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탈 脫〉 리뷰: 맞닿고 겹쳐진 동그라미
*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다연 님의 글입니다.
불일불이(不一不二), 너와 내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영목과 지우는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앞둔 영목은 매일 엄격하게 짜인 일과를 반복하며, 불교를 통한 하나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 ‘무(無)’를 통한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영목이지만, 쉽게 과거의 연인이나 번뇌에 빠져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강박적으로 방의 군데군데에 ‘무(無)’를 붙여두지만, 그런 그를 놀리는 것처럼,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빨간 옷의 여자가 그의 방에 나타난다. 좁은 원룸 방에서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의 응수법은 마찬가지로 ‘무(無)’이다. 눈과 귀를 막고 인식하는 자신을 없애는 방식으로 대응해보지만 쉽지 않다.
화가인 지우는 담당자의 재촉을 받으며 전시에 내놓을 작품을 만들고 있다. 새로운 작품을 내어놓고 싶지만, 동적이고 서사를 가진 이미지는 죽음을 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 탓에 어떠한 작품도 진전되지 못한 채 슬럼프를 겪고 있다. 어릴 적부터 서사의 끝이 무서워 끝을 보기 전에 자리를 피했던 그는, 우연히 ‘해변의 사나이’를 찍고 두려움이 더욱 심해졌다. 사진에 모습을 남긴 채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은 한 관광객의 잔상이 오래도록 지우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탓이다. 현실의 죽음과 동떨어진 채로 사진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되살리고 싶어 한다. 그에게 끝이란 죽음이기 때문에, ‘해변의 사나이’를 되살리는 법은 끝없이 반복되는 움직임만 남아있는 행위 그 자체이다. 움직임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즈음, 지우는 검은 옷을 입은 ‘해변의 사나이’를 마주친다.
대상을 없애고 행위만을 남기려는 인물들의 시도에 대한 영화적 증거처럼, 영목과 지우에게 각각 등장하는 빨간 옷의 여자와 검은 옷의 사나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있고 없음에 주목하게 한다. 그들이 있는 자리보다 없는 자리의 긴장감과 존재감이 뚜렷해지고, 언제고 그들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되어 관객은 빈자리를 스스로 메워낸다. 빨간 옷의 여자와 검은 옷의 남자라는 대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연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목과 지우의 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빨간 옷의 여자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영목과 달리, 지우는 ‘해변의 사나이’를 되살리고 싶어 한다. 그가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태어나면 되기 때문에, 지우는 거꾸로 그를 다시 잉태한다. 지우의 애니메이션 속 그려지는 잉태를 빨간 옷의 여자가 반복하고, 영목은 그를 목격한다. 죽음을 앞두었던 영목은 빨간 옷의 여자에 의해 다시금 태어나 빨간 옷의 여자, 지우를 마주한다. 각각의 행위는 별개인 줄 알았던 서로의 환영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고, 완결된다.
온전히 단절되어 있는 타인과 타인은 아주 다르지만 비슷하게 닮아 있고, 연결되어 있다. 다른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마치 아파트처럼 비슷한 모양새로 닮아 있고, 그 속의 우리들은 다른 듯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의 희미한 환영에 영향받는다. 지우와 영목의 세계가 결국 하나로 합쳐질 때, 우리는 타인 속에서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다. 각자 다른 줄 알았던 삶들은 비슷한 모양의 동그라미로 순환하고, 맞닿다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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