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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미싱타는 여자들〉 인디토크 기록: 물가의 나무가 되어 서로를 안아 지탱했던 시대의 전언

by indiespace_한솔 2022. 5. 6.

 

 물가의 나무가 되어 서로를 안아 지탱했던 시대의 전언 

 〈미싱타는 여자들〉  인디토크 기록

 

 

일시 4 12(화) 오후 7

참석 이혁래, 김정영 감독│주인공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진행 뮤지션 홍순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해수 님의 글입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원제부터 타다란 동사가 들어있다. 동사는 움직임을 내보이는 기능을 한다. 이 영화는 그 정의를 흠뻑 함의한 듯 노동을, 우리를, 나를 지키려 했던 모든 동사를 꺼내 소복이 모았다. 증언이 쌓일수록 우리로 모여 건너셨을 긴긴 계절을 같이 세어보게 되었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라고 부른 노래에 형태가 있다면 분명 곧은 자세였으리라. 미싱타는 여자들을 감상하면 필히 나는 어떤 동사를 지니고 우리에 가담할지 궁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모두의 봄. 그러니까 청춘이 항구적이도록, 하나 되어 나서야 될 지점을 마지막(나 역시 영영 완결되지 않길 바란다) 인디토크에서 콕 짚어주셔서 더욱 유의미했다. 오늘이 흔들리지 않고 넘어올 수 있던 건, 어제의 심어진 나무와 같은 단결의 노고가 있었다는 전제를 명랑하게 일러주는 기록집인 영화. 그러니 우리도 어서 이분들과 나란한 동사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뮤지션 홍순관(이하 홍순관):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홍순관입니다. 요즘 시는 참 슬픈 유머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시를 아무리 잘 써봤자 자연에 미치지 못하고 인간의 일상을 따라가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러나 또 우리의 일상을, 자연을 시보다 아름답게 표현할 길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하죠. 그런 면에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도 같은 생각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이들의 삶을 하루라도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거기엔 미치지 못할 거야. 그러나 그 현실을, 그 가슴 아픈 시간을 다큐보다 아름답게, 진솔하게, 담백하게 담는 장르는 또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섯 분을 모시겠습니다. 이혁래 감독님, 김정영 감독님 그리고 주인공이죠. 영화에 나오셨던 이숙희 선생님, 신순애 선생님, 임미경 선생님. 다섯 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 이숙희 선생님은 영화를 보고 계셨군요. 관객의 한 명으로서 감동이에요. 일단 감독님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1살 때부터 혼자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꽤 많은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진하게 남는 영화는 참 드뭅니다. 그 첫 장면에 미싱 장면이 나오고. 연이 궁금해서요, 그 연은 실제로 띄운 건가요?

 

이혁래 감독(이하 이혁래): 연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을 할 때는 기자님께서 어떤 의도로 그런 CG를 넣었냐고 질문을 하시기도 하셨고요. 연은 실제로 그 공간에 있었던 연입니다. 오프닝을 촬영한 장소가 파주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에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곳은 굉장히 유명한 연 날리기 맛집이에요. 그날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하나만 있었던 거지, 보통 때 같았으면 연이 사방팔방 있었을 거예요. 솔직히 이야기하면요. 딱 그 순간에 연이 떠 있던 건 아니에요.(웃음) 아무튼 촬영할 때 떠 있던 연이 타이틀과 함께 떠오르도록 손을 본 장면입니다.

 

홍순관: 첫 장면에 미싱을 세 분이 하시잖아요. 나름 승부욕이 있으시더군요.(웃음) 실제로 이숙희 선생님은 명동 의상실을 거쳐서 평화시장에 들어가셨다고요. 그러면 세 분 중에 가장 미싱을 잘하실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영화에서는 우리 신순애 선생님이 가장 잘하신다고 나오던데요.

 

주인공 이숙희(이하 이숙희): 제가 신순애보다 평화시장 늦게 왔고요. 일을 또 가장 빨리 그만둔 사람이 저입니다.

 

홍순관: 그럼 제일 못하시겠군요, 미싱을.

 

이숙희: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홍순관: 이봐,(웃음) 승부욕 있으시잖아요. 영화에서 그게 보였어요.

