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37> 한줄 관람평


이지윤 | 당신은 무엇을 믿고자 하는가

박범수 | 죄와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는 치열한 성찰의 과정

조휴연 | 어디에서든 벌어지는 대소문제

최대한 | 추악함을 들춰냈지만그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이가영 | 하나의 신앙심에서 분리된 선과 악

김신 | 보고 듣는다는 것은 결국 사실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

남선우 | 성경의 낱장처럼 연약한 인간성경의 문법처럼 번잡한 세상





 <로마서 8:37 리뷰: 죄와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는 치열한 성찰의 과정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종교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이 죄의식을 강요하거나 신실한 믿음을 찬양하는 길로 손쉽게 들어서는 것과 달리,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죄 자체를 직시한다. 정직한 신앙인으로 살던 전도사 기섭은 평소에 존경하던 형이자 부순 교회의 담임 목사 요섭이 이단 논란에 휩싸이자 그를 돕기로 결심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내 죄가 죽은 것이라는 설교로부터 촉발된 논란은 곧 교회의 이권을 둘러싼 네거티브 대결의 양상으로 번지고, 요섭이 여신도 지민을 성추행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교회와 요섭을 향한 기섭의 믿음은 시험에 든다. 요섭을 위해 의혹을 변호하는 것과 양심에 따라 의혹의 진실을 캐내는 것 사이에서 기섭은 고뇌에 빠진다.

 

요섭의 성추행 의혹은 지민의 용기 있는 증언과 요섭 본인의 빠른 시인으로 진위가 비교적 손쉽게 밝혀진다. 그러나 요섭이 사임을 거부하고 교회로 복귀하면서 이야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기섭이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하자, 인간은 유혹 앞에 나약하기에 누구나 죄인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죄인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을 곳이 있다면서, 부순 교회의 신도들을 이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요섭이 내세우는 사명이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데에 있다. 비 온 뒤 땅이 굳듯, 교회가 당면한 고난을 이겨내야만 믿음의 공동체가 더욱 단단하게 결속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를 이루는 신도들의 고통에 무관심하다면 그 교회는 결국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는 게 아닐까.

 






유사한 문제를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20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배교한 스승을 찾아 일본에 밀입국한 포르투갈 신부 로드리게스는 현지 기독교도들인 키리시탄이 탄압받는 현장을 목도한다. 로드리게스를 체포한 일본 막부는 키리시탄들을 그의 눈 앞에서 하나씩 처형하면서 더이상의 죽음을 보기 싫다면 성화를 발로 밟아 배교하라는 요구를 한다. 로드리게스는 치열하게 고민한다. 신앙을 버려 키리시탄을 살리는 길과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는 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로드리게스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키리시탄들을 전부 구해낼 능력은 없지만, 로드리게스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것이 교회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로드리게스가 알기 때문이다.

 

<로마서 8:37>이 까다롭게 읽히는 지점은 사명의 완수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를 한 요섭의 태도에 있다. 욕망 앞에 나약함을 고백한 요섭의 말을 악인의 단순한 자기변명으로 보기에는 지민에게 저지른 잘못만큼 그 스스로가 잃은 것 또한 적지 않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만큼 스스로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진 자가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그가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자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그의 죄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의 고통을 알지 못함으로써 스스로의 죄를 직시하고 돌아 볼 기회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를 등지기 어려운 신도의 입장인 지민은 더 이상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서 성추행을 둘러싼 진실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

 






진실을 밝히는 데 실패한 기섭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부순 교회를 떠나지만, 장인의 제안에 따라 처음으로 신도들 앞에서 직접 작은 예배를 올린다. 소수의 신도들 앞에서 진심을 담아 설교와 기도를 올리는 기섭의 모습이 거대한 관료 조직으로 변모한 교회가 인간을 외면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교회는 핍박과 고통에 신음하던 이들을 감싸 안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던 로마서 8 37절의 말씀은 다시금 이 땅 위에 퍼져나갈 수 있을까. 신도와 비신도를 떠나 죄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깊은 울림을 받게 될 것이다.

 

 




 

Posted by indiespace_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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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씨앗한줄 관람평


이지윤 | 자라나는 폭력의 씨앗,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음이 비극

조휴연 | 구조 안에서 씨앗은 어떻게 싹을 틔우는가

최대한 |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쳤지만, 그 역시 다를 건 없었다

이가영 | 폭력의 굴레에 갇혀버린 군상들

김신 | 오금이 쪼그라들어서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합니다(미필)

남선우 | 전지적 폭력 시점의 이중성





 <폭력의 씨앗> 리뷰: 폭력의 굴레에 갇혀버린 군상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가영 님의 글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에게도 불행한 날이 찾아 온다. 평소라면 겪지 않았을 이상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하며 어서 빨리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폭력의 씨앗>은 그런 악몽같은 ‘주용’의 하루를 그린 영화다.  


