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기자단 [인디즈] 차아름, 심지원 님의 글입니다.
지난 9월 24일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장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개봉했다. 이번 작품으로 정재영은 <우리 선희>(2013)에 이어 홍상수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추었다. 이에 정재영이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자주 출연하는 배우들이 있다. 특히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찌질한 남자’를 연기한 배우들은 실제 그들의 성격이 그렇지 않을까 의심이 될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김상경과 유준상, 이선균, 그리고 최근 정재영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이른바 ‘홍상수의 남자들’로 손꼽을 수 있다. 여러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특유의 찌질함을 선보였던 네 배우의 작품과 작품 속 그들의 연기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 뻔뻔하게 유쾌한 남자 김상경
홍상수 감독의 초기 영화부터 페르소나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배우가 바로 김상경이다. <생활의 발견>(2002)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극장전>(2005), <하하하>(2010)를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김상경 이후 숱한 배우들이 ‘홍상수의 남자들’로 이름을 알려왔지만, 그 중에서 홍상수의 언어를 이토록 뻔뻔하면서도 유쾌하게 표현해내는 배우는 전무후무 김상경이 유일하다.
(▲ <하하하>의 '문경'역 김상경)
<생활의 발견>의 경수, <극장전>의 동수 그리고 <하하하>의 문경. 이름조차 비슷한 세 인물모두 배우 김상경이 분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연극판에서 영화로 진출한 배우다.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수의 모습에서 뻔뻔함과 순진함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발견할 수 있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 마주한 두 여자 명숙(예지원 분)와 선영(추상미 분)을 향해 은근하게 드러내는 욕망과 합리화가 그 근거다. ‘우리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이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처럼, 김상경의 경수는 다소 불편하고 어색한 이야기들이 먼 타인의 것이 아니라, 실은 피부로 느낄 만큼 근접한 것임을 인지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극장전>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허상이 모호하게 변주되고 있는 이 영화에서, 10년 동안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하고 있는 반(半) 백수 동수 역시 찌질한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극에서는 ‘죽고 싶다’는 말을 그토록 반복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김상경 식 해석이 이 영화의 최대 관전 포인트라 하겠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하하하> 속 문경은 비교적 호쾌하고 솔직하지만, 특유의 후안무치는 여전하다. 문경은 통영에서 우연히 만난 성옥(문소리 분)에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순정이라는 이름 아래 강력히 호소한다. 적당히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적당히 뻔뻔할 줄 아는 문경은 그 어느 때보다 김상경이라는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옷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뻔뻔하면서도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도맡아 해 온 배우 김상경이 있었기에, 홍상수식 유머 코드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2. 진지한데 웃긴 남자 유준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을 시작으로 유준상은 <하하하>, <북촌방향>(2011), <다른 나라에서>(2012), 단편 <리스트>(2011)등 홍상수 감독의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는 칸 영화제에 3년 연속 초청되며 그가 명실공히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입증했다.
(▲ <다른 나라에서>의 '안전요원'역 유준상)
유준상은 특유의 말투를 가지고 있다. 꾹꾹 눌러 말하는 듯 진중하면서도 어딘가 코믹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이런 점은 관객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남긴다. 여전히 구차하고 찌질하지만 진지하고 서글서글한 그의 캐릭터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처음 주연을 맡은 <하하하>에서 그는 극중 가장 유쾌하지만 우울증에 걸려 약을 달고 사는 괴짜 같은 캐릭터다. 극중 불륜관계에 있는 연주(예지원 분)를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만취상태로 큰아버지에게 생떼를 쓰며 연주를 소개하는 대책 없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런 천연덕스럽고 비논리적인 모습들이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북촌방향>은 선배를 보러 서울에 온 영화감독 성준의 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상황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실수를 되풀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다짐하는 모습이 한없이 구차하고, 그런 모습들로 반복적인 유머를 이끌어낸다. <다른 나라에서>의 유준상은 어쩐지 귀엽다.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서글서글한 그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이 영화에서 그는 단순한 배우 역할만 하지 않았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말했듯이 바닷가 배경에 쓰일 텐트를 준비하고 우연히 챙긴 랜턴이 영화의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됐다. 또한 즉석에서 ‘안느송’을 작곡하기도 하며 그는 점차 배우 그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유준상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얼마 전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도 적은 분량이지만 꾸준히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 그가 감독에게 얼마나 신뢰가 쌓인 배우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3. 버럭 하는 뻔뻔한 남자 이선균
<밤과 낮>(2008),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우리 선희>까지.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다섯 작품에서 이선균을 볼 수 있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남자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찌질하고 뻔뻔한 남자로 주로 그려진다.
