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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Choice]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존엄하지 못한 삶에 대해

by indiespace_은 2016. 9. 27.




[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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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리뷰: 존엄하지 못한 삶에 대해




*관객기자단 [인디즈] 홍수지 님의 글입니다.




성실한 나라


21세기 한국의 앨리스는 성실한 나라에 산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 속 ‘수남’(이정현 분)이 사는 세계는 토끼 굴에 빠져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맞닥뜨리는 세계만큼이나 이상하다. 수남은 ‘자격증 최연소 최다 소유자’의 타이틀을 땄지만, 담임은 그녀의 몸매를 칭찬할 뿐이고 결국엔 자격증과는 하나도 상관없는 곳에 취직한다.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청소, 식당일 등을 하며 쉬지 않고 돈을 벌어도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수남의 남편 ‘규정’(이해영 분)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고 의사에게 존엄사를 권유받는다. 남편의 존엄한 죽음을 막기 위해 수남은 존엄하지 못한 삶을 택한다. 


“제가 16살일 때,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반일 때, 엄청난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집 옆에 있는 공장에 취직하느냐. 고등학교에 올라가 3년을 더 공부하느냐.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었어요. 여공으로 사느냐, 엘리트로 사느냐 결정짓는 거였으니까요.”


수남이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 선택지들 사이의 차이는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수남은 ‘엘리트’의 삶을 택했지만 결국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대출 받아 장만한 집이 있는 곳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 되어 빚을 청산하고 남편의 병원비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순조롭지 않다. 수남의 삶은 갈수록 나빠질 뿐이다. 슬프지만, 엘리트로 사는 삶에 있어서도, 남편의 존엄한 죽음에 있어서도 애초에 수남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코믹한 연출, 코미디 같은 삶


통장 ‘경숙’(서영화 분)이 군인 출신의 ‘도철’(명계남 분)과 분노조절 장애를 지닌 ‘형석’(이준혁 분)의 폭력성을 이용해 여론을 선동하는 모습이나, ‘계장’(이대연 분)이 수남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모습. 14개나 되는 자격증은 삶에서 쓸모가 없고 명함 던지기, 칼질 등 생계를 위해 배운 수단은 살인에 이용되는 모습. 몸매가 좋은 것을 깨달으라던 담임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 애교라는 여성성을 이용하는 모습. 집을 사기 위해 진 빚 때문에 고시원에 살지만, 세입자에게 사모님 소리를 듣는 모습. 모두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모순들이다.


수남은 열심히 산다. 그러나 열심히 살수록 삶은 더 힘들어진다. 한국의 특정 세대가 노력이라는 말을 조롱하고 분노를 느끼는 것이 증명하듯 우리는 수많은 모순이 만들어낸 불행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퉁’치려는 모습들을 오래도록 봐왔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며 유머러스한 연출이 더해져 전반적으로 블랙 코미디의 모습을 띤다. 영화 속 수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이제 이 시대에서 코미디처럼 우스운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잘린 손가락


영화의 후반부 쯤 수남이 유리병 속에 보관하고 있던 남편의 잘려버린 손가락을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제때 봉합되지 못한 손가락은 이미 괴사한지 오래다. 유리병 속에 보관된 손가락은 수남에겐 언젠가는 다시 남편의 손가락이 붙을 수도 있다는 가망 없는 희망일지 모른다. 그 손가락을 꺼내보는 순간, 영화 속에서 수남이 다다른 곳도 그러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가망 없어졌고 수남이 저지른 행동들은 괴사해버린 손가락처럼 돌이킬 수 없을 때였다.


한없이 위축된, 왜소해 보이는 여성이 단칼에 그녀를 억압하던 이들의 목을 베는 것을 보아도 이상하게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한 인간에게 쥐어진 칼은 결국에는 스스로를 향하게 될 것이다. 현실 속에서 수남은 영화의 처음에 등장했던 심리상담소 바깥에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여성들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전제되어 영화 속에서 등장했던 존엄이라는 가치는 사실 삶에 있어 절실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실한 나라’에서 존엄은 너무나도 쉽게 잘린 손가락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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