군대 선임들과 외박을 나가는 날, 무슨 일인지 주용은 눈치가 보인다. 술자리에서 자신을 편하게 대하라는 선임의 말도 장난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주용을 슬쩍 화장실로 불러낸 박 병장은 분대원 간 폭행사건을 누군가 고위급 간부에게 폭로하려 했다며 익명의 쪽지를 보여준다. 최고참인 박 병장은 위협적인 톤으로 주용을 몰아세우다 후임에게 잘해주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분대원들도 잠정적으로 주용 아니면 주용의 후임인 필립이 쪽지를 썼다고 생각한다. 혹 그 둘이 안썼다 하더라도 둘 중 하나의 만행이여야 한다. 선임은 술자리 후 주용과 필립을 방으로 불러내고 폭력을 행사하며 쪽지를 누가 썼는지는 관심 없으니 너희 둘 중 하나가 뒤집어 쓰라며 닦달한다. 그 과정에서 필립의 이가 부러지고, 주용은 선임을 설득해 매형이 하는 치과로 필립을 데려간다. 매형은 직접 찾아온 주용을 반기지 않고, 누나와 힘들게 통화를 하지만 면회 날짜를 까먹었다며 변명하는 누나가 의심쩍다. 결국 걱정되는 마음에 집으로 찾아간 주용은 또 다른 폭력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는 주용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때 시공간에 대한 단서는 오로지 카메라가 팔로우하는 인물과 대화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해 프레임은 계속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이처럼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오프닝 시퀀스의 분위기는 극의 지배적인 정서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경직된 표정의 인물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력성에도 긴장감을 느낀다. 감정을 억누르고 복종해야 하는 군대에서 인물들은 ‘말’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용과 필립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제 3자가 인물의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 클로즈업 샷은 드물고 인물을 뒤에서 따라가는 숏은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상황을 예측함에 있어 답답함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주용은 계속되는 필립의 실수와 눈치 없는 행동에 인내심을 잃어간다. 자신이 명령해도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필립을 보며 분노하고 도리어 자신을 의심하는 그와 바닥을 뒹굴며 싸운다. 매형의 폭력성을 목격했을 때는 누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폭력을 휘두르고 누나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 군대처럼 강압적인 환경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폭력은 사회 도처에 널린 수직적 관계,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의 형태로 확장된다. 결국 권력에 의해 막혀버렸던 주용의 입이 열리고 누나와 필립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순간, 그는 가해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폭력, 그 연쇄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마치 나비효과처럼 사소한 쪽지는 폭력을 불러들였고 부러진 치아는 일상에 파멸을 가져왔다.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졌다. 운명처럼 주용을 따라다니던 ‘폭력’은 다시 빠져버린 필립의 치아를 통해 극단적으로 시각화 된다. 그 구체적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주용은 폭력이 다시 발아했음을 인지하고 끊임없는 폭력의 굴레에 갇혀버린다. 짙은 허무감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끝으로 <폭력의 씨앗> 엔딩크레딧이 떠오른다.




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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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다한줄 관람평


이지윤 | 분단된 누군가의 낯선 일상, 그리고 그리움

박범수 | 결국은 보편의 그리움에 대한 다르지 않은 이야기

조휴연 |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다

이가영 | 희망으로 귀결되는 각자의 이야기

김신 |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들






 <그리다> 리뷰: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신 님의 글입니다.



통일부에서 제작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 <그리다>. 처음에는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공적인 목적을 선명하게 반영해야 하는 탓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화술과 방향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상할 수 있는 선에서의 묘사”라는 씨네21 이화정 기자의 단평도 그와 같은 판단아래 작성된 것일 테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쌀쌀하게 불기 시작한 바람이 나를 맞았다. 그 바람이 영화에서 되새겨볼 만한 지점을 거슬러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어느새 11월이다. 흐드러진 녹음 사이로 전해오던 햇살의 온기가 사계절의 규칙에 의해 징집당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쌀쌀한 잔 추위가 속살을 파고들며 신경질적으로 계절인사를 전해온다. 때마침 11월에 맞춰 관객을 찾아온 <그리다>를 이야기하며 가을이라는 계절의 징후를 말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고통을 다루는 세 편의 단편이 한 데 묶인 작품. 세 명의 다른 감독들로부터 제작되어 제각각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다>가 한 편의 장편 영화처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세 편의 단편이 유사한 주제아래 하나의 장편으로 재편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세 편의 영화를 강물처럼 관류하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모티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의 고통과 외로움을 담아낸 세 단편이 모두 같은 계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우연이라고만 일러야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을은 본디 고독이라는 정서와 근본적인 친연성을 공유하는 계절이다. 우리가 확인했던 <그리다> 속 인물들이 머무는 적적한 가을의 정조뿐 아니라, 구스 반 산트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인물들이 옷깃을 여미며 낙엽을 쓸었던 도회의 골목길 풍경처럼. 우리는 외로움을 다루는 수많은 영화 속 누군가의 표정에 가을이 빚어내는 애조의 기운이 스미는 풍경을 익숙하게 바라봐온 바 있다. 그런 영화들을 봐온 우리들 또한 객석에 앉아 인물들과 동석하며 그들의 정념을 공감하거나 안타까워해왔다.





