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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초심을 되새기며 새롭게 나아간다 '한다감2 - 김환태 기획전' 대담 기록

by indiespace_은 2015. 12. 23.

초심을 되새기며 새롭게 나아간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2 - 김환태 기획전  대담 기


일시: 2015년 12월 21일(월) 오후 7

참석: 김환태 감독, 이도훈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진행: 김보람 감독(신나는 다큐 모임 회원)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님의 글입니다.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시간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 2]이 막을 내렸다. 12월, 마지막 기획전의 주인공은 김환태 감독이다. 강경태 열사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감독이 속한 세대의 고민을 담은 <1991년 1학년>(2001),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룬 <708호, 이등병의 편지>(2004), 원폭피해자들의 삶을 담아낸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2012)까지 감독의 세 작품이 12월 7일과 20일 두 번에 걸쳐 관객들을 만났다. 감독은 데뷔 후 갈지자로 우왕좌왕 시간을 지나왔다고 말하지만 걸어온 그 길 위엔 다큐멘터리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김보람 감독(이하 진행): 김환태 감독 기획전이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 2’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다. 세 편이 상영됐는데 선정 계기를 들어보겠다.


김환태 감독(이하 김): 마무리를 하게 돼서 기쁘다. 연말에 이렇게 조촐하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고 감사하다. 신나는 다큐 모임 후배분들이 내년엔 어떻게 하실지 기대가 된다. 

세 편을 선정하라고 해서 <1991년 1학년>, <708호, 이등병의 편지>,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을 선택했다. 15년 정도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는데 크게 봤을 때 내가 다룬 주제는 이 세 가지다. 첫 번째, <1991년 1학년>의 주제는 대중운동과 기억이다. 사회적인 경험을 해왔던 걸 다큐로 만든 것이다. 두 번째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다루고, 마지막은 원폭, 핵문제를 다룬다. 세 편을 선정하며 예전에 썼던 연출의도를 좀 찾아봤다. 세 작품엔 ‘기억’과 ‘기록’과 ‘다짐’의 교집합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모든 다큐가 기록과 기억을 다루지만 나만의 특징을 꼽자면 다짐인 것 같다. 이도훈 활동가께서는 ‘투사’라는 표현을 써주셨더라. 투사라는 게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한다는 데에서 의미를 지니지만, 영화적 고민을 덜 한다는 의미로 읽어서 반성을 하기도 했다. 영화적 수사의 문제로 방황했던 시기를 생각하기도 했다. 

