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질문들을 한데 모아
무명의 비평가들: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섹션 4. 한국여성영화감독의 계보학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2월 24일(토) 오후 3시 30분 상영 후
상영 〈여고생이다〉(박지완 감독), 〈거짓말〉(임오정 감독), 〈봄에 피어나다〉(정지연 감독),〈고백〉(유지영 감독), 〈세상의 끝〉(남궁선 감독)
참석 임유빈, 김명우 비평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기록입니다.
여성영화란 무엇일까. 2010년 전후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던 수많은 단편영화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 제도권 영화교육은 어떤 길에 놓여있을까. 한국의 영화 제작 현장은 여성에게 열린 공간이었을까. 언제나 존재해 온 영화 만드는 여성들은 어떻게 서로를 확인해 왔나. 다양한 질문과 화두가 극장 안을 채웠던 시간. [무명의 비평가들: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섹션4 ‘한국여성영화감독의 계보학’의 인디토크를 전한다.
임유빈: 안녕하세요. 저는 영상 이론을 공부했고, 간헐적으로 영화제나 미술관에서 영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임유빈입니다. 졸업 이후 영화와 은연중에 멀어진 느낌을 받았는데, 이렇게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서 기쁩니다.
김명우: 이번 섹션의 다섯 영화는 활발하게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한국의 여성감독들의 초기작들이었습니다. 〈지옥만세〉(2022) 임오정 감독, 〈나의 피투성이 연인〉(2022) 유지영 감독, 〈십개월의 미래〉(2020) 남궁선 감독, 〈앵커〉(2022) 정지연 감독, 〈내가 죽던 날〉(2019) 박지완 감독의 단편 영화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또 지금은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배우들, 이를테면 한예리 배우, 류혜영 배우, 박정민 배우의 초기 연기를 볼 수 있기도 했고요. 2010년도를 전후로 제작된 다섯 편의 영화를 살펴본 건데요. 기획전을 준비하시면서 이 다섯 편의 영화를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임유빈: 상영 기획 단계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한국의 독립영화를 상영해 보자고 했을 때, 저에게 직관적으로 떠오른 영화들은 이 다섯 편을 포함한 2010년대 전후의 다양한 단편영화들이었습니다. 왜 이 영화들이 나에게 독립영화의 대표작들처럼 자리 잡아 있는가 질문해 보며, 내러티브를 가진 단편 극영화들을 함께 보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각 감독님들이 2019년부터 코로나 기간을 전후로 신작을 개봉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분들의 영화 개봉을 기다리면서 ‘이제서야’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남궁선 감독을 무척 좋아하는데, 단편 작업 이후로 〈십개월의 미래〉를 제작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죠. 또 다른 여성감독이신 신재인 감독을 좋아하는데, 2006년까지 몇 편의 단편을 만들고 장편 영화를 만들려 했지만 어려움을 겪은 뒤 지금까지 작업을 하지 않고 계시거든요. 이번 상영의 감독들은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고, 영화학교의 졸업영화제 혹은 여타 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각인된 작품을 만들었지만, 장편 영화를 만드는 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린 감독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장편 영화를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죠. 명확하게 성별로만 구별할 수는 없겠지만 남성감독들이, 이를테면 청소년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어오긴 하셨지만 이충현 감독이 〈몸값〉(2015) 이후에 〈콜〉(2020)을 만들기까지, 혹은 조성희 감독이 〈남매의 집〉(2009) 이후로 〈짐승의 끝〉(2010)을 지나 〈승리호〉(2019)로, 나홍진 감독이 〈완벽한 도미요리〉(2006)로 시작해 〈곡성〉(2015)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업영화 씬 안으로 완전히 편입된 반면, 관객 입장에서 이번 섹션의 다섯 감독의 장편 영화를 만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 같거든요. 이런 생각들 사이에서 다섯 편의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김명우: 기획 글에 이렇게 써주셨어요. “한국의 독립영화는 소실되고, 발굴되며, 신성화되고, 그럼으로써 주변화된다. 여성의 계보는 언제나 흩어지는 한국의 독립영화사와 닮아있는 듯 보인다.”라고 써주셨는데, 지금껏 우리가 말하지 않아 왔던 혹은 발견되지 못한 한국 독립영화의 어떤 지점들을 말하고자 하는 이번 기획전 안에서 무척 의미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섹션의 감독들의 최근작이 아닌 초기작들을 모아보신 이유를 조금 더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의 영화와 지금의 영화들 사이에는 형식적 혹은 내용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지금 과거의 영화를 본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임유빈: 기획전의 사전 대담에서 박동수 평론가께서 “독특하고 실험적이고 충분히 재미있는 독립영화들이 90년대와 2000년대에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볼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게 항상 