물론 가을이라는 배경은 이야기 내부에서도 의미심장한 요소로 활동한다. 1부의 주인공인 ‘상범’은 월남한 이후에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잊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상범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어디인지 알 길이 없는 의문의 골목길을 달리고 있다. 그는 한밤중의 텅 빈 거리를 건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떠들썩한 시장의 공기와 궂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노점상도 검게 바랜 알루미늄 셔터의 뒤 켠으로 숨어버린 것만 같다. 쉴 새 없이 요동하며 다음 컷으로 도약하는 몽타주는 상범을 감싸고 도는 상실의 공기를 가감 없이 체화하기 위한 기획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이내 본편이 시작하고 상범은 곧 출산에 임박한 부인과 함께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제시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화를 거쳐 상범이 도달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도 새롭게 계절맞이를 준비하는 가정집이 아니라 아직까지 상범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골목길의 평양냉면집이다. 골목과 사건을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도착한 평양냉면집 바깥에서, 그는 유리창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아버지가 평양냉면을 먹는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 사이에 놓인 유리창이라는 요소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아버지와의 회복될 수 없는 거리에 부여된 형태라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뒤늦게 도착한 상범을 감싸도는 가을바람이 어딘가 아프다. 





유사한 설정을 2부와 3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부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속 주인공인 ‘상경’은 이산가족 찾기 프로젝트의 인터뷰 촬영을 돕는 사진가로 일하며 스스로도 결별했던 옛 애인과의 애틋한 추억을 그린다. 일러스트 회사에서 일하는 3부 <림동미>의 주인공 ‘림동미’ 또한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문득 월남한 아버지와 마주치며 추억을 떠올린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거나 스스로가 이산가족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자신에게도 남겨진 결별의 정서를 통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부재의 고통이 성공적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종료된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고 얼룩처럼 남아있다는 사실이 관객인 우리의 마음의 한 구석을 건드린다. (그런 의미에서 헛헛하게 느껴지는 부재자의 공백을 장르적 쾌미에 봉사하는 완충재로 손쉽게 대체해버린 3부의 이야기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마치 지나가버린 여름을 그리는 가을이라는 계절처럼 <그리다>는 많은 이들에게 이제는 먼 일로 느껴질 뿐인 이산가족의 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의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다소간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관 바깥에 불고 있는 가을바람의 추위가 누군가의 마음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을 떠올리며 <그리다>를 끌어안도록 만들었다. 11월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에 극장을 찾아온 영화이다. 



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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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정일우한줄 관람평


이지윤 | 정일우, 연대의 꽃을 피워내는

박범수 | 가장 낮은 곳에 임했던 빈자의 벗, 그를 기억하는 가장 정직한 기록

조휴연 | 사람이 되기 위해 이토록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이가영 | 위대한 잠언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남을

김신 | 민주주의의 화술로 쌓아낸 친밀의 형식

남선우 | 그 시절, 사람을 사랑했던 친구





 <내 친구 정일우> 리뷰: 정일우, 연대의 꽃을 피워내는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에 한국으로 건너온 사람.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즐겨 부르는 사람. 아무데서나 잘 자고 술을 잘 먹는 사람. ‘18’을 좋아하는 사람. 잘 웃는 사람. 풍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 청계천, 상계동, 괴산 등에 터전을 꾸렸던 사람.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산 사람. 경계 없는 공동체를 꿈꾼 사람.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내 친구 정일우>는 이런 故정일우 신부를 회상하며 그에 대한 기억을 스크린 위에 풀어놓는다.



