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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영화 <왕초와 용가리> 인디토크(GV) 기록

by indiespace_은 2016. 9. 23.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영화  <왕초와 용가리>  인디토크(GV) 기


일시: 2016년 9월 12일(월) 오후 8 상영 후

참석: 이창준 감독

진행: 한경수 프로듀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다영 님의 글입니다.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영등포 쪽방촌에서 1,095일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긴 시간의 기록을, 또 그 안에서 감독이 보고 느낀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왕초와 용가리> 이창준 감독과 한경수 프로듀서가 인디스페이스를 찾았다.



한경수 프로듀서(이하 한):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한경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창준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쭉 지켜봤는데요, 저는 이 영화가 감독이 본인의 뼈를 고아서 만든 진한 사골과 같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촬영만 3년, 개봉까지는 4년이 걸렸습니다. 이창준 감독님도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창준 감독(이하 이): 안녕하세요. <왕초와 용가리> 감독 이창준입니다.


한: 영등포 안동네는 경계가 심해 촬영뿐만 아니라 접근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이: 실은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상현’이라는 친구가 커뮤니티 리더, 일명 ‘왕초’라고 불려요. 안동네는 일단 그 친구를 통하지 않으면 누구를 만날수도 없고 왔다갔다할 수도 없어요. 상현을 만나서 “저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입니다”하면서 명함을 건네주니까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칭칭 감은 명함 뭉치를 꺼내서 보여줬어요. 방송사와 신문사 등 여러 매체에서 그렇게 수없이 왔다 가니까 처음에는 경계를 하고 싫어하더라고요. 평소 접근하듯이 하면 안되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 후로도 여러 어려움이 많았어요. 제가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으면 그 옆 벽을 발로 뻥 차면서 간을 보고 계속 겁을 주고 협박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시간을 정해놓고 출근하듯이 계속 나갔어요. 취재활동은 아예 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그 근처를 맴돌면서 그렇게 서서히 친해졌어요. 한 달 정도 그렇게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내가 뭘 하려는 사람인지 뻔히 아니까 와서는 “당신, 뭐 찍고 싶은데? 말만 해봐. 내가 다 해줄게. 섭외도 해줄게.” 이러는 거에요. 너무 기뻤어요. 이제 그들이 나를 궁금해 하는구나 싶어서요. 그 다음부터는 더 기를 쓰고 함께 놀았죠. 더 친해지려고. 두 달쯤 지나니까 드디어 상현이한테까지 허락이 떨어졌어요. 그 후 이 사람들과 살아보자 해서 석 달 방을 얻어서 살게 되었어요.


한: 인물이 몇몇 나오는데, 그 중에 주인공 왕초 상현과 가족 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 상현이 이전에 시사회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요즘 정신 없지? 밥 잘 챙겨먹고 나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극장 개봉 해라. 너 성공하고.”라고 말 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생활고를 겪으면서 촬영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자기가 구호단체에서 받은 쌀을 제 차에 실어주기도 하고, 겨울에 맨 손으로 촬영을 하고 있으면 장갑도 끼라고 주고. 그렇게 도움을 받으며 촬영 했습니다. 상현은 저의 친구가 되었고 결국은 그의 꿈도 이뤘어요. 아들과 올해 초부터 같이 살게 되었는데, 아들이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회복 중에 있습니다.



한: 개봉 전에 시사회를 했는데, 상현 씨하고 미진 씨하고 아들이 와서 같이 영화를 봤었죠. 그리고 감독님은 개봉 전에 광주에 사시는 정선 씨 어머니도 뵙고 오셨지요?


이: 정선이가 죽었을 때 저는 한창DMZ국제다큐영화제를 위해 편집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제 휴대전화가 고장 나서 연락처를 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연락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개봉 전에 어머니를 봽고 영화 개봉한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옛날 촬영갔던 기억을 더듬고 수소문을 해서 찾아갔어요. 정선이 어머니가 저를 보자마자 우시더라고요. 제가 영화 개봉하게 되었고 광주에서도 개봉한다고 말씀 드렸어요. 자고 가라는 거 만류하고 나오는데, 찜질방 청소로 어렵게 돈을 버시는 어머니가 제 주머니에 10만원을 차비하라고 넣어주셨어요.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는 저에게 전화하셔서 남들이 쓰레기처럼 보는 내 아들을 한 사람으로 담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관객: 안동네를 소재로 잡아 기획하고 촬영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 안동네를 찍기로 마음 먹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다 “너는 마을에 관심이 있나봐”라는 말을 했어요. 제가 이전에 방송 다큐멘터리를 할 때도 동네, 공동체에 대한 다큐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사람들이 다 인생을 자기 스스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소속된 커뮤니티 안에서 귀결된 삶을 살거든요. 본인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공동체의 운명과 성격에 따라서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안동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실은 이 ‘쪽방촌’이라는 말도 나중에 90년대 들어와서 만들어진 거고 원래 명칭은 ‘안동네’에요. 지금 영등포 일대에서 활동하는 NGO단체가 한 200개가 넘습니다. 주민들과 거의 숫자가 비슷한 거에요. 도움을 주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아프리카 촬영 갔을 때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원시적인 지역인데, 컴퓨터가 구비되어있고 태양열 발전기도 설치되어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안 써요. 못 쓰죠. 관리할 사람도 없고 쓰는 법도 모르니까요. 그 족장 인터뷰를 했는데, “너희들은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물어봤어? 너희가 줄 수 있는 것, 주고 싶은 것을 주잖아.”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안동네를 통해서도 드러나듯 우리의, 그리고 복지단체의 안이한 도움의 손길과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그들의 운명도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상현이가 교회와 손을 잡으면서 이 공동체가 거의 다 무너졌어요. 상현이를 중심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해요. 그냥 기초생활수급자로 달마다 나오는 돈 받아 길거리에서 밥 한 끼 나눠주는 거 얻어먹죠. 그러니까 그 나오는 돈은 거진 술 사서 마시고.


