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행_눈길을 걷다> 한줄 관람평
김은혜 | 눈밭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자들이여, 부디 구원받으소서
박정하 | 마음의 짐 진 모든 이들이여, 우리 손을 맞잡고 이 눈길을 함께 걷자
채소라 | 홀로 남겨진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종교라는 소재, 그 사이를 촘촘하게 채운 배우 김태훈의 미친 연기력
김민형 |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을 위하여
위정연 | 느리지만 신중하게, 때로는 신비롭게 다가오는 영화 속 화법
김수영 | 혼자 눈길을 걸어야 할 당신과 보고 싶은 영화
<설행_눈길을 걷다> 리뷰
<설행_눈길을 걷다> :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을 위하여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형 님의 글입니다.
자기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잘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할 때도 있고, 무언가에 중독돼 몸이 다 망가진 후에야 새삼 중독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의 의지대로 삶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삶은 개연성 있게 흘러가지 않기에 우리는 꽤 많은 부분을 우연에 맡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정우(김태훈 분)도 그렇다. 정우는 한 수도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그는 왜 수도원으로 향했을까. 혹은 향할 수밖에 없었을까. 선택을 내린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마치 운명처럼 <설행_눈길을 걷다>는 시작한다. 정우는 수도원에서 젊은 수녀 마리아(박소담 분)를 만난다. 호기심이 많은 마리아는 정우에게 호감을 보이며, 금단 증세로 고통 받는 그를 보살핀다. 그런데 둘이 나누는 대화가 어딘가 이상하다. 영화의 초반, 동네 슈퍼 앞에서 마리아는 정우에게 서울에는 눈이 많이 오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정우는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왜 그는 하늘을 쳐다봐야만 눈이 온다는 걸 알 수 있다는 듯이 답했을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발생한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정우가 마리아에게 왜 그렇게 잘 해주는지 묻자, 마리아는 아저씨 오기 전날 꿈을 꿨다며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답한다.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많은 설명을 던져주지 않는다. 영화는 차곡차곡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쌓아간다.
정우와 마리아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어떤 접점이 있는 것만 같다. 그녀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그녀의 호의를 꺼리다 우연히 그녀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중반부, 차 안에서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면서 둘의 대화는 더는 어긋나지 않고 조금씩 맞아간다. 하지만 둘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공간을 남겨둔다. 마리아는 자기 꿈을 설명하며 꿈에 나온 아이가 정우인 거 같다고 한다. 더는 설명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렇게 말할 뿐이다. 정우 또한 왜 술을 먹게 되었는지를 묻는 마리아의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도 알코올중독자였기에 술은 항상 옆에 있었다고 말할 뿐. 무엇을 잊기 위해서 술을 먹었는지 끝내 말할 수 없다. 서로의 상황을 끝내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설명할 수 없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대화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정우의 꿈(환상)과 현실(비환상)이 교차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확실해 보이던 꿈과 현실의 경계는 점점 무너져 내린다. 영화 후반부에선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그런데 감독은 설명을 차단하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역설적으로 인물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오히려 인과관계를 뒤튼 후에야 마리아가 꿨던 꿈과 정우의 어린 시절,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마치 마리아가 점을 연결해 그물망을 만든 것처럼, 감독은 영화의 컷을 그물망처럼 엮어낸다. 관객은 얽혀있는 그물 속에서 영화의 컷이 멈추는 지점(경계를 허무는 지점), 말이 멈추는 지점에 집중한다. 이로써 관객은 환상과 비환상의 경계에서 자신을 투영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때론 그 순간이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다. <설행_눈길을 걷다>는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을 위한 영화이자, 설명되지 않은 상처를 추적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이 순간의 기원을 알기 위해 현실과 꿈 그리고 어린 시절을 교차한다. (이로써 서론에서 던졌던 ‘정우는 왜 수도원으로 향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풀리게 된다) 만약 상처의 시작을 안다면, 상처가 또다시 나타난다 해도 계속해서 상처를 메울 동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엔딩, 정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발이 휘날리는 길 위를 홀로 걸어간다. 상처가 다시 정우를 힘들게 해도, 이제 정우는 자신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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