<1991년 1학년>은 당시의 경험, 젊은 날의 기억을 단지 추억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기억하고 삶의 동력으로 삼고 싶어서 상영작으로 선정했다. 당시에는 지루했는데 다시 보니 재밌더라.(웃음) 영화에 사람들의 10년간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져 있는데 지금도 유효한 내용이 많은 것 같더라. 이 작품이 끝나고 다큐 작업을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다큐를 하겠다는 마음을 다큐라는 매체로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사회적 책무도 많이 느꼈다. 그 과정에서 2002년에 자연스럽게 운명적으로 <708호, 이등병의 편지>를 시작하게 됐다. 다큐를 해나가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과의 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708호, 이등병의 편지>는 인물과의 신뢰관계가 있어야 이야기가 쌓여나간다는 걸 직접 체험하고 만끽했던 작업이다. 농성장을 이끌던 사람들이 ‘강철민이란 사람이 현역군인인데, 농성한다고 찍어야 하지 않겠냐’ 먼저 제안해주셔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자연스레 이뤄진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포함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내게 중요한 주제다. 내 안에 내재된 남성성, 국가주의에 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 주제를 다음 작업으로 기획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작품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작품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 건 2005년도다. 이 분들이 히로시마로 종이학을 들고 순례를 떠나는 상황을 보며 한국인 원폭 환우분의 존재를 알게 됐고,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7년 정도 기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가운데 2009년 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스스로가 뚝심이 있어서 하나를 물면 끝까지 간다고 생각했는데 당시는 그게 힘들었다. 진짜 열심히 다큐 작업을 하고 나름대로는 영화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굉장히 없더라. 2007,8년 쯤 어느 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다. ‘작품을 몇 년 걸려 열심히 만들었는데 관객으로 만난 사람들을 따지니까 2000명도 안 되는 것 같다’고. 그 때가 힘들었다. 열심히 했는데 관객들을 만나는 게 힘든 현실. 생활인으로서도 힘든 시기가 찾아왔었고. 다 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었고 작품에 대한 치열함이 좀 떨어졌다. 2009년부터 3년 정도는 두문불출하며 영화제에도 많이 안 가고 사람들도 잘 안 봤다. 그러다가 2011년 원전 폭발 사고가 있었고 그동안 기록해 놓은 걸 토대로 영상을 만들고 틀 기회가 있었다. 25분짜리를 만들었는데 핵에 대한 내용을 넣어서 넓히면 장편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방금 말씀드렸지만 영화에 대한 치열함이 떨어졌던 시기의 작업이라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이란 작품은 개인적으론 영화적 수사로서는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지만 내겐 소중하게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분들을 만나고 영화를 만들며 전해들은 말들이 무척 감사했다. 감사하다는 그들의 말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핵 마피아>라는 작품을 하고 있다. 작업을 더 빨리 끝냈으면 같이 볼 수 있었을 텐데, 내년 3월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과 완전히 다르고 매우 치열한 작품이다. 현재로선 매우 만족하고 있다. 물론 끝나봐야 알겠지만.(웃음) 어찌됐던 이 세 작품은 내게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도훈 활동가(이하 이): 이 기획전에 초청받았을 때 매우 반가웠던 것은 선정된 세 작품 중 하나를 무척 좋아하고, 또 못 본 작품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보고 정리하자는 마음이 들어서다. 두 가지의 생각을 했다. 하나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내가 잊고 있었던 다큐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또 하나는 다큐는 무엇을 왜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그런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오르더라. 매 작품마다 나를 부끄러워지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다큐가 가지는 큰 힘이 있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다큐가 가진 원론적 질문에 관한 것을 먼저 얘기해보겠다. 세 작품의 연출 구성, 작업 태도 등을 보면서 작품을 만들 때 느껴지는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다큐의 내러티브가 사회적인 관심을 다루면서 특정 개인 한 명을 영화의 중심으로 잡는다는 점이다. <1991년 1학년>은 강경대 열사가, <708호, 이등병의 편지>은 강철민을,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은 한전순 회장을 서사의 중심에 둔다. 감독님에게는 사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통해 사회구조 비판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속성과 시의성이다. 시의성보다는 연속성에 방점을 두고 싶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에 대한 관심, 두 번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통한 권력에 대한 문제, 세 번째는 핵과 반전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 있지 않나. 이런 걸 연속적으로 작업하시는데 이 점이 재밌는 건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 같은 경우 제작에 7년이 걸리며 시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감독님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걷다보면 시대의 부름에 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감독님 작품 안에선 항상 기존의 대중 미디어나 권력자들의 반대편에 소수자가 위치해있는 걸 볼 수 있다.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에도 중간 중간 미디어의 모습과 활동가, 전문가들이 반박하는 모습이 함께 있어서 대립되는 장면이 형성된다. 감독님이 극을 구성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진행: 방금 말씀해주신 걸 듣다보니 한 장면이 생각난다. 마지막 한정수 회장이 흥겹게 춤을 추지 않나. 마지막에 감독님도 함께 춤을 추신다. 감독님은 찍는 대상을 일으켜 춤추게 하고 함께 춤출 수 있는 사람이다. 감독님께서 작업할 때 어떻게 개인에게 다가가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는지가 궁금하다.


김: 작업을 해나가는 방식은 ‘시간’이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들어온다. <708호, 이등병의 편지>도 이전의 관계들이 있었기에 작업이 가능했다. 아직까지도 그 분들과 연락한다. 그게 숙제 같은 거다. <핵 마피아> 작업은 이전과 작업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이다. 사람이 잘 모를 때는 갈등이 생기는데 조절하는 것도 제 몫이라 생각한다. 내게 맞는 작업은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관계 맺는 방식은 상황마다 달라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왔다.


진행: 개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이: 스타일에 대한 말씀을 하셔서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나는 그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는데 감독님은 은연중에 부정하고 넘어서려고 하시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은 운동과 다큐 작업을 분리한 게 아니다. 생활하고 운동하는 분에 대한 기록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편집하는 식이었는데 그런 스타일에 대해서 아쉬운 점이 있으신 게 아닌가.


김: 절대 그런 건 아니다. 나의 자연스런 방식이다. 단지 진화하고 싶고 새로운 방식들을 하고 싶은 것이고 이건 스타일을 넘어서기 위한 제 다짐이다. 더 치열하게 작업하겠다는 다짐으로 이해해 달라.