관객: 영화에서 ‘저렇게 도움을 주는 손길들이 나는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감독님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실제적으로 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저도 고민을 정말 많이 한 부분이에요. 일단 그들이 필요한 게 뭔지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은 우리의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가 도와주려고 하는 순간 그 친밀한 관계는 깨져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어요. 이건 제가 3년을 오가면서 느낀 거에요. 그래서 지금의 복지정책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정책이라고 보거든요. 여기 영등포 안동네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고 그 과정을 함께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한: 소위 ‘빈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아예 하나의 장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내에도 해외에도 정말 많아요. 제3세계 국가의 빈곤층에 대한 다큐들이 종종 대상을 동정의 시선으로 보죠. 하지만 이창준 감독은 처음 마을을 들어갈 때부터 그런 시선이 전혀 없었어요.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보고자 했고 영화도 그렇게 표현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인 ‘그들이 왜 거기서 그렇게 사는가.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이 하나 있어요. 근처에 보이는 건물들이 고시원이에요. 넓진 않지만, 깨끗하죠. 욕실과 화장실도 구비되어있고 에어컨도 있고 물도 나오고. 그런데 이 500가구는 거기를 놔두고 여기서 살아요. 그 이유는 고시원의 생활이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이에요. 각자의 방에 하나씩 하나씩 갇혀있는 듯한 거죠. 근데 이 분들은 여기서 서로 기대고 돕고 나누는 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같아요. 그게 이들을 지키는 힘이고. 그래서 비슷한 비용인데도 굳이 쪽방촌에서 사는 거죠. 이런 걸 먼저 들여다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들을 이 곳에 있게 하는 이유를요. 이런 부분을 살려두고 자활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데 무조건적으로 물질투여만 하니까 여러 가지 분쟁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관객: 영화가 처음에 기획된 의도대로 마지막까지 쭉 진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감독님과 출연자들과의 가까운 관계가 영화 속에서도 여러번 드러났는데, 다큐라면 그 관계에도 불구하고 객관화가 필요한 부분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컨트롤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여기서 찍겠다고 생각하고 정한 원칙은 딱 하나 있었어요. 이들이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스토리 같은 건 절대 안 찍겠다고 못을 박고 들어왔어요. 그리고 마지막 결말이 이렇게 날 줄도 전혀 몰랐어요. 다큐멘터리 특성상 스토리를 예측할 수 없어요. 상현이가 정선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제가 휴먼다큐한다고 방송일을 오래 했는데, 인간의 속은 몰라요. 세상에 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읽히지가 않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과정 중에 저란 사람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어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동시에 그러면 그럴수록 더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어요. 

객관화에 대해 말씀 드리면, 너무 친해지다 보니까 사람들이 서로 찍히겠다고 난리인거에요. 이거 찍으라고 그러고, 서로 어떤 웃긴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게 감당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예 안 찍었어요. 눈 앞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찍으라고 그래도 괜히 모른 척했어요. 나중에는 꼭 찍어야 하는 부분만 찍었습니다. 


관객: 정선 씨의 일에 있어서 촬영 중에 그 상황에 개입하고 싶었던 부분, 이를테면 도움을 주고 싶진 않았는지, 그리고 감정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 저 동네에 있으면 워낙 그런 상황들이 많아요. 한 달에 한 명 정도 죽어나가고. 거기서 3년정도 지내면서 그런 삶의 모습들이 일상화 되었기 때문에 제가 딱히 챙겨야 할 정도의 위급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철저히 저 곳 사람이 된 거죠. 누가 길바닥에 누워있으면 “에이, 이놈아, 술 좀 작작 먹어라” 그러면서 뭐 던지고 가고. 


한: 아쉽지만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감독님, 마지막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이: 제가 사인할 때 적는 문구가 있어요. ‘왕초의 친구, 용가리의 형, 이창준.’ 이걸 찍는 동안 이 안동네 사람들이 제 친구가 되었어요. 그제서야 뭔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들이 동정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도 언제든 거기에 갈 수 있거든요. 상현이가 쌀 안 줬으면 저도 갈 뻔했어요. 그들은 그렇게 저의 이웃이 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이들이 그 옆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거고 그렇게 점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이창준 감독이 말했듯이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공동체를 이루고 그 누군가와 항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함께 맞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얻고 큰 성장을 이룬다. <왕초와 용가리>를 보며 그동안 우리가 쉽게 지나쳐왔던 풍경들이 더 큰 울림으로, 또 더 깊은 이해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건드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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