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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침묵을 깨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침묵의 시선> 인디토크(GV) 기록

by indiespace_은 2015. 9. 23.

침묵을 깨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침묵의 시선> 인디토크(GV) 기록


일시: 2015년 9월 17일(목) 오후 7시 30분

참석: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차아름 님의 글입니다.


충격적인 다큐멘터리라는 평을 받으며 화제를 낳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침묵의 시선> 인디토크가 지난 9월 17일 저녁에 열렸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참석하여 <침묵의 시선> 뿐만 아니라 전작인 <액트 오브 킬링>, 그리고 오펜하이머 감독이 영향을 받은 리티 판 감독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보신 이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불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말씀드릴 것도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펜하이머 감독의 영화가 두 편이 공개됐습니다. 첫 번째 <액트 오브 킬링>, 그리고 <침묵의 시선>입니다. 제목으로 보자면 ‘액트’와 ‘킬링’, 오늘 보신 영화에는 ‘침묵’과 ‘시선’이 있습니다. 이미 영화에 대해서 감독 본인이 많은 말을 했어요. 대담들이 있었고 자료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피해가면서 저의 생각을 말해드릴까 합니다. 



















액트에서 시선으로의 변화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게요. 그전에 간단한 저의 기억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리티 판 감독이 내한을 했습니다. 캄보디아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그의 영화 중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2003)이라는 작품을 예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2013년에 방한했을 때 크게 대중적으로 호응이 있거나 반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1985)라는 작품과 더불어서 혹은 그 이상으로 리티 판 감독의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부산에 방문을 했는데 굉장히 큰 화제가 됐습니다. 작품자체도 굉장히 큰 화제가 됐었죠. 오펜하이머 감독이 인터뷰 등에서도 얘기를 했지만 방금 말한 리티 판 감독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해자의 증언은 통상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편이 아닙니다. 증언 혹은 증인이라는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피해자로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증언이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고요, 거기에 플러스 된 것이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오늘보신 영화 <침묵의 시선>에도 이 두 가지가 미묘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식의 불편하고 굉장히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최종적으로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에 목표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향성을 오펜하이머 감독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리티 판 감독이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해 만든 다큐멘터리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의 영향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티 판 감독과 오펜하이머 감독, 둘의 얘기를 드렸던 이유는 제가 처음 <액트 오브 킬링>을 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게 리티 판 감독의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 모두 가해자를 증언자로 위치시키고 한편으로 가해자와 희생자가 조우, 대면한다는 설정이 있고요, 가해자의 증언이 말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 같은 재연의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세가지 측면이 오펜하이머 감독의 영화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리티 판 감독에 대해 얘기를 드렸습니다. 



리티 판 감독의 다큐멘터리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해 얘기 드릴까 합니다. 작품에서 가해자의 증언이 중요하기 때문에 불편함이 있습니다. 이건 작가적 책임의 문제에서 논란이 될 수도 있고요, 실제로 <액트 오브 킬링>은 다큐멘터리 영역 안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적 책임이라는 것은 가해자의 증언을 기록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연출적인 입장까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 안에서 대단히 한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주어질 수 있는 도구 중 하나가 카메라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대상을 찍는 사람이 힘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위치마저도 가해자가 자리를 선점하게 된다면 도구가 갖고 있는 작가적인 위치 혹은 책임성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작가적 책임성에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 감독은 그런 작가적 책임성에 논란이 있음에도 이런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 자각 없는 가해자와 마주하는가, 이를 봐야 하는 관객의 책임과 불편함의 문제, 이런 양쪽의 입장이 있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전자적인 측면이 부각될 것 같고요, <침묵의 시선>은 후자적인 측면, ‘본다. 바라본다.’라는 측면이 부각된 것 같습니다. 전작은 가해자의 증언, 이번 작품은 희생자의 입장에 섰고 또 다른 한편으론 <액팅 오브 킬링>은 ‘액팅’, <침묵의 시선>은 ‘보기’, ‘시선’이 부각된 작품입니다. 