이: <1991년 1학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나는 03학번이라 91년의 일을 이 영화를 통해서야 알게 됐다. 첫 작품으로 이걸 만들게 된 계기가 경험적인 요인에서 뭐가 있었는지 알고 싶다. 다른 작업은 인물들이 생존해있는데 이 작품은 기억과 싸우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왜 이 작품을 처음으로 했나.


김: 1991년 4월 26일, 강경대라는 친구가 백골단에 의해 죽은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 그 당시에 잠시 어디 갔어야 해서 학생회실에 있었는데 방송으로 그 소식이 나와서 학생들과 몰려갔던 적이 있다. 내가 죽을 수 있었고 우리가 죽을 수 있었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국가 폭력에 대해 체험적으로 느꼈다. 그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그 부채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군대를 갖다온 후 다큐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에서 그 부채의식 때문에 자연스레 이 작업을 하게 됐다. 생계에 대한 고민도 있었는데 이왕할거면 제대로 해야겠단 생각으로 당시 다니던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하게 됐다. 2000년에 독립해서 2002년까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모두 부채의식을 갚기 위한 작업이다. 영화 내용을 보면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오더라.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나오고 박원순, 한상렬, 이수호 등을 인터뷰했다. 나에게는 사적인 기억이지만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부분이라 환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91학번들이 강경대 열사에 대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영화는 몇 부분으로 나뉜다.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장례식 과정, 그리고 이후 시위가 전개될 때의 혁명의 분위기가 1부에 압축적으로 편집돼있다. 2부부터 전문가, 91학번들이 나와서 이야기한다. 2부로 넘어가며 느꼈던 게, 1991년 5월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적 분위기에 열광했던 운동권들이 5월 이후 국면이 바뀌며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데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한다는 점이다. 감독님이 내레이션을 하지 않으셔서 감독님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5월 국면에 대해 당시 감독님은 어떤 열망을 갖고 있었나. 그 이후의 운동에 대한 아쉬움도 복합적으로 느끼시는가.


김: 비슷한 느낌이다. 내 생각은 내레이션이 아닌 자막으로 이뤄져 있다. 이 작품에선 내레이션을 하지 않았고 <708호, 이등병의 편지>은 나 혼자 내레이션을 했고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은 둘이 했다. 이것도 나의 작은 변화들 중에 하나다. 여하튼 그 땐 자막으로만 했는데, 처음 자막으로 정리했던 코멘트가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열망은 절대적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다. 마지막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체 게바라의 말을 썼다. 동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것들에 대한 것이다. 이후 학생운동이 변화되고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는데 내가 경험했던 91년 5월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그 때 이후로 권력집단의 프레임 안에 대중운동이 말려드는 국면을 띄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망들이 사그라졌다. 너무 패배감이 크니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마지막에 91학번들이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제가 바라는 것들을 자막으로 표현했다. 91년을 정리하는 데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708호, 이등병의 편지>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 2007년쯤에 전역을 하고 봤다. 나는 2004년 11월에 입대를 해서 일병 넘어갈 때쯤에 이라크에 자원해서 6개월간 파병을 갔다 왔다. 작품을 보며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됐다. 나는 정치외교학과 출신이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주변의 선배, 친구들과 입대 전 파병 반대와 반전을 외치며 군대에 가서도 총을 들지 않겠다고 얘기했는데 막상 군대를 가니까 하나씩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 순응하게 되고 나중엔 비판적 의식마저 사라져버리더라. 전역 후엔 내가 잘못된, 그릇된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영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놀라웠던 건 강철민 씨가 옆집에 있는 청년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도 똑같이 강철민 씨를 보고 신기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친구가 과연 큰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 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라 8일간 짧게 만났던 사람인데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또 첫 만남 이후 어떻게 머릿속으로 빠르게 작품 구상을 하셨나.


김: 작품 구상을 빠르게 하진 않았고 강철민이란 친구를 어떻게 충실히 기록하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옆에서 거추장스럽게 뭔가를 캐내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다. 끝나고 나서 프리뷰하면서 강철민이란 사람의 변화과정을 알게 된 면이 있다. 신념을 뚜렷이 보여주는 친구들과 다르게 약간 어리바리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과정을 잘 기록하고 남겨놓는 것이 중요했다. 작품이 다 끝나고 난 후 감옥에서 출소하고 만나보니까 더 어리바리하고 착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은 결혼해서 대구에서 잘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다음 작업을 하면서는 공개하지 않은 내용이 많아서 출소 얘기관련해서 또 만나지 않을까 싶다. 그 당시엔 쭉 따라가는 게 중요했다.