정일우 신부에게 초점을 둔 작품 속에는 각기 다른 인물이 쓴 네 통의 편지가 등장한다. 편지를 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들은 과거 정일우 신부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의 기억을 더듬어간다.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에 있어 감독은 정일우라는 인물의 업적을 칭송하거나 미화하려들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었던 절친한 ‘친구’처럼 그를 묘사할 뿐이다. 정일우 신부가 철거민과 농민들 틈에 섞여 희로애락을 나누고 함께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과 담배를 하는 모습은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한다. 종교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런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정일우라는 인물이 지닌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런 온기를 통해 <내 친구 정일우>는 종교 영화가 빠지기 쉬운 우상화의 딜레마를 넘어서는 힘을 얻게 된다. 작품은 정일우 신부를 기억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정일우 신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의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정일우 신부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통해 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미 머물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하기도 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품 속 세 번째 편지의 화자는 <내 친구 정일우>를 연출한 김동원 감독이다. 그는 상계동 철거촌을 회상하며 그곳에서 자본과 권력이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착취했는지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기억은 낡은 푸티지로 재생된다. 그 속에는 가차 없이 집을 부수는 굴착기와 울부짖는 철거민들,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는 정일우 신부가 있다. 철거민들은 텐트까지 뺏기고 더욱 가난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행복을 안게 된다. 가난은 철거민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허물어진 경계 위에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서로를 도우며 ‘고추장 같이 진한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간다. 부천으로의 집단 이주가 실패로 끝나고 서로의 몫을 챙겨 뿔뿔이 흩어진 이후에도 그들은 종종 만남을 가졌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얼굴 위에는 편안한 미소가 감돈다.



그런 과거의 잔상을 안고 감독은 현재를 응시한다. 언제부턴가 상계동 주민들은 더 이상 서로를 만나지 않는다. 행복했다 정의 내렸던 그 시절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 자본과 권력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손을 뻗었고, 어느새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동네는 사라졌고, 가난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물끄러미 현실을 바라보던 감독의 시선은 이윽고 잔뜩 녹이 슨 채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위를 유영한다. 그는 공허한 목소리로 세상에 없는 정일우 신부에게 묻는다.


“신부님, 신부님은 여전히 가난뱅이들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고 계신가요? 상처받은 이들이 앞장서 싸워야만 하는 이 현실은 과연 끝날 수 있을까요?”


간절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내 친구 정일우>라는 영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정일우 신부에 대한 기억임과 동시에, 그와 함께 살았던 권력에 소외된 가난한 약자들의 기억이다. 그들이 지닌 과거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현재와 맞닿게 된다. 그 접점에서 관객들은 정일우 신부가 소망한 공동체 주의와 약자 간 연대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된다. 연대의 시작점에 대한 답은 정일우 신부가 쥐고 있다. 낮은 곳에서 함께하는 자유롭고 인간다운 태도와 마음가짐. 그것은 ‘친구’ 같은 따뜻한 관계와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을 꽃피워낼 것이다.



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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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 프레지던트한줄 관람평


이지윤 | Mis 혹은 Miss 프레지던트 박근혜

박범수 | 태극기 집회를 마주한 촌로의 벙찐 표정은 단연 올해의 얼굴!

조휴연 | 다가올 시대에 어떤 사람들의 자리는 없다

최대한 | 그들에게 박정희는 하나님이었고, 박근혜는 예수였다. 무엇이 그들을 종교로 만들었는가.

이가영 | 가난과 무지가 빚어낸 참상

김신 | 영화 속 ‘박사모’들의 전체주의적인 면모보다는(그 부분에 대해 이 영화가 새롭게 알려주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이 영화가 피사체를 대하는 조롱에 가까운 태도야말로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있는 이 나라의 과제다.

남선우 | 2016년 대한민국판 '우상의 황혼'




 <미스 프레지던트> 리뷰: 이해를 넘어선 분석의 시도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가영 님의 글입니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갈히 차려 입은 채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 앞에서 사배를 올린다. 바짝 엎드려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읊은 후에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집회 현장에 도착한 그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단상 위에서 격양된 목소리로 연설인지 험담인지 모를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사람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회 분위기에 적응하고 양손에 태극기를 든 채 열심히 구호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조육형 씨는 방송으로 보여지던 ‘박사모’의 모습과는 다르다. 시골에서 소를 타고 다니는 옛날 농부이며,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점잖은 노인이다. 그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혈한 박사모이며 박정희를 추앙하는 신도 중 하나다. 과거 새마을 운동 역군이었던 자신의 활약상을 얘기하며 몇 번이고 박정희 정권을 고맙고 좋았던 시절이라 칭한다. 


