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루지 못한 꿈에 몸서리 치다
40대, 생의 마지막 선물 앞에 절규하다
“그대, 어디쯤 가고 있나요?”
Los Angeles
다급히 도망치는 20대 여성 지나. 목숨을 걸고 매춘조직에서 탈출하여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마냥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갱 조직으로부터 도망간 여자를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한국계 경찰 루카스. 이 두 사람은 우연히 몇 차례 마주치며 기묘한 인연을 시작하는데….
Las Vegas
30대의 지나. 비록 몇 년 째 콜걸로 살아가고 있지만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가슴 한켠에 품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통해 삶의 탈출구를 찾고자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던 중 채팅을 통해 자신을 화가로 소개하는 K를 만나게 되는데….
Alaska
40대의 지나. 고독과 시련 속에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생에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해 알래스카로 간 그녀. 오로지 아름다운 한 순간을 보기 위해 사십 평생을 거칠게 살아온 듯, 그녀의 마지막 선물은 이제 삶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알래스카를 비추는데…
영화 속 세 가지 꿈 이야기
영화 속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단절하며 삽입되어 있는 지나의 ‘꿈들’. 이 세 가지의 꿈 장면들은 몽환적이며 현실과 괴리되어 있지만 각 에피소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면에서 영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 길을 잃어버린 지나, 맑고 투명한 ‘진짜 사랑’의 꿈
그의 작업실에서 맞는 상쾌한 아침. 잠자리를 정돈하다가 우연히 벽에서 발견한 시력측정판. 한쪽 눈을 가리고 측정판 속 하트를 본다. 희미하게 흔들리며 좀처럼 또렷해지지 않는 하트를.
아직 꿈 많은 20대의 지나는 낯선 땅 LA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루카스를 만난다. 아직 아픔이 가시지 않은 하트 문신을 보여주며, ‘이렇게 하면 진짜 사랑이 이루어진대요’ 라고 수줍게 속삭이는 그녀는 ‘진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란 달콤한 꿈에 부풀어 낯선 땅에 홀로 서 있다는 외로운 현실은 잊은 채 LA의 하늘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꿈 속 하트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좀처럼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그녀가 찾는 ‘진짜 사랑’임을 아직 잘 모른다.
둘. 차갑고 건조해진 지나, 독하게 움켜잡은 꿈
노란 꽃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빨간 가발을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지나가 있다. 그리고 이내 욕조 안으로 서서히 잠기고 마는 그녀.
달콤한 꿈을 꾸며 해맑게 웃을 수 있었던 과거의 지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뜻한 관계, 진짜 사랑 그리고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은 라스베이거스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 물기 한 방울 머금지 못한 채 부서져 내린 것만 같다. 그 많던 20대의 꿈은 차갑고 건조한 삶의 터널을 지나오며 아픈 흔적으로만 남았고, 그 빈 자리는 세상을 향한 분노로 채워져 버린 듯 하다. 하지만 무뎌지고 잊혀져 가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가슴 속에 남는 것이 꿈이라면, 그녀는 아직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 꿈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더 독하게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셋. 거친 삶의 끝에 선 지나, 거침 없이 돌진해서 이루고야 말 꿈
알래스카의 눈 덮인 길을 걷는 지나의 얼굴에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가득 번져있다. 그녀가 오래도록 보고 싶어했던 순록이 눈 앞에 꿈처럼 서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아 가슴 설레었던 스무살의 꿈, 꿈은 커녕 살아가는 것 조차 힘듦을 알게 해준 서른살의 꿈을 거쳐 온 지나가 알래스카 한가운데 처연히 서있다. 그녀에게 ‘꿈’이란 더이상 비누방울처럼 허망한 대상도, 말라 비틀어진 장미꽃처럼 뒤틀린 아픔도 아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빛, 오로라. 단지 그 빛 한줄기를 보기 위해 무작정 알래스카까지 왔다. 맨몸으로 맞서 살아온 험난했던 삶의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꿈을 이루고야 마는 그녀의 환희와 절규는 그녀 인생의 클라이막스이며 동시에 영화의 클라이막스이다.
