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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 한 가족의 역사에 담긴 근현대사의 질곡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님의 글입니다.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말하는 ‘괴물’은 각종 괴수영화에 나오는 괴물들도,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괴물을 말한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2009)는 3세대에 걸친 한 집안의 역사를 조망하며 하나의 답을 들려준다.
1세대 정대만은 일제강점기에 집안의 기틀을 잡는 인물이다. 1931년, 청년 대만은 토지사업을 관장하는 친일 관리로 부역한다. 늘 조선인들의 응징을 두려워하고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찾지 못하나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친일 행각을 지속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친구의 홀부모를 돌보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후 최소한의 인간성을 저버린 선택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학송은 그의 아들로 전후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다. 포격으로 동생을 잃은 경험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는 인물이기도 하다. 1965년, 청년 학송은 아버지의 탄탄한 배경을 등에 업고 나일론 회사에 취직해 승승장구 한다. 이후 사회생활에서 몇 번의 실패를 겪으며 무너진다. 대만의 손녀이자 학송의 딸, 태선은 개발독재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으며 가족의 ‘현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2009년, 중년의 태선은 남편과 떨어져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을 무시하기 일쑤고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학대에 가까운 양육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노년의 정학송이 위독해지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009년을 중심으로 윗세대들의 청년시절과 태선의 유년 시절이 중간 중간 삽입된다. 영화는 근현대사의 질곡과 그 속에서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빚어내는 결과들이 세대를 거쳐 어떤 모습의 유산으로 전해지는지 집중한다. 전쟁을 일상처럼 겪었던 학송은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몸을 감추는 등 지독한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다. 개발독재 시대에는 권력 다툼에서 미끄러져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이런 경험들은 중년의 학송이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갖는 배경이 된다. 또한 학송은 친일로 집안을 지탱해 온 아버지에 갖는 존경심이 대단하다. 이런 감정은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로 표출된다. 태선은 이런 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자라면서 가치관을 형성한다. 역사를 거치며 축적되어온 피폐한 삶의 흔적은 한 집안과 개개인에게 대물림되며 내면에 깊게 자리한다.
마지막 10분에 이르면 이런 유산들이 어떤 형태로 표출되는지를 보여준다. 유년의 태선은 자신이 받은 학대를 고스란히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고, 중년의 태선은 남편 상호를 지속적으로 무시하고 기만하며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 태선뿐만 아니라 정씨 가문 모두의 속은 곪을 대로 곪아있다. 상호가 일으킨 사건을 마주하고서야 태선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집안의 잘못된 고리를 자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3세대가 생활해 온 낡은 저택의 고장난 문을 대대적으로 고치는 행위가 이를 상징한다. 물론 오랜 시간을 거치며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 자신의 일부가 된 것들을 바꾸는 건 문을 고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자각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다음 세대를 대함에 있어서 기존처럼 안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일함은 또 다른 괴물을 낳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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