여기 또 다른 박사모 회원이 있다. 울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종효 씨 부부는 지갑에 박정희 부녀의 사진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가 하면, 식당 벽면은 물론 식탁까지 기사와 사진들로 도배했다. 종종 손님들에게 ‘독재자의 사진을 왜 붙여 놨냐’, ‘보기 거부감 든다’ 같은 소리를 들어도 ‘싫으면 오지 마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버틴다. 박정희, 육영수 생가를 방문해 여기저기 둘러보며 주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은 마치 소풍 나온 학생들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리자 부부의 일상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매일 밤 뉴스를 보고 눈물 흘리며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배고픔과 가난이라는 원초적 불안감을 해결해준 의인이며 항상 감사해야 할 전 대통령이다. 그런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관객들은 그간 미디어를 통해 전형화 된 이미지의 박사모와는 다른 모습의 등장인물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인지하고는 ‘이해의 범주’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박근혜를 옹호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동안 나는 얼마나 객관적이고 편견 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이 의문은 비단 등장 인물이 평범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논조 또한 중도적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더 혼란스럽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박정희 부녀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상과 사진, 짤막한 흑백 필름으로 비춰지는 박정희 가족의 모습이 전부이다. 다만, 탄핵심판 선고 방송 혹은 야밤에 청와대를 빠져나오는 장면처럼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 또한 보여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다시 한번 현실을 인지한다. 인터뷰 장면에서는 화자만이 존재하며 질문조차 배제된다. 카메라는 철저하게 관찰자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그 어떤 대상도 풍자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이로써 감독의 의도는 희미해지고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바라던 바일 수 있다. ‘촛불 세대는 박정희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가?’


바로 앞 문장에서 주체와 객체는 ‘세대’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너’와 ‘나’ 혹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는 변화무쌍한 개념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건의 단면과 시간들이 필요하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해를 넘어선 분석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성과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가난과 무지가 낳은 비극으로 치부하기엔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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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반도 최악의 수괴 다카키마사오 2017.11.19 17: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후손들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자. 곱게 늙어야지 추하게 늙을거면 빨리 뒈져야 하는게 인간의 도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한줄 관람평


이지윤 | 하얀 눈처럼 쌓이는 인연, 다시 태어나도 우리 그 위에서

박범수 | 인간이 숭고해지는 영화적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다

조휴연 | 태어날 곳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삶은 만들어갈 수 있다

최대한 | 아홉 살 린포체의 무게감과 참된 스승의 헌신이 애잔하다

김신 | 내 작은 나무는 바람을 사랑했네. 정처 없는 바람을. 바람의 집은 어디인가. 바람의 집은 - 포루그 파로흐자드

남선우 | 우리는 모두 정해진 삶과 정해야 하는 삶 사이를 헤맨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리뷰: 인간이 숭고해지는 영화적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환생한 티베트 수도승 ‘린포체’로 지명된 소년 ‘앙뚜’와 그의 늙은 스승 ‘우르갼’의 삶을 담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는 내내, 스치는 당혹감에 자리를 계속 고쳐 앉았다. 작가의 개입과 허구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이 피사체를 대하는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두 개의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원에 두 명의 린포체를 들일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앙뚜가 쫓겨나자 우르갼은 앙뚜가 전생을 살았던 티베트의 캄으로 그를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캄 인근의 국경 도시에서 둘은 매점을 운영하는 중년 여인을 만난다. 여인이 캄에 가려는 이유를 묻자 우르갼은 앙뚜의 정체를 알린다. 여인이 절을 하고 린포체는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한다. 의문점은 앙뚜가 린포체임을 알리는 우르갼과 앙뚜에게 절을 하는 여인이 하나의 연속된 쇼트가 아닌 쇼트-리버스 쇼트로 처리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편집이라는 허구적 조작을 실재의 기록에 개입시킨 하나의 결단이다. 그렇다면 그 결단은 무엇을 향하는가. 우르갼의 말과 여인의 절 사이에 존재했을 간극은 과연 무엇일까.