(▲ <옥희의 영화>의 '진구'역 이선균)
특히 그는 짜증 연기의 1인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버럭 하는 모습이 압권이다. <옥희의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주문 외울날’에서의 그는 아내에게는 핀잔을 듣지만 감독으로서의 허세를 가진 인물이다.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기도 하고 애매한 말들도 학생을 훈계하며 버럭 화를 내버린다. 또 송교수(문성근 분)의 비리를 캐묻지만 자신 역시 곤란한 상황에 빠지자 짜증 섞인 대응을 하는 인물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그도 뻔뻔하기 그지없다. 해원(정은채 분)과 불륜관계이지만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구차하게 설명을 하고 교수로서의 지위도 잃고 싶지 않아한다. 그러나 해원의 옛 남자 얘기에 화를 내며 욕하고 심지어 혼자 울기까지 한다. 반면 때로는 어딘가 애틋하고 짠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옥희의 영화>의 ‘키스왕’에서 진구는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만날래? 만나줄래?”, “나 니가 너무 좋아.” 와 같은 말들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뱉는다. 다른 친구들에게 또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진구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간절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우리 선희>에서의 문수도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선희(정유미 분)가 아직 자신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고 착각하며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문수를 연기한다. 다른 두 남자 주인공 역시 선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쩐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문수가 세 주인공 중에 가장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이선균은 욱하고 짜증 많은 전형적인 찌질함을 보이지만 뭔가 애처로운 캐릭터로 등장하여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다.
4. 비범하게 친숙한 남자 정재영
‘홍상수의 남자들’ 가운데 최신의 계보를 잇고 있는 배우가 바로 정재영이다. 그는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대중들에게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있다. 이러한 꾸준함 덕분이었을까. 그는 우리 주변에 꼭 하나 있을 법한 그런 모습으로 어디서나 존재감을 발한다. 물론 홍상수 영화에서도 그 친숙함은 예외가 없다.
(▲ <우리 선희>의 '재학'역 정재영)
두 사람의 첫 호흡이 이루어졌던 작품은 <우리 선희>다. 정재영은 선희(정유미 분)를 둘러싼 세 남자 중 선배 재학을 연기한다. ‘뭐든지 깊게 파고, 또 파봐야 안다’는 문수(이선균 분)의 말에는 그저 타박만 늘어놓던 재학이, 다른 시간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선희에게 흑심을 내비치는 술집 신은 단연 이 영화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이선균의 문수가 ‘애걸복걸’하고, 김상중의 최 교수가 ‘천진난만’하다면, 재학의 시작은 제법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결국엔 문수와 최 교수를 능가하는 애걸복걸함과 천진난만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배우 정재영이 성공적으로 끌어낸 재학의 찌질함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첫 신에서 행궁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재영의 익숙한 뒷모습과 구겨진 점퍼는 왠지 모를 친근함을 불러일으킨다. 특강일 보다 하루 일찍 수원에 도착한 영화 감독 함춘수(정재영 분)는 행궁 산책 중 만나게 된 화가 희정(김민희 분)에 반한다. 그 후 그녀를 따라다니는 함춘수의 모습이 두 가지 경우의 수로 구성되어 영화의 1부와 2부가 된다. 각 부에서 그가 희정에게 취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1부의 함춘수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말로 희정을 꾀어내는 것에 비해, 2부의 그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다. 태도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 또한 만들어낸 것이 자명하나, 결국 인물이 가진 성급함과 친숙함이라는 본질은 같으며, 그것이 인물의 가장 큰 매력인 동시에 배우 정재영의 매력이기도 하다. 정재영은 실제 모 인터뷰에서 스스로 함춘수와 굉장히 닮아 있어, 애써 연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루어진 캐릭터 분석이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수상의 쾌거를 안겨주었던 것은 아닐까.
김상경, 유준상, 이선균 그리고 정재영까지. 앞서 살펴 본 네 명의 배우들은 각기 각색의 독특한 캐릭터 형성을 통해,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찌질함’이란 키워드를 실현해왔다. 배우는 감독의 페르소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감독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꾸준했기에, 위 네 명의 배우들은 비단 ‘홍상수의 남자들’에 그치지 않고 ‘홍상수가 사랑하고, 두 번 이상 찾아간 남자들’로 거듭날 수 있었으리라.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행보를 기대하는 동시에 응원한다. 더불어 새로이 홍상수를 사로잡을 배우가 멋진 작품으로 나타나, 그 계보를 이어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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