아쉽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이번 섹션의 단편영화들이 제작되었던 2000년대 당시의 접근성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미쟝센단편영화제, 혹은 온라인으로는 그 당시에 단편영화 무료 상영 사이트였던 유에프오, 혹은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했던 네이버 인디극장, 혹은 네이버 TV캐스트에 있었던 졸업 작품 카테고리에서 단편영화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유에프오에 관련해서는 박병운 운영자께서 KMDB에 작성해주신 칼럼을 통해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 서비스들은 전부 사라졌고, 넷플릭스, 왓챠, 혹은 퍼플레이, 인디그라운드 온라인 상영관에 단편영화들이 많이 올라와 있지만, 과거에 흩어져 있었던 영화들을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떠올리며 지금의 플랫폼 속 단편영화 제작, 배급, 유통이 어떤 선순환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미쟝센단편영화제가 2022년에 문을 닫았고, 그 과정 전체를 알 순 없지만 온라인 무료 상영에 대해 집행위원회와 단편영화 배급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 대한 저작권, 판권에 대한 논의도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고요. 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섹션의 영화들이 전부 한국영화아카데미나 한예종 영상원 출신 감독들의 영화였어요. 하지만 요즘 두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영화 중에서 제가 재밌게 본 영화를 떠올려보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제도적인 영화 교육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물음이 생겼습니다. 제도적인 영화 교육이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잘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을 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영화 교육이 상업적인 측면의 영화 교육만은 아닌지, 혹은 직업학교와 같은 역할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번 주 씨네21에서 이우빈 평론가가 ‘KAFA 영화스러움’에 대한 글을 쓰셨더라고요. “답답한 현실, 더 답답http://cine21.com/news/view/?mag_id=104519한 영화, 최근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영화의 주제적 공통점과 한계”라는 제목으로 기획 기사를 쓰셨는데, 어떤 ‘KAFA 영화스러움’, 혹은 ‘영화과스러움’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주제적이고 형식적인 클리셰가 생겨난 원인이나 효과 또는 한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오늘 상영한 다섯 편의 영화를 통해 지금 사라진 영세했던 플랫폼 그리고 넷플릭스 같은 다국적 대자본 플랫폼 사이, 또는 사라진 영화제나 제도 내의 영화 교육과 같은 다양한 논점을 꺼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김명우: 다양한 화두를 던져주셨는데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2000년대 영화들에 오히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지금은 OTT와 같이 다양화된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그걸 정말 다양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담에서 이야기를 나눠봤던 것 같습니다. 이번 섹션의 제목이 한국 여성영화 감독의 계보학이잖아요. 여성영화, 여성감독, 혹은 여성서사라는 표현을 쓰곤 하죠. 이런 식으로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일이 이젠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또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여성이라는 단어가 붙음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예외적이고 타자인 것임을 부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어쩌면 언어의 부족 혹은 한계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빈 님께서는 여성영화라는 용어, 그리고 그렇게 영화를 그렇게 부르는 경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임유빈: 이 섹션에 이름을 붙이며 많은 부분 망설이기도 했어요.‘여성영화’, ‘여성감독’, ‘계보’ 이런 명칭에는 제가 저항하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계보학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 데에는 제가 좋아하는 미셸 푸코나 뤼스 이리가레와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의 족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영화 이야기로 이어보자면, 한국의 상업 영화는 도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고, 어떻게 보면 단편 영화는 도제 시스템의 반대급부로 기능했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기성 도제 시스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여성에게 특히나 어려운 것 같아요. 여성 스텝은 대부분 연출부보다는 스크립터나 제작부 막내로 일을 시작하고, 남성중심적인 영화 현장 시스템이 남성감독의 사단 혹은 계보를 형성하는 것에 반해 여성의 계보는 미약하고 흩어져있다는 제 감상이 있었습니다. 