제2의 캐릭터, LA–라스베이거스-알래스카!
영화에 나오는 세 개의 도시는 단순한 로케이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세 명의 주인공이 거쳐가는 인생의 시기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주며 각각의 도시가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이며 주인공이 가장 젊은 시절을 보낸 LA는 현실보다 밝아서 눈부신 조도가 주를 이룬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는 캘리포니아의 강한 햇볕은 과다노출 촬영을 통해 20대의 지나가 처한 상황을 영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의 삶에서 외면적으로 가장 화려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장 건조하고 고독한 시기인 30대는 겉모습이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촬영되었다. 주인공의 내외면의 극단적 대비를 표현하기 위해 주요 컨셉트를 ‘명암의 교차’로 잡고 밝음과 어둠이 대립하는 도시를 택한 것이다. 화려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도시 속에서 극명한 명암의 교차와 그 사이를 오가는 두 명의 외로운 영혼(지나와 K)이 앙상블을 이루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주인공 지나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는 공간인 알래스카는 영화의 마지막이자 세상의 끝이다. 여기에 사계절의 마지막인 겨울을 배경으로 택하여 흑백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그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겨 주었다. 40대의 지나에게 인생은 뿌옇게 바래서 색깔이 더이상 의미가 없기에 배경인 알래스카 역시 컬러가 없는 흑백의 공간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처럼 세 개의 도시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며 영화 속에서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는 영화 <허스 HERs>는 깔끔하고 세련된 HD 영상에 담겨져 영상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예술 작품을 구현해내고 있다. 영화 내외적인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풍부함을 더하고 있기에 2007년 가장 기대되는 한국영화로 <허스 HERs>를 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삼색 보석의 오롯한 조화!
김정중 감독은 김혜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유하는 듯 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져 20대의 지나를 풍부하게 표현해내기에 적역이라고 판단해서 캐스팅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녀의 이국적인 마스크는 낯선 땅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여성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30대의 지나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바이스바움은 사실 혼혈이다. 한국계 어머니와 독일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한국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오디션을 볼 때부터 뿜어져 나온 그녀의 저돌적이고도 과감한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실제 그녀의 성격은 무척 감성적이고도 여린 편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30대의 지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이다. 실제 본인과 흡사한 인물을 프로페셔널한 감정 컨트롤을 통해 카메라 앞에서 재연해낸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경우, 알래스카의 기후 상황 때문에 물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촬영이었고, 출연에 앞서 여배우로서 남다른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법한 역할임에도 주저함 없이 과감하게 수용할 만큼 프로 배우였던 수지 박은, 영화 속에서 극심한 감정의 교차와 인생의 최절정기를 연기하는데 있어 전혀 손색 없는 연기를 펼침으로써 영화의 후반부를 감동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며 쌓아온 그녀의 내공이 바로 이 영화 <허스 HERs>를 통해 빛을 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굉장히 도도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 팜트리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을 보면서 난 처음 이 영화 <HERs 허스>를 생각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어느 날 ‘엉덩이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글을 쓸만한 지구력과 끈기가 있냐?’는 선배의 말에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러던 와중 중국 5세대의 초기 영화들을 접하게 되고 그 미학적 힘에 매료되어 무작정 중국으로 떠난다. 그렇게 시작한 중국 생활. 그는 6세대의 태동기에 중국에 체류하면서 북경 전영 학원(Beijing Film Academy)에서 영화 공부를 한다. 여기서 지아 장커나 왕 샤오 슈아이와 같은 이들도 만나게 된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박철수 감독의 연출부 조감독을 하며 경험을 쌓았고 한국 영화인들을 만난다.
그리고 199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역만리에서의 치열한 생존 싸움에서 살아남은 그는 다시 영화일을 시작하며 바다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였다. 이 모든 기반 위에 감독과 현지 스태프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끝에 바로 이 영화 <허스 HERs>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We are each of us angels with one wing.
We can only fly
embracing each other."
“우린 날개가 하나씩만 달린 천사들
서로를 안아야만 날 수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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