분절된 쇼트는 이후에도 등장한다. 앙뚜와 우르갼의 사정을 알게 된 어느 사원에서 앙뚜에게 린포체 교육을 제공하기로 하자, 우르갼은 자신의 소임이 다했음을 깨닫고 작별을 고한다. 우르갼이 눈물을 흘리지만 앙뚜는 당면한 상황을 애써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일 뿐이다. 앙뚜의 눈물이 등장하는 것은 그 다음 쇼트이다. 우르갼과 앙뚜의 눈물에는 분명한 시차가 있다. 그 시차를 생략해버린 결단은 매점에서의 쇼트-리버스 쇼트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다큐멘터리가 작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말은 형용모순을 안고 있다. 현실에 특정한 구도의 프레임(혹은 카메라)을 가져다 대는 순간, 현실은 그 프레임에 따라 해석되고 보여지기에 모든 관점에서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객관성은 결코 확보될 수 없다. 다큐멘터리 작업에 작가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것도 바로 프레임의 주체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란 결국 작가라는 주체의 인식을 기반으로 실재에 최대한 가깝게 재구성된 현실의 모사인 셈이다. 그러나 모사가 곧 진실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단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주체의 인식에 따라 현실이 재구성된다는 말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주체의 수만큼 서로 다른 진실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다큐멘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은 그 진실성을 획득하기 위해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 지를 정확히 아는 선구자들이었다.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알려진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의 <북극의 나누크>(1922)는 가장 유명한 예시일 것이다. 플래허티는 캐나다 북부에 거주하는 이누이트 족의 일상을 담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연기를 요구했다. 실제로는 바다코끼리 사냥에 총을 사용하던 이누이트들이 그의 뜻에 따라 작살을 꺼내든 것이다. 플래허티는 스스로와 관객 모두를 기만한 것일까? 그보다는 플래허티가 중요하게 여긴 진실이 기계적으로 기록된 이방인의 생활상 그 자체가 아닌, 유럽과는 상이한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비유럽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그리즐리 맨>(2005)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도 눈 여겨 볼 만 하다. 알래스카의 곰들과 어울려 살다가 결국 곰에게 잡아 먹힌 환경운동가 티모시 트래드웰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서 헤어조크는 나레이션과 인터뷰를 활용해 트래드웰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트래드웰의 행적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에 그쳤더라면 <그리즐리 맨>은 지구의 암적 존재인 인간의 횡포에 맞서 곰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어느 낭만주의자의 비극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어조크의 개입은 약육강식이라는 비정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망상가로서의 이면을 들추어낸다. 헤어조크가 밝혀내고자 했던 진실은 트래드웰이라는 인간과 그 사상의 본질이 아닌, 그의 삶이 내포한 인간 존재의 태생적 다층성과 다면성이었다.


다소 우회한 이야기를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두 수도승을 대하는 태도로 끌어 와 생각해 볼 차례다. 영화의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종교적 숙명은 앙뚜와 우르갼의 서사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영화가 그 숙명에 앞서 줄곧 주목하는 지점은 아이와 노인이 영위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나날들이다. 노인들의 머리를 매만지던 앙뚜는 린포체이기에 앞서 또래들과 뛰어 놀고 싶은 한 명의 어린이다. 앙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앙뚜의 불안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달래주는 존재는 바로 우르갼이다. 중생들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할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조언하기도 하지만, 앙뚜를 먹이고 재우면서 공부를 게을리할 때마다 꾸지람을 내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와 손주의 관계다.


일상의 먹고 사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할 때, 영화는 헤어조크의 인터뷰가 트래드웰의 삶에 개입한 것처럼 인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다. 상자에 지폐를 넣는 우르갼의 손과 난로에 기름을 붓다가 불을 낼 뻔한 앙뚜의 손을 포착하는 클로즈업은 영적 지도자들을 더없이 인간적으로 보이게 한다. 쇼트-리버스 쇼트의 결단도 어쩌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거리까지도 줄임으로써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한층 부각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인간적인 것들에 대비되는 초월적이고 지고한 것들은 더없이 먼 곳에서 인간을 굽어본다. 티베트인들의 성산(聖山)인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의 고봉들, 윤회를 끊기 위해 갠지스 강어귀를 밝게 물들이는 화장의 불길, 하늘의 별 대신 무수히 빛나는 도시의 조명들은 속세의 번뇌와는 한참 떨어진 별세계처럼 보인다. 그 별세계를 지나 온 앙뚜와 우르갼의 여정이 방점을 찍는 순간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헤치고 캄으로 향할 때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위를 걷던 앙뚜가 힘이 들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하자 우르갼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다독인다.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이동은 무리였기에 우르갼은 앙뚜에게 소라나팔을 불게 한다. 소리를 듣고 캄의 수도승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오지 않고 조우는 실패한다.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진실을 위한 조작’을 수행했던 플래허티의 카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초월적인 것들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카메라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심한 롱 쇼트로 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앙뚜와 우르갼을 포착한다. 종교적 숙명의 무게보다 당면한 인간적 고통이 부각되는 순간, 롱 쇼트는 오롯이 둘만을 포착함으로써 눈물의 쇼트-리버스 쇼트에 비할 수 있는 어떤 진실에 다가간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종교 없이 인간 그 자체를 숭고하게 다룰 수 있다고 믿는 휴머니즘이다. 영화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앙뚜와 우르갼에게서 운명의 굴레를 한 꺼풀 벗겨내 언 땅에 굳게 두 발을 딛고 선 인간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주제를 손쉽게 답습하는 대신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진실을 찾아내려는 태도는 형식에 대한 교조적 태도를 넘어 큰 울림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성이야 말로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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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장한줄 관람평


이지윤 | "보세요, 똑같은 인간입니다. 단지, 이 세상이 비극입니다."

