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명주공〉 리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회고록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나은 님의 글입니다.
나무가 무너진다. 부드럽고 푸르른 잎사귀를 날리던 버드나무가 너무나도 쉽게 고꾸라진다. 2020년 봄, 두 사람이 어느 저층 아파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연신 담아낸다. 아파트를 포함해 아파트를 둘러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충북 청주 봉명동에 위치한 1세대 주공아파트의 이야기다. 1980년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2020년 재개발이 예정돼 있다. 재개발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직전까지 그 안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그려냈다. 단순히 재건축이 아니라 아파트, 나무, 인간, 고양이. 생태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시간을 돌려 2019년 여름,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씩 봉명주공에 녹아있는 그들의 기억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재개발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오랫동안 아파트를 둘러싼 생태계와 소통해왔기 때문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봉명주공이 사라지고 신식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이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봉명주공은 이 시대의 아파트가 갖는 정체성과는 사뭇 다르다. 일단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서 1층 주택을 짓는다는 것부터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 주택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봉명주공은 주거 공간의 의미를 넘어 공동체, 마을 같은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주위엔 나무와 꽃이 그득하고, 아이들은 함께 뛰놀며 어울려 놀았다. 이들에게 재건축은 추억이 담긴 곳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봉명주공은 이들의 오랜 세월이 녹은 넓은 세계와도 같기 때문이다.
거주지를 옮기고 싶지 않은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사실 앞서 몇 번이고 언급한 꽃과 나무, 고양이들에겐 이동에 대한 선택권조차 없다. ‘수간(樹幹)’은 가지나 잎을 제외한 나무의 폭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간의 폭만큼 뿌리가 존재한다고 하니, 몇십 년 동안 한자리에 있었던 거대한 버드나무는 그만큼의 뿌리를 땅속에 오래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뿌리가 너무 깊고 넓게 자리한 나무는 온전히 뿌리를 지키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옮긴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잘 자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생사가 확실하지도 않은 것들투성이의 봉명주공인데, 동의 없이 그들의 생태계를 함부로 파괴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결국 도시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봉명주공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명 새롭고 편리한 세상이 자리 잡을 테지만, 그것이 정녕 그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한 길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2020년 봄, 재건축이 시작되어 모든 것을 허문다. 나무가 넘어지고, 다시 또 넘어지길 반복한다. 자신들이 왜 넘어져야 하는지 모른 채 계속 베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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