빌딩’의 엘레베이터에 오르지 못하고, 노교수 최기호가 약속한 정교수 자리에 앉기로 결정한다.
문제는 준구가 안착한 현실조차 꿈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현실은 꿈의 포기가 아니라 다른 질감을 가진 꿈길로의 고난이었다. 노교수 최기호의 약속만 믿은 준구가 순진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이야기는 다시 그 약속을 있게 한 사건으로 돌아가 그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관계들을 재정립하고, 현실 감각의 딜레마에서 도덕적 딜레마로 인물의 문제를 옮겨 간다. 재미있는 것은 준구가 마치 고민은 초반에서 이미 마쳤다는 듯 새로운 꿈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인물로 태세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물의 개성을 떨어트리고 감독이 준비한 결말을 향해 의도적으로 인물을 몰아가는 느낌을 주는 한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심슨 가족' 캐릭터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용선 감독의 취향과 장기가 녹아 든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이렇듯 속도감 있는 전개와 그 속도를 견디며 목적지로 나아가는 캐릭터들의 활용이 주가 된다. 주인공을 스쳐가는 행인과도 같았던 캐릭터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 스토리의 국면을 바꿔나가는 지점들이 흥미롭다. 가족들, 학교 사람들과 같은 조연 캐릭터들이 다소 전형적으로 스토리에 복무하지만, 각자 할 일을 해내면 미련 없이 자취를 감춘다는 점에서 최근 스타 캐스팅 덕으로 관객에게 여러 인물의 극중 역할을 쉽게 이해시킨 영화 <1987>의 장점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이라 가능했던 몇몇 장면들이 가진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최기호를 쫓던 여학생 기쁨이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다리를 기어올랐던 거미를 구두 굽으로 밟아 죽이는 장면은 은유적인 동시에 꽤나 직접적으로 분노가 표출되어 인상적이고, 영화 중간 중간 삽입되다 결말에 닥쳐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준구의 살풀이에 가까운 춤 장면은 실사와의 결합을 통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시각적 쾌감을 선물한다.
결국 이 영화는 계급에 대한 갈등, 계급 간의 갈등이 일으킨 한 편의 소동극이다. 영화는 복합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계급을 포착해낸다. 준구는 정교수의 계급을 동경하여 노교수 최기호의 치부를 감추는 데 동조하는 한편 준구의 아내는 ‘이 동네는 전부 질 낮은 애들밖에 없다’며 ‘교수 집안’이 될 자신의 가족이 처할 계급적 우위를 빌려 자신이 ‘살던’ 곳이 될 지역을 비난하고 나선다. 또한 두 사람 모두 계급재생산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는데, 아내가 더 적극적으로 이를 표현하긴 하지만, 준구가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딸 현서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꿈을 강조하다가도 학군을 고려해 이사를 하려는 아내의 결정에 함구하고 마는 것은 그도 결과적으로 계급재생산에 대한 두려움을 안은 반도의 부모라는 점을 보여준다. 최기호의 자동차와 준구의 아들 현준이 망가뜨린 자동차 모두 ‘벤츠’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극중 경제 계급 차의 판단은 힘들지만,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학생인 기쁨보다 우위에 있는 선생 준구가 끝내 기쁨에게 무릎을 꿇고 다시금 ‘연기’를 하고 마는 장면은 끝내 이 영화가 구심점으로 삼아온 계급 질서를 전복시키면서 계급에 목매고 달려 나간 인물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다. 결과적으로 가족 때문에 가지려고 했던 것(교수로서의 계급)을 잃으면서 가족도 함께 잃고, 준구 자신이 진정 갖고 싶어 했던 것(배우로서의 기회)을 작게나마 되찾는 결말은 인물에게 무엇이 꿈이었고 무엇이 현실이었는지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들며 관객에게 판단을 넘긴다. 물론 마지막에 준구와 현준의 대화를 통해 가족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뜻 내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알싸한 맛을 살리며 끝을 맺는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인물의 선택이 만든 이야기의 변곡점들에 어지러이 휘둘렸을 관객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당신이 현실을 택한 것이 굴복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으로의 진입임을 안다는 듯, 그 현실도 결코 쉽지 않아 꿈결을 헤매는 기분이겠거니 이해해주는 듯 말이다. 영화가 인물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물의 행동을 ‘반도에 살어리랏다’라는 제목 아래서, 나에게 비추어, 다시금 읽어보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어쩐지 한 해의 시작 1월에 어울리기도 하는 반가운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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