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 <어머니> 5주기 추모상영회 인디토크(GV) 기록
일시: 2016년 9월 3일(토)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 - 이소선 평전』 작가
진행: 김화범 <어머니> 프로듀서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미선 님의 글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9월 3일 이소선 어머니의 기일이 찾아왔다.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투쟁의 현장에서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을 살아오신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인디스페이스는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담은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 추모 상영회를 가졌다. 이날 인디토크에서는 최근 『노동자의 어머니 - 이소선 평전』을 출간한 민종덕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김화범 <어머니> 프로듀서(이하 김): 이소선 어머니의 평전을 출간하셨다. 어머니의 생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셨는데, 어머니를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나?
민종덕 작가(이하 민): 1953년에 태어나 60년대 말에 서울로 왔다. 당시 가난해서 진학이 어려웠고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러던 중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담은 책을 보게 되었고 그의 정신을 쫓아 살기로 결심했다. 책에 적혀있던 주소를 보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김: 직접 평전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민: 1989년이 이소선 어머니의 환갑이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에 환갑 잔치를 해드렸다. 그때 평생을 바쳐 노동운동을 하신 어머니를 위해서 글을 써야겠다 결심했지만, 내가 글 쓰는 사람이 아닌지라 다른 작가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감히 자신이 어떻게 어머니의 삶을 글로 쓰겠느냐는 반응들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직접 쓰게 되었다. 급하게 썼기 때문에 오탈자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정체성이 훼손될 것이 우려되었다. 그들의 정신을 생생히 규명을 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작업을 하게 되었다.
김: 어머니가 타계하신 이후에도 우리는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의 정신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민: 어머니가 늘 강조하시던 말들이 있었다. 하나가 되어라, 죽지 말고 싸워라, 인간차별하지마라. 이 세 가지였다. 어머니는 식민지 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편부모가정에서 자라셨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인간차별에 묵인하지 않고 해결하려 애썼다. 어머니께서는 평등세상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사셨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자고 하셨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단결이 잘 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공동투쟁에 균열이 생긴 것에는 반드시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단결과 야합을 구분 지어야 한다. 하나가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단순히 표면적이고 관습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매년 기일에 추모 상영회를 해왔다. 올해는 영화를 어떻게 보았나?
민: 평생을 바쳐 싸워오신 어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인간적으로 접근한 것이 좋다. 영화 속에서 소녀처럼 귀여우신 면모가 많이 보였는데, 실제로 그러셨다.(웃음)
김: 어머니께서 대중가요를 잘 부르셨다고 들었다. 애창곡이 있었나?
민: 어머니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아들이 그리울 때 ‘해운대 연가’를 부르시곤 했다. 노래 가사가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한 내용이다. 또 찬송가도 즐겨 부르셨다. 전태일 열사는 ‘맨발의 청춘’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가사가 그의 삶과 닮은 점이 많다. 인간적인 사랑을 한 청년이었다.
관객: 4년 전, 대구의 <어머니> 시사회에서 처음 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시사회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나 고위급 직원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냐는 질문에 어머니께서는 등짝을 때려버리겠다고 하셨다.(웃음) 어머니는 실제로 그런 상황에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하다.
민: 어머니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준엄하게 꾸짖곤 하셨다.
관객: 개봉 당시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적극적으로 운동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고 시민운동에 몸을 담았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이나 불쾌한 언행들이 많았다. 여성으로서 시민의 삶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
민: 당시 노동운동 환경과는 많이 달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남녀 구분이 없이 함께 투쟁하는 분위기였다. 현재 그러한 문제점들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노동운동이 남성 위주로 굴러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청계노조 운동은 남성 위주였는데 노조 강제해산 이후 세대교체가 있었고 그 이후에 여성운동가가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 위주였다. 관습적으로 그래왔다. 우리가 깨트려나가야 할 문제이다.