이: 영화를 보면 농성장 안에서의 일들을 기록했던 게 영화의 주요 임무라고 생각하고 찍었던 것 같은데 거리두기를 의도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강철민 씨에 대한 언론의 말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독과 강철민이 어느 정도로 친밀한지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철민이’라고 부르시지만 친해진 게 사후적인 건지, 실제로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 사후적인 거다. 철민 씨라고 불렀다. 농성장에서 그 친구가 얼마나 힘든지를 봤기 때문에 그 친구가 울면 같이 울었다. 거리두기를 일부러 하진 않았다. 처음엔 그냥 어려웠다. 중간 중간 이 친구들이 어떤 고민을 할까 상상은 했다. 카메라가 질문을 던지는 것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정도 까지만 했다. 오히려 편집을 하며 철민이에 대한 애정이 강화됐고 이후 출소하고 난 뒤 영화를 같이 보고 얘기도 하면서 ‘철민아’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관계가 됐다. 


관객: 기록하는 것 자체를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굳이 작품화하지 않아도 기록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김: 그렇진 않다. 내가 해야 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 여성 문제에 대한 기록을 잘 하지 않는다. 그걸 작업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고 해왔던 걸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자기 영역이 있다. 다양한 영역을 하진 않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들이 있고 이후 작업으로 지속될 예정이다. 다양하게 다 기록하는 게 아니라 쌓아온 관심영역에 대해 기록한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을 보장할 수 없다. 또 다큐들이 공개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기도 했다. 기록을 공개할 타이밍 같은 것들에 조급함은 느끼지 않나. 그런 것에 대해 조언하는 사람은 없나.


김: 그런 얘기 하는 사람은 없다.(웃음) 작업을 꾸준히 하고 남겨놓으면 되는 것 같다. 농부의 마음으로 다큐 작업을 한다고 말하는 형이 있다. 김태일 감독이다. 작업을 씨앗뿌리는 마음으로 하는 거다. 이도훈 활동가가 나에 대해 쓴 글 중에 ‘장기간의 작업이 종종 현재성, 시의성, 현재성마저 담보하는데 이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에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가능하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다보면 시의성과 현장성이 담보되는 거고 그러면 어느 순간에 좋은 작품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하는 거다. 장맛이 좋으려면 많이 묵혀야 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 않나. 묵혀서 거름만 되지 않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여전히 초심을 잊지 않고 잘 살겠다고 후배들에게 얘기한다. 꾸역꾸역 걸어가는 선배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롤모델이 김태일 감독인가.


김: 롤모델은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형이다. 나이 많은 형. 수염난 형.(웃음)


진행: 두 분 모두 마지막 말씀 부탁한다.


이: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에 대한 얘기를 많이 못했는데, 고통에 대한 문제들을 어떻게 영상화하고 사람들에게 인지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요즘 나의 화두다. 이 작품을 보면 핵에 관련된 얘기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았던 경주에는 원자력 폐기물 처리장이 있다. 물론 경주도 서울만큼 면적이 넓어서 발전소가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처리장이 들어섰을 때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크게 없었다. 이런 걸 누가 알려서 각성을 일으킬 건가하고 생각해보면 방송의 역할은 아닌 것 같다. 방송의 힘으로 스펙터클화되면 오히려 무뎌질 것 같다.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해주는 게 영화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감독님의 다음 작품 <핵 마피아>를 기대한다.


김: <나쁜 나라>에 나오는 유가족들의 말씀 중 제일 가슴 아픈 말이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막기 위해 우리가 싸운다’는 거다. 그 분들이 싸우게 될 줄 알았겠나. 카메라를 든 사람은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핵 마피아>는 규모 있게 작업한 첫 작품이다. 시스템을 밟으면서 치열하게 작업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내 작품은 대중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적이 없다. 개봉을 해 본적도 없고. 좀 더 대중과 접점을 가지고 싶다. 다큐라는 매체를 통해 시대와 호흡하고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잘 만들고 싶다. 열심히 만들고 싶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친구에 대한 부채의식을 품고 다큐를 시작한 김환태 감독. 들인 노력에 비해 작품이 많은 관객들과 만나지 못해서 치열함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고 생활인으로서 위기를 겪은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곡절에도 감독은 작업영역을 고수하며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감독은 현재 새로 채택한 도전적인 작업 방식, 성실히 모아둔 기록들을 토대로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작품 제목은 <핵 마피아>. <잔인한 내림 - 遺傳(유전)>와 맥이 닿아 있는 이 작품은 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되짚는다. 내년 초 완성될 감독의 용감한 다큐멘터리가 보다 많은 관객들과 소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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