두 감독의 영화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실제로 출연하고 있고 과거의 행동을 재연한다는 것이 공통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인도네시아와 달리 재판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리티 판 감독은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에 처음에는 캄보디아 재판과정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재판과정에 참여하면서 이런 학살이 벌어진 메커니즘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술가가 역사에 참여하게 됐을 때는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참여하는 것과 조금 다른 측면이 있잖아요, 그가 주목한 것은 그 끔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 얼마 뒤에 사람들이 그걸 망각했고,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이젠 이야기하지 말자는 식으로 묻혀 버렸다는 것이에요. 체계적인 망각과 소거의 과정이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끔찍한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지낼 수 있는지가 의아했던 거죠. 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도 그 나이에 캄보디아에 있었고 프랑스로 건너가 살게 되었음에도 자신이 겪은 역사적 상처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와 어떤 방식으로든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떠올린 직업이 영화감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유는 캄보디아 대학살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기억한다’라는 것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거죠. 이미지가 없다면 기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고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이미지, 영상을 찍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가능한 일이죠. 그때 그가 떠올렸던 문제는 이런 범죄가 진행된 메커니즘, 다시 말해 이 감독의 피의 역사의 원제 안에는 ‘킬링머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요. 기계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이죠. 기계가 작동되듯 사람들이 미친 듯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죠. 이 기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됐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피해자의 증언만으로는 합리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죠. (처음에는) 캄보디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수용소의 경비원이었던 사람을 분리해서 인터뷰를 했다고 해요. 이 두 사람을 대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인터뷰 과정 안에서 우연치 않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경비원을 만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신이 수용소에서 경험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분이에요.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 그 사람을 만나 묻고 싶었던 거에요. 수용소에 찾아가서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경비원은 그것에 묵묵부답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저지른 것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게 옛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 안에서 리티 판 감독이 다른 식의 제안을 합니다. 어떤 식으로 했는지를 재연해달라고 하니까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것들을 재연을 하는 거죠. 말로는 숨기거나 말하기가 힘들 수 있는데 행동을 보여달라고 하니깐 자신들이 사람들을 데려와서 어떻게 고문하고 취조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리티 판 감독이 ‘바디 아카이브’라고 표현을 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지워질 수 있지만 아주 일상적으로 반복적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고문하고 해서 이것이 몸의 기억으로 남아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것이 굉장히 놀라운 과정으로 작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감독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와는 상황이 다른 문제에요. 홀로코스트는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태로 학살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 기록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밖에 없는 건데, 크메르 루즈 대학살의 경우는 그들을 계급의 적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그들이 계급의 적인 이유를 알릴 수 있는 조작된 문서들이 차고 넘칩니다. 고문을 가해서 계급의 적임을 자백하게 된 수많은 기록들이 존재하는 거죠. 거짓된 기억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항적 기억들을 구축하는 과정들이 남게 됩니다. 근데 그 점은 인도네시아를 다룬 오펜하이머 감독 영화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봐요. <침묵의 시선>에서도 되게 충격적인 게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공산당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감옥으로 보내졌는지 설명하는데 (주인공 아디의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나면 아버지로부터 거짓말이다 얘기를 듣죠.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망각되고 은폐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거짓증언과 거짓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과 대항해서 새로운 방식의 기억을 구축해야 하는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가해자와 대면하게 되는,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재연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의 증거, 흔적을 가시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리티 판의 영화와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라는 작품 안에서 공통점 중 하나는 가해자와 희생자가 비대칭적인 관계라는 겁니다. 이 두 사람들이 상호적으로 탈 인간화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희생자에 대한 비인간화와 살육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비인간화. 탈 인간화 과정 안에서 오펜하이머 감독은 가해자에 훨씬 더 주목해 <액트 오브 킬링>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었는지, 그런 식의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또 그 시기가 지난 이후에 어떻게 체계적으로 그것을 망각하거나 자부심을 갖고 이야기 할 수 있는지를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굉장히 충격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의 시선>에서도 아디가 말하죠. 그들이 저런 식으로 자부심을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스스로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저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액트 오브 킬링> 안에서 ‘액트’라는 부분이 보여주는 거죠. 살인자의 증언과 재연,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살육의 몸짓은 한편으로 살인의 작동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보여주는 흔적인 동시에, 과거에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없었던 살육의 과정을 몸의 동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리티 판 감독과 오펜하이머 감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리티 판 감독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런 살육의 과정,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근본적인 목적이 무언가를 촬영하는 것은 무언가를 담아낸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되돌려 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죽은 자, 사라진 자들, 희생자들 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은 기억의 작업이고 기억의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 없이는 작동될 수 없죠. 그랬을 때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고요. 있지 않은 것을 구성해나가는 것은 있지 않은, 사라져 버린,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되돌려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작업을 하는 것은 살해당했던, 죽었던, 사라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었던 존엄성을 회복해주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리티 판 감독의 영화는 이런 잃어버린, 파괴된 것, 그들의 생명, 존엄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죠. 물론 고발도 있고 비판도 있지만, 가해자, 학살자의 증언, 그들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부분들이 아닌 거죠. 또한 학살자를 인간화하는 것, 범용함 이런 것들은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반대로 오펜하이머 감독은 그것을 되돌려 준다는 것 보다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강하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 감독도 얘기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상황이 다른 곳과 굉장히 다릅니다. 한 동네에서 학살을 한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들은 재판이나 후회와 반성도 없고,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에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조건들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때문에 거짓 증언과 기억으로 살아가야만 하고요.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를 드러내는 것을 오펜하이머 감독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살육 재연 자체가 과잉적인 자기 정당화로 보이죠. 이런 과잉적인 행동들을 <액트 오브 킬링>은 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자신들의 저질렀던 행동을 현재 안에서도 자기정당화하고 있는 거죠. 액트는 대단히 판타지적으로 구현되고 있고 이것은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액팅의 행위자로서 존재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역사적 거리와 반성적 거리를 갖지 않은 채,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액트라는 범주 안에 계속 있는 거죠. 사람이 행동을 할 때는 자신의 행동을 떨어져서 관찰할 기회를 갖지 못하거든요. 말하자면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반성적 거리를 두고 성찰할 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다는 거죠. 캄보니아는 그 부분이 존재한다고 보는 거고요. 행동을 하면서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동할 때는 행동에 적합한 어떤 과장적인 상상력을 갖는 거죠. 이점이 <액트 오브 킬링>에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들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서 행동을 멈추고 혹은 행동한 부분들을 자기자신이 되돌아보게 만들 필요성이 있죠. <액트 오브 킬링> 안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이 액팅했던, 그들이 찍힌 것을 자신이 다시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들입니다. 그게 정말 반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액팅과 그것을 다시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단히 위험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추구한 하나의 목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분열을 만들어가는 거죠. 액팅 후 보는 자의 위치로 전환시켜 그 분열 안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 예술가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것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데 어쨌든 본다는 행위를 통해 액팅과 떨어지게 하는 것이죠. 그것이 확장된 것이 <침묵의 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액팅을 보는 것으로 전환했다는 것.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아디가 영상을 계속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있는 영상은 과거에 찍은 것들이고 시간이 지난 뒤 현재 안에서 다시 그들을 찾아가 대면합니다. 대면을 어떻게 촬영해야 될까요? 제가 기억하기로 리티 판 감독의 작품은 샷바이샷으로 되어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오펜하이머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범용한 평범한 사람들이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이 비대칭 관계가 대면, 직면하는 순간을 어떻게 잡아내는가를 <침묵의 시선>을 볼 때 주목했습니다. 