박범수 | 타인에 대한 이해,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수사에 대하여

조휴연 | '이해한다'는 말의 무게

최대한 |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진정성에 대한 의문

이가영 | 자신의 정체성이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나

김신 |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어쩌면 배우의 운명론

남선우 | 스토리가 새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주인공과 관객을 함께 윤리적 심판대에 올려 놓는다





 <분장> 리뷰: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진정성에 대한 의문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대한 님의 글입니다.




남연우 감독이 연출한 <분장>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이후 많은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올 가을, 극장 정식 개봉을 통해 대중들에게 찾아왔다. <분장>은 이전까지 <가시꽃>(2012) 등의 작품에서 배우로 익숙했던 ‘남연우’라는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무명 연극배우 ‘송준'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송준의 일상은 쉽지가 않다. 매번 오디션에 떨어지고 우연히 치킨집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재능이 없으면 포기해야한다’는 말을 듣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굴욕을 버텨내고 ‘다크라이프’라는 성소수자를 다루는 연극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진정성 있는 연기를 위해 성소수자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보고 성소수자인 '이나'를 직접 만나 그녀의 삶에 대해 묻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덕분일까? 송준은 ‘다크라이프’의 주연을 얻게 된다. 성소수자를 이해하게 된 그는 진정성 있는 연기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스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동생 ‘송혁'과 절친한 친구 ‘우재’의 섹스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지고, 성소수자를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과 친동생에 대한 모멸감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그의 삶은 망가져간다.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남연우'


영화 <분장>의 관전 포인트 하나를 꼽자면 남연우 감독이 느낀 무명 배우로서의 삶이 디테일하게 송준에게 투영되어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부 송준의 모습에서 남연우 감독의 무명 시절이 얼마나 고됐을 지 추측된다. 송준이 겪는 이 일련의 시련들은 남연우 감독이 직접 겪은 시련일 것이다. 이 시련은 ‘다크라이프’의 ‘안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남연우’를 만들었다.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분장>은 이전까지의 퀴어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퀴어 영화는 성소수자를 담담하게 보여주거나 옹호, 지지하는 방향성을 가지곤 했다. 또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분장>의 주인공인 송준은 중반까지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섹스를 목격한 이후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분장>은 ‘이해’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잔잔한 파장을 만들었다. 관객들 앞에 보여지는 송준은 성소수자인 ‘안나’를 연기해야한다. 그는 연기를 위해서 진심으로 성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관객들 역시 송준이 성소수자를 진심으로 연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인 것이다. 자신의 친동생이 성소수자인 것을 알게 되자 ‘이해’는 ‘위선’이라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분장>은 관객들에게 ‘이해’라는 의미에 대해 날카롭게 의문점을 제기한다.





진정성에 대한 의문


최근 한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작가’와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영화’와 ‘작가의 삶’이 일치했을 때 영화에 ‘진정성’이 생기고, 그것이 진짜 ‘영화’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화를 나눈 후에 영화를 보는 시각이 조금은 변화했음을 느꼈는데 <분장>을 보면서 가끔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동생 송혁과 친구 우재의 동성애는 섹스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영화에서 관계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섹스만으로 둘의 관계가 구축되어있다. 또한 둘의 섹스는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고 파격적이다. 둘의 섹스를 목격한 송준은 마치 심판자인 것처럼 둘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벌을 주고 둘을 죄인으로 만든다. <분장>은 어떤 측면에서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기도 하다. 남연우 감독이 그들의 입장을 생각했다면 과정 없는 섹스로 그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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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집착, 갈등과 배신 등 인간의 잔인할 만큼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연극 '클로저'에 인디스페이스 관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현재 인디스페이스 상영작 관람을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클로저' 관람의 기회를 드립니다:-)



트위터에서 참여하기 >> http://bit.ly/2cvzmuX

페이스북에서 참여하기 >> http://bit.ly/2c8rRM7



초대일시: 2016년 9월 18일(일) 오후 2시 / 6시 (원하는 시간을 지정해주세요)

초대장소: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초대인원: 총 10명 (1인 2매)


이벤트 기간: ~9월 11일(일)

당첨자 발표: 9월 12일(월) 개별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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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들의 섬줄 관람평

이다영 |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것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 싸우는 이들

상효정 | 우리 모두의 ‘그림자’

이형주 | 노동과 투쟁의 진득한 기록과 희망

최미선 | 처절하도록 퍼런 작업복, 붉은 머리띠

홍수지 |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늘 존재하는 그림자들의 이야기

전세리 | 주체와 존엄을 향한 조선(朝鮮/造船)인들의 항쟁




 <그림자들의 섬리뷰: 처절하도록 퍼런 작업복, 붉은 머리띠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미선 님의 글입니다.


