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 한줄 관람평
이지윤 | 분단된 누군가의 낯선 일상, 그리고 그리움
박범수 | 결국은 보편의 그리움에 대한 다르지 않은 이야기
조휴연 |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다
이가영 | 희망으로 귀결되는 각자의 이야기
김신 |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들
<그리다> 리뷰: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신 님의 글입니다.
통일부에서 제작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 <그리다>. 처음에는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공적인 목적을 선명하게 반영해야 하는 탓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화술과 방향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상할 수 있는 선에서의 묘사”라는 씨네21 이화정 기자의 단평도 그와 같은 판단아래 작성된 것일 테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쌀쌀하게 불기 시작한 바람이 나를 맞았다. 그 바람이 영화에서 되새겨볼 만한 지점을 거슬러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어느새 11월이다. 흐드러진 녹음 사이로 전해오던 햇살의 온기가 사계절의 규칙에 의해 징집당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쌀쌀한 잔 추위가 속살을 파고들며 신경질적으로 계절인사를 전해온다. 때마침 11월에 맞춰 관객을 찾아온 <그리다>를 이야기하며 가을이라는 계절의 징후를 말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고통을 다루는 세 편의 단편이 한 데 묶인 작품. 세 명의 다른 감독들로부터 제작되어 제각각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다>가 한 편의 장편 영화처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세 편의 단편이 유사한 주제아래 하나의 장편으로 재편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세 편의 영화를 강물처럼 관류하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모티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의 고통과 외로움을 담아낸 세 단편이 모두 같은 계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우연이라고만 일러야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을은 본디 고독이라는 정서와 근본적인 친연성을 공유하는 계절이다. 우리가 확인했던 <그리다> 속 인물들이 머무는 적적한 가을의 정조뿐 아니라, 구스 반 산트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인물들이 옷깃을 여미며 낙엽을 쓸었던 도회의 골목길 풍경처럼. 우리는 외로움을 다루는 수많은 영화 속 누군가의 표정에 가을이 빚어내는 애조의 기운이 스미는 풍경을 익숙하게 바라봐온 바 있다. 그런 영화들을 봐온 우리들 또한 객석에 앉아 인물들과 동석하며 그들의 정념을 공감하거나 안타까워해왔다.
물론 가을이라는 배경은 이야기 내부에서도 의미심장한 요소로 활동한다. 1부의 주인공인 ‘상범’은 월남한 이후에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잊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상범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어디인지 알 길이 없는 의문의 골목길을 달리고 있다. 그는 한밤중의 텅 빈 거리를 건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떠들썩한 시장의 공기와 궂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노점상도 검게 바랜 알루미늄 셔터의 뒤 켠으로 숨어버린 것만 같다. 쉴 새 없이 요동하며 다음 컷으로 도약하는 몽타주는 상범을 감싸고 도는 상실의 공기를 가감 없이 체화하기 위한 기획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이내 본편이 시작하고 상범은 곧 출산에 임박한 부인과 함께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제시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화를 거쳐 상범이 도달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도 새롭게 계절맞이를 준비하는 가정집이 아니라 아직까지 상범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골목길의 평양냉면집이다. 골목과 사건을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도착한 평양냉면집 바깥에서, 그는 유리창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아버지가 평양냉면을 먹는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 사이에 놓인 유리창이라는 요소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아버지와의 회복될 수 없는 거리에 부여된 형태라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철 지난 계절음식처럼 뒤늦게 도착한 상범을 감싸도는 가을바람이 어딘가 아프다.
유사한 설정을 2부와 3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부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속 주인공인 ‘상경’은 이산가족 찾기 프로젝트의 인터뷰 촬영을 돕는 사진가로 일하며 스스로도 결별했던 옛 애인과의 애틋한 추억을 그린다. 일러스트 회사에서 일하는 3부 <림동미>의 주인공 ‘림동미’ 또한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문득 월남한 아버지와 마주치며 추억을 떠올린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거나 스스로가 이산가족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자신에게도 남겨진 결별의 정서를 통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부재의 고통이 성공적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종료된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고 얼룩처럼 남아있다는 사실이 관객인 우리의 마음의 한 구석을 건드린다. (그런 의미에서 헛헛하게 느껴지는 부재자의 공백을 장르적 쾌미에 봉사하는 완충재로 손쉽게 대체해버린 3부의 이야기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마치 지나가버린 여름을 그리는 가을이라는 계절처럼 <그리다>는 많은 이들에게 이제는 먼 일로 느껴질 뿐인 이산가족의 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의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다소간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관 바깥에 불고 있는 가을바람의 추위가 누군가의 마음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그리움의 흔적을 떠올리며 <그리다>를 끌어안도록 만들었다. 11월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에 극장을 찾아온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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