제도권의 영화 교육을 이야기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교육이 여성감독이나 인력의 진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영화라는 용어는 처음에 여성 관객용 영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됐던 용어예요. 멜로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 한국의 경우에는 최루성 멜로 영화를 지칭할 때 사용된 용어였고, 혹은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일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성영화’라는 앨리슨 버틀러의 책에서, 이때 여성영화에서의 영화는 picture이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여성영화에서의 영화는 cinema거든요.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여성영화(cinema)가 작품이나 제도, 비평, 수용, 그리고 모든 여성영화 개념을 포함한 여성영화 네트워크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했을 때, 이제 우리는 여성영화라는 용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백델 테스트가 있잖아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가, 아니면 여성이 등장하는가, 감독이 여성인가, 이름이 가진 여성이 나오는가,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가, 남자를 주제로 삼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가. 이런 기준이 정말 여성영화를 가르는 기준인가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다섯 편의 영화에는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영화들도 있거든요. ‘여성영화적이다’라는 말은 없다는 것도 재밌습니다. ‘KAFA영화스러움’, ‘영화과스러움’ 이런 표현은 있는 것 같지만, ‘여성영화스러움’이란 표현은 없는 것 같다는 점에서 ‘독립영화적이다’라는 말과도 상응하는 것 같아요. ‘방구석 1열’에서 이경미 감독이 자신은 스스로 여성영화인이라 불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셨고, 샹탈 아커만이 자신에게 붙여진 범주화를 거부하는 것을 보며, 여성이라는 호칭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 붙이는 식으로 지점을 구별하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여자 감독들을 나름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여 보고 싶었습니다.
김명우: “함께 영화를 만들던 여성들(…) 그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저는 기획 글에서 이 문장이 인상깊었습니다. 오늘 작품의 감독들이 그간 독립영화 연출이나 제작 과정에 참여한 이력뿐만 아니라 장편 상업영화 소위 충무로 영화에도 많이 참여하시곤 했어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여성들이 많이 맡게 된다는 스크립터 역할이나 다른 식으로 참여하셨는데, 최근 정지연 감독이나 박지완 감독은 장편 상업영화를 연출하기도 하셨죠. 그래서 오늘 상영된 영화의 감독들을 여성 독립영화의 범주에만 국한해 말하기에는, 그들의 활동은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이야기 혹은 여성감독의 이야기는 여전히 주변화되거나, 여성감독, 여성의 이야기, 여성영화로 소환되거나 규정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임유빈: 흥미로운 건 장르영화 작법이나 정해진 규범, 이를테면 스펙터클이나 몰입을 위해 고안된 시도들에서, 사실 여성 인물의 내러티브가 주가 된다는 점 말고는 관객은 감독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영화를 보다 뒤늦게서야 '이게 그분 영화였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여성영화라고 해서 "여성의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 혹은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잘 만든 영화라고 한다면 언제나 인물의 심리는 잘 묘사하기 마련이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마케팅 과정에서 여성영화라는 이름이 붙을 때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지점을 생각해 보고 있자면 여성감독들의 대부분은 신임 감독의 위치로 호명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계의 인정도 무척 드물어 왔던 것 같고요. 칸영화제 같은 경우에도 1993년에 제인 캠피온(〈피아노〉), 2021년에 쥘리아 뒤쿠르노(〈티탄〉), 이번에 2023년 쥐스틴 트리에(〈추락의 해부〉)가 전부이고, 사이트 앤 사운드 잡지가 선정하는 역대 최고 영화 순위에서도 〈잔느 딜망〉(샹탈 아커만, 1975)이 2012년 새로이 순위 안으로 들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2022년에 1위로 선정되었지요. 여성감독들은 주변화되고 격하되는 경향도 있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명우: 본격적으로 개별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로부터 인물들이 조금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친화적이지 않아 보이고,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남들에 비해 사회성이 결여되어 보였어요. 쉽게 보편적이다고 이야기하는 프레임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학생, 청년의 모습이 아니라 예외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로 등장하는데요. 예를 들어 첫 번째로 상영된 〈여고생이다〉에서 여고생들은 분식집에 들어가 포커를 능수능란하게 치죠.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아요. 