꿈에 부풀어 입사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그들의 꿈은 대학, 결혼, 집과 같이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꿈의 달콤함은 한달도 채 가지 못했다.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끊임 없는 인명사고. 그 속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배를 만들어내야 했다. 말도 안되는 근무 환경 속에서도 그 일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만 하면, 5년만 하면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내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희망이 그들에겐 있었다. 김정근 감독의 신작 <그림자들의 섬>은 그의 전작 <버스를 타라>(2012)에 이어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담아내었다.  


    

동료의 죽음을 담배 한 개피로 추모해야 했던, 나의 죽음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반성하고 연대한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해 도시락을 내던지고 회사의 흑자 속에서도 실시된 사측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투쟁으로 이뤄낸 민주노조는 그들에게 희망이자 곧 삶 그 자체이고, 십 수년 혹은 수십년의 세월을 지켜낸 원동력이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지금의 우리는 그 말의 절박함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들 뒤에는 처절하도록 파란 작업복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이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있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그 참혹했던 투쟁의 현장을 노동자들의 조금은 차분하고도 담담한 목소리로 생생하게 증언해낸다. 이러한 형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리 내질러도 닿지 않았던, 오히려 외면당했던 그들의 울분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도록 만든다. 인터뷰 도중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침묵을 채웠던 영화관 속 많은 이들의 한숨을 우리는 기억한다. 



김정근 감독은 <버스를 타라>와 <그림자들의 섬>까지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이시대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진행 중인 그의 후속작 <언더그라운드> 역시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노동운동’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거부감과 거리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할 것이다. 그것은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한 지난 30년의, 아니 여전히 진행중인 처절한 투쟁의 역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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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기행줄 관람평

김은혜 | 쌓인 눈 속에 비친 가족이라는 잔상

박정하 | 눈 때문에, 혹은 눈 덕분에

김민형 | 위기는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

위정연 |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

김수영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가족 사람 속은 모른다




 <철원기행> 리뷰: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


*관객기자단 [인디즈] 위정연 님의 글입니다.


철원 공업고등학교에서 아버지의 퇴임식이 있는 날, 가족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가족사진을 찍는데 며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표정이 썩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불행의 전조였을까, 어색과 침묵의 분위기가 감도는 저녁식사 도중 아버지는 돌연 폭탄선언을 한다. “이혼하기로 했다.” 영화는 결국 그 한 마디의 대사가 만들어낸 파장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합의를 거친 뒤 말한 듯한 뉘앙스의 ‘이혼하기로 했다’는 아버지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방적인 이혼 선언.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퍼붓는 폭설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집에 꼼짝없이 묶이게 된다. 그렇게 2박 3일간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는 한 명의 시점을 따라간다기보다 5명 모두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어머니와 애처롭게 말리다 지쳐가는 며느리.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버지와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큰아들, 그리고 철딱서니 없는 둘째아들. 이들은 사사건건 본인의 입장만 내세우며 상대방과 갈등을 빚어낸다. 영화의 종지부까지도 아버지의 이혼 이유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이유를 알아내려는 움직임보다 사라져가는 가족 간 소통의 문제를 담아낸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진다.



타인과 관계를 쌓는 일은 쉽다. 몇 번의 노력과 시간이 있으면 누구든 친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중요한건 그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어느 정도 친한 사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부터 타인의 친절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에게 본인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 관계가 매일 마주치는 가족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행동 하나하나에 ‘당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관계는 금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애초에 모든 관계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본인의 나태함을 가리기 위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가족도 타인의 위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되고 며느리니까 당연히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대방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소통을 나눈 적은 없다. 그러다보니 정작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자신의 아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어머니가 되어버렸고, 아버지가 왜 그토록 이혼을 하려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러 번 등장하는 식사 장면에서는 의미 없는 얄팍한 대화들만 오고간다. 아무리 치우고 치워도 결국 또 쌓이고 마는 눈처럼, 가족 관계도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버린 가족은 괜히 애꿎은 눈만 서로에게 던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다. 기나긴 2박 3일 동안 가족은 서로 질리도록 엉겨 붙지만 결국엔 조금씩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마치 한바탕의 싸움이 끝난 뒤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이처럼. 단지 그런 이해가 조금이라도 일찍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애초에 아버지의 파격적인 이혼 선언을 최소한 막을 수는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동안 사건이 터질 때까지 방관하고 있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지 않았나. 제때 준비하지 않으면, 눈은 금세 꽝꽝 얼어붙고 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곁에 있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자. 별거 아닐지라도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결국 많은 것을 바꿀지도 모른다. 

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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