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택틱스〉리뷰: 편지가 이끄는 곳으로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지윤 님의 글입니다.
문자로 전하는 말에는 음성과 음의 고저가 없다는 이유에 항상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상대에게 문자를 보내고, 편지를 쓴다. 편지만이 그 어떤 마음보다도 상대를 바라보는 나의 진심을 담아내는 장치라는 생각에 중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슬며시 가장 선보이고 싶었던 단어와 문장을 꾹꾹 눌러 담은 종이를 건넨다. 그렇게 그 편지는 쓰임과 동시에 너와 나의 비밀과도 같은, 이전에는 없던 우리만의 새로운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편지 상단에 적힌 이름의 누군가에게 닿아 읽히는 것과 동시에 그 세계는 더욱이 그 두 사람에게만은 확실한 형태가 되곤 한다. 그 생성의 시간은 온전히 상단에 적힌 이름의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와 호흡으로 받아든 종이에 적힌 까만 선과 점을 읽는 시간이다. 그렇게 편지는 상대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을 보내온 이의 마음과 생각을 음미하며 나를 읽어낸 너를 다시 읽게 만든다. 〈서바이벌 택틱스〉는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어떤 편지를 읽어내려 하는 인물들이 있다. 두 인물 중 성령(김성령)에게 온 편지도 아니고, 우호(최원용)에게 온 편지도 아닌, 성령의 언니 성희가 가지고 있던 편지이다. 하지만 성희는 이 자리에 없어 그 편지를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우호와 성령, 두 사람은 읽어내기 어려운 글이 담긴 편지 종이를 들고 그 편지가 이끄는 곳으로 계속해서 가고 또 간다.
〈서바이벌 택틱스〉는 계속해서 속이고 싶어 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느린 템포며 빈번한 롱테이크 사용과 대비되는 짧은 이야기들과 소재는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튀어나오고 속임수 또한 계속해서 새로이 등장한다. 속임수에 대한 인물이나 사물을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시작해두고 끝맺음보다는 또다시 새로운 속임수를 등장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유일하게 제대로 마무리를 하는 듯한 이야기는 동물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직선으로 뻗은 길을 걷고 뛰다 우연히 본 전단지 속 누군가 잃어버린 개 ‘두부’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이 개라고 여긴 성희는 전단지에 적혀있던 번호로 주인에게 연락을 한다. 하지만 주인은 계속해서 답장이 없고, 정처 없이 개와 함께 길을 헤매는 여자만이 한강 주변에 있다. 그러다 이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는 아주 드물게 이야기의 결말을 맺으려 하며 주인에게서 온 문자 내용을 스크린에 보여준다. 개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미 잃어버린 개 ‘두부’를 찾아 자신과 함께 있으며 그 문자와 함께 영화는 성희와 우리 모두를 속이고 사실은 두부가 ‘두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속임수를 던지기만 하던 영화를 보며 모든 이야기들을 해석하려 애쓰고 혼자서라도 결론을 맺으려 노력한 시간이 부질없어짐과 동시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영화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태도를 바꾸어 보려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도 급격히 다시 태어나는 듯, 영화적 성격을 달리하며 전혀 교차점 없이 따로 움직이던 인물과 인물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 편지와의 여정이 시작된다.
편지는 영화 내내 존재하지만, 이 편지가 이끄는 곳으로 함께 향하는 두 사람이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은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난 후이다. 두 사람이 만나기 이전까지 영화는 우리가 이들을 의심하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기 전 전화 통화를 나누다 성희에게 성령이 하는 말이 내내 마음에 머무른다.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살아봐.” 꼭 영화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라는 〈서바이벌 택틱스〉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이 말. 이 말은 괜히 이 영화 속 인물들을 의심하고, 멋대로 조각조각 오려 다시 붙여보는 일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앞서 성령과 성희가 전화 통화를 하던 장면은 다시 반복되고, 초인종 소리가 들리더니 우호가 문을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고백하듯 정중하게 성령 앞에 서 있다. 우호가 문득 영화의 전면으로 나와 발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내내 혼자이던 영화 속 두 사람은 편지를 매개로 함께 언니의 흔적을 쫓는 한 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편지가 이끄는 곳으로 흘러가는 인물들 사이에서 편지는 편지 자체이기도, 성희이기도 한 존재가 되어 성령은 그저 손에 종이를 꽉 쥔 채 내가 알던 사람이 여러 타인에게 어떻게 읽혀왔는지 애를 쓰게 만든다. 사람을 읽는 것과 편지에 적힌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며, 편지를 알아가는 것과 성희라는 인물을 알아가는 것에도 더 이상 명확한 선이 없어진다. 편지를 통해 성희와 관련된 인물들을 여럿 만나며 분명히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얻고, 우호와 성령이 계속해서 직선을 따라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한데, 동시에 성령에게 성희는 점차 알 수 없이 바라만 보는 세계가 되어 멀게만 느껴진다. 함께하던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해 만들어낸 인상과 잔상으로만 서로를 읽어내는 건, 어쩌면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방식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읽어낸 네가, 네가 읽어낸 내가 아니게 될 때마다 자주 부딪히고,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서바이벌 택틱스〉는 손에 꽉 쥔 편지가 이끄는 방향으로 성령을 성희로부터 더 먼 곳으로 데려다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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