〈봄에 피어나다〉에서 연아는 자기 몸에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고, 전라의 상태로 비를 맞기도 해요. 이런 부분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있다는 인상을 주고, 이를 넘어서려고 하는 인물들의 시도가 보였습니다. 유빈 님께서는 영화 속 인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임유빈: 명우 님이 말씀해 주신 것에 공감하고, 관객의 입장에서 인물들에게 호감을 갖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중영화에서 주인공은 미운 성격을 갖고 있더라도 대중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각 감독님들의 최근작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주인공 작가 재이는 그의 소설 속 인물이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죠. 정지연 감독의 〈봄에 피어나다〉의 주인공도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요. 여성들이 돌발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런 평가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저에게도 이런 영화들이 사실 너무 내밀하기 때문에 공감을 하기 보다는 저항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내밀하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의 신경증, 히스테리 이런 것이 아니라, 이 영화들이 끊임없이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시험하기 위해서 관객에게 내밀한 자리로 들어오기를 요청하는 순간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끊임없이 인물을 이해해야 하니까 영화를 보는 데 힘이 들기도 하죠. 〈봄에 피어나다〉 내내 심어져있는 불쾌한 쇠를 긁는 소리라던가 더럽다고 여겨지는 피, 구토가 등장하는 맥락이 어쩌면 영화 형식적으로도 인물의 재현 방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김명우: 영화 속의 사운드, 혹은 사물 간의 관계도 흥미로웠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임오정 감독의 〈거짓말〉을 떠올리면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오랜 친구인 영희와 연희의 행동이나 겉모습을 보고 있자면 두 사람의 이미지가 상반되어 보여요. ‘어떻게 친구가 됐지’ 생각하게 되는 모습들이 많았는데요. 우연적인 상황들의 연속 속에서 진심과 거짓말을 오가며 위로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물들의 관계가 특이했어요. 유지영 감독의 〈고백〉에서도 인물들의 관계가 특이하죠. 중년 여성과 아들 친구라고 하는 관계성도 특이하고, 남궁선 감독의 〈세상의 끝〉에서도 인물들 사이 관계 맺는 방식이 특이했습니다.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신 바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임유빈: 저도 이 영화들에서 명우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인물들 간의 관계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여성들이 관계 중심적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이 영화들을 보며 그 반례를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오히려 남성만이 등장하는 〈파수꾼〉(윤성현, 2010)이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관계 중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 상영된 영화의 인물들은 우연적 상황에 조우하며 함께 있지만, 또 각자 집으로 잘 가잖아요. 다들 삶에 있어 인간관계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고생이다〉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관계로부터 잊힘, 지금의 나에 대한 망각을 두려워하며 사진으로 확인하려 한다거나 서운해하는 인물들이 재미있었고, 〈거짓말〉에서도 두 인물이 카메라를 통해 발견하는 것을 보여주기보단, 그걸 이야기하는 두 인물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재밌었습니다. 이리가레가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언어 실험을 하는데요. 남성 아이들은 주체와 객체 관계, 유사한 것들과의 관계, 일자와 다자 배열 아니면 위계질서 친족관계를 선호한다면, 여자 아이들은 주체들 사이의 관계, 창의의 관계, 둘 사이의 수평 관계를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해요. 자기에게 집중하는 여성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차이를 가지며 보여진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명우: 저도 〈파수꾼〉과 그 당시의 남성 중심 청년영화들을 떠올려보면, 주체와 객체가 굉장히 명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서사 속에서 세계가 봉합된다고 할까요. 오늘 본 영화들은 인물들의 차이가 보이는 그런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관객: 오늘 상영한 영화들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인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영화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임유빈: 고등학생 때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독립 영화에 대해 잘 모르니, 선택에서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들어볼 법한 학교에서 영화를 만드는 학생들의 영화를 선택했었어요. 