『노동자의 어머니 - 이소선 평전』 편집장: 그런 문제들이 책 안에도 실려있다.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경찰이나 관으로부터 또는 노조 안에서도 그 일화가 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반드시 싸워나가야 하는 문제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민: 이 자리에 계신 임미경 씨에게 말씀을 청하고 싶다. 1977년 노동 교실이 있었다. 투쟁과 배움과 연대의 장이었다. 임미경 씨는 그 당시 노동 교실의 실장이었다. 어머니를 구속하고 교실을 없앴던 국가에 맞서 어머니를 석방하라고 외쳤던 순간이 생생하다. 14살이었던 임미경 씨가 그 당시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는지 모른다.
임미경: 당시 주민번호 앞자리가 000000이었다. 미성년자였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속시키기 위한 정부의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구속되고 우리는 일어섰다. 당시 다들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어머니를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줄 알았다. 그래서 구치소 앞에서 밤마다 외쳤다. 당연히 소용이 없었다. 후에 나를 포함한 5명이 어머니가 있었던 구치소로 잡혀 들어갔다. 밥을 넣어주는 구멍으로 ‘어머니 어디에 계세요!’하고 외치면 ‘여기 있다’하고 대답을 해주셨다. 우리는 당당했다. 죄를 짓고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수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재판을 가도 판검사가 놀랄 정도로 우리는 말을 참 잘했다.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말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도 ‘쟤들은 죄가 없다, 어린애들을 왜 구속하려고 하냐.’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천 명만 길에 드러누워도 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위대한 분이셨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까 여성운동가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가 투쟁했던 그 당시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냥 동지였을 뿐이다. 지금처럼 성희롱이 있거나 여성 자체를 모욕하지 않았다. ‘너와 나는 동지다. 하나가 돼야 살 수 있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한 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굶었다. 그랬던 당시의 정신을 잃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가 되고 투쟁할 수 있다.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태삼(전태일 열사의 동생, 이하 전): 민종덕 저자와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다. 수년간 함께 노동 운동을 해왔다. 위원장이 수시로 바뀌던 혼란의 시절과 지나온 파란만장한 시간이 민 작가에게 배어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희망적이었던 시간이 언제였나?
민: 아무 잘못 없이 청계노동 운동 위원장 해임을 당했다. 강제로 쫓겨났다는 사실이 젊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때 많이 울었다. 가장 희망적이었던 순간은 단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기쁜 순간이다. 수 십년 간의 노동운동 생활 속에서 이겼다는 기분이 들었던 순간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는 노동계급 자체가 승리한 순간이었다. 그 감동이 앞으로 남은 생에 또 있을지 모르겠다.
전: 형(전태일 열사)과 함께 뛰어 놀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기를 희망한다.
김: 마지막으로 청년 노동자로 살아갈 이 시대 젊은 노동자들에게 어머니의 삶을 비춰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민: 우리 아이들도 청년인데, 지금의 청년들을 보면 우리가 과거에 뭐했나, 이런 세상 물려주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나 하는 자괴감이 가장 먼저 든다. 2002년 월드컵 때 생기발랄한 청년들을 보면 뿌듯했는데, 더 비참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참 아프다. 뭘 제시해줘야 할까. 방법이 없다. 약한 놈들이 뭉쳐서 싸우는 방법밖에. 그들이 아무리 찢어 놓으려 해도 어떻게 하면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 끊임 없이 고민해야 한다.
김: 긴 시간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평전과 영화를 통해 어머니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얘기를 건넬 것 같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우리들의 많은 대화가 오갔으면 좋겠다.
‘저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십시오.’ 1970년 22살의 전태일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다. 아들 하나를 잃고 수천, 수만의 아들을 얻은 이소선 어머니.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켜내며 살아오셨다. 아들 전태일의 죽음 이후 그분의 삶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였다. 영정 사진 속 어머니는 여전히 마이크를 쥐고 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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