<침묵의 시선>의 통상적 측면에서 안경과 점핑빈이 나옵니다. 왜 점핑빈이 나올까. 꼬마들이 점핑빈을 보는 장면이 서너 번 나오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디의 어머니가 (점핑빈을 보면서) ‘넌 언제 나올 수 있을까. 널 볼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건 이미지라기 보다는 형상이고 은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의 얘기가 나오지만 점핑빈은 후에 나비의 성충이 되어 날아가게 되죠. 내부에 있는 것은 계속 꿈틀거리고 있지만 아직 나오지 않은 거에요. 아마도 은유적으로, 딱딱한 껍질이 우리가 보고 있는 어떤 것이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것이 기억의 작동이라는 것, 진실의 꿈틀거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직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거죠. 근데 그것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나올 것이라는 미동의 관심이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안경이라는 것에 ‘보기’의 문제가 들어있죠. 특정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안경이라는 것이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대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노인이 대부분이고 시력이 저하되어있죠. 시력이 저하된 사람들에게 안경이 필요하고, 안경을 맞춰주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기 위해서는 교정이 필요하니까요. 안경이라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으면 흐릿하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 거죠. 렌즈로 교정해나간다는 것은 이 영화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카메라의 눈 덕분에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 거죠. 만약에 볼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는 방법을 바꾸거나 안경을 써야 하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렌즈, 안경, 혹은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새로 보게끔 만들어가야 하는 거죠. ‘본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재난 혹은 재앙을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들이에요.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에서 ‘보기’와 관련된 더 큰 부분은 자기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적 이미지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보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되돌아보는 과정인 거죠. 


오펜하이머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육을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와 다른 몬스터로 이해하면, 완전히 다른 타자로 이해해버리게 되면,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것이죠. 범용한 인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 점이 오펜하이머 감독의 두 편의 영화에서 핵심적이었던 것 같고 <침묵의 시선>에서는 훨씬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액트 오브 시잉’(Act Of Seeing)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기의 행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은 굉장히 논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에 대한 각각의 생각, 입장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지점이 중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범용한 사람이 그런 학살에 가담하게 되는 매커니즘과 재연의 행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살을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의 궁극적인 의미와 역할에 대해 되돌아 봤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 아디가 가해자들을 찾아가 안경을 맞춰주던 장면처럼 관객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흐릿한 것들 혹은 내재된 의미를 보이지 못했던 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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