어떤 맥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섹션을 만들며 그때와 달리 왜 이런 영화들을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김명우: 저는 한국 영화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 운동사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70년대 영화 소모임이 있었고, 80년대 대학의 영화 동아리 등을 통해 예비 영화인들이 모이게 되는 일들이 있었죠. 그중에서도 여성영화인들이 모였던 순간들이 있는데요. 70년대 실험영화 단체였던 카이두 클럽을 시작으로 14년 후 여성영화 운동 단체 바리터, 그리고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제작했던 기록영화제작소 보임과 같은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흐름이 이어져 2000년에 만들어진 여성영화인 협의체 여성영화인모임을 통해 여성영화인 혹은 여성영화에 대한 운동성을 구현하기도 했고요. 여성영화가 상영되고 제작되는 것에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성영화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오늘의 화두들과 연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임유빈: 이번에 함께 기획전을 꾸리며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부분입니다. 72년부터 대략 75년까지 이화여대 출신의 한옥희 감독을 주축으로 카이두 클럽이 만들어졌어요. 남성중심주의적인 상업영화계에 반해서 순수 영화 그리고 실험 영화를 지향했고, 촬영 방식도 글로벌한 영화운동과 맞닿아 있게끔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알라셩과 같은 대학 내 영화 운동 동아리들이 생겼을 때 89년 신촌을 중심으로 바리터가 결성됐고, 변영주 감독, 김소영 감독, 서선영 작가와 같은 분들이 모여 여성민우회의 의뢰를 받아 사무직 여성에 대한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김소영, 1990)를 만들고 지방으로 상영 운동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활동이 중단되며 변영주 감독은 푸른 영상으로 가시기도 하고, 이때 활동하셨던 분들이 1997년에 서울여성영화제를 만드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2005년 기지촌 여성을 다룬 〈마마상〉(김일란, 조혜영, 2005), 그리고 커밍아웃 3부작(〈3XFTM〉(2008),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2010))을 만든 연분홍치마도 있습니다. 그들은 퀴어와 용산 참사,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박근혜 퇴진 시위, 통신설비 하청 노동자, 세월호와 같이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은 사회적 변화를 촉구하는 현장의 영화를 만들고 있고, 영희야 놀자와 같은 영화단체들, 2016년 미투 운동 당시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영화계 성폭력, 성차별 문제와 싸운 찍는페미, 그리고 여성영화인모임의 주력 사업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또한 2017년 공식화되어 2018년 개소했습니다. 2017년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의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포럼을 통해 마민지, 명소희, 남순아 등의 감독이 여성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노출되어 있는 성차별적 영화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고요. 이런 흐름이 다큐멘터리/실험영화나 영화 운동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극영화에서는 마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다룬 부지영 감독의 〈카트〉(2014), 〈다음 소희〉(정주리, 2022)와 같은 사회파 영화들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밖에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2021)나 〈미싱타는 여자들〉(이혁래, 김정영, 2020)과 같은 영화들도 만들어지고 있고, 그리고 장윤미 감독, 혹은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작업도 있을 것이고요. 민주주의적인 측면에서 후퇴하고 있는 요즘, 다양한 곳에서 젠더에만 국한되지 않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여성영화 운동의 흐름은 계속되고 있고, 또 계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명우: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여성영화 운동의 흐름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한국여성영화감독의 계보학’ 섹션에서 시작된 여러 화두와 질문들을 나누는 과정이 무척 의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여성영화 감독에 대한 새로운 역사 쓰기를 위한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유빈 님의 소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임유빈: 제가 여성영화 연구자나 활동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상영회를 준비하며 많이 공부할 수 있었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생각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자리해 주신 관객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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