 

이숙희: 저는 숙녀복을 주로 하는 사람이어서 모든 옷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홍순관: 신순애 선생님, 가만히 계시면 안 되죠.

 

주인공 신순애(이하 신순애): 그냥 저는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했어요.

 

주인공 임미경(이하 임미경): 사실은 순애 언니가 제일 잘해요. 꼼꼼하고 제일 잘하고요. 사실 숙희 언니는 미싱 못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잘하더라고요.(웃음)

 

홍순관: 영화에서 각자의 이름을 다 박으신 거죠? 서로의 이름을 바꿔서 하신 건 아니죠?

 

임미경: 바꿔서 한 거예요. 쉬운 거는 제가 했고요. 조금 어려운 거는 순애 언니가 했고요. 동그라미 많은 게 어려워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홍순관: 김정영 감독님, 이 영화를 찍기 전부터 박태숙 씨를 4년간 이미 인터뷰를 하셨다고.

 

김정영 감독(이하 김정영): 4년간은 아니고요. 2018년도에 창신동에 이음피음 봉제역사관이 개관하게 되어, 의뢰를 받아 봉제 노동자들의 20대부터 80대까지의 구술 생애사 영상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청계피복노조 출신도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청계피복노조 전태일 씨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니까 싶어서 그렇게 했죠. 현재까지 미싱을 하는 사람을 인터뷰하기로 했고 박태숙 선생님이 현재까지도 미싱을 하고 계셨어요. 인터뷰였거든요. 박태숙 선생님이 이숙희 선생님을 모시고 오셨고요. 신순애 선생님은 예전에 책을 내신 게 있으셔서 그 책을 보고 연락을 해서 만나고. 그렇게 영상을 납품하고, 이분들을 만나면서 저에게 떨림이 있었기 때문에 꼭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숙희 선생님을 제일 먼저 찾아갔죠.

 

홍순관: 그러셨군요. 이숙희 선생님께서는 임 선생님과 신 선생님을 어떻게 떠올리시고 모시게 되었나요?

 

이숙희: 9·9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기록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고요. 근데 영화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연결이 안 되는 친구들이 많잖아요. 그때 나이 어렸던 친구들. 그래서 사건에 있었던 사람들부터 하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홍순관: 임미경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용기를 내셨을까요.

 

임미경: 그때는 어렸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정의에 목숨을 걸었어요. 한마디로.(웃음)

 

홍순관: 개인적으로 제가 궁금한 걸 여쭤봐도 되나요? 공소장을 보면 60년생으로 나이를 2년 올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임미경: 제가 주민등록상 62년생이에요.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꼭 잡아 넣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봐요. 그러니까 나이를 위조해 넣을 정도가 된 거죠. 그만큼 치열하게 싸웠어요.

 

홍순관: 나라면 그 나이에 그랬을까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그렇습니다. 따님이 그러셨나요. “엄마 신경 안 써. 다른 사람 봐도 잘 모를 거야.”

 

임미경: 사실 숨겨진 과거를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나를 아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감독님 만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는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청계노조를 좀 알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그때 우리가 너무 열심히 싸웠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망설였는데 우리 딸이 그러더라고요. 남의 일에 관심 절대 없으니까 그냥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래서 용기 내서 한 거예요.

 

홍순관: 알겠습니다. 신순애 선생님. 취직할 때 시다 해봤냐는 질문에 거짓말로 해봤다고 하신 뒤 취직되셨어요. 그리고 영화 내내 정말 프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하시는 음성이나 목소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요. 어쩜 그렇게 차분하세요?

 

신순애: 실제로는 차분하지 않습니다.(웃음) 남들이 그렇게 봐주는데요. 실제로는 좀 덜렁이고요. 그 순간에 저도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했을까 싶은데요. 세월이 흐르면서 보니까, 위장전입이라는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강남의 8학군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위장전입을 하고 그러는데, 아마 최초의 위장전입이 78년도의 저였을 거예요. 자꾸 압력이 들어오니까. 남의 집에 세를 사는데, 제가 정부에서 시키는 말을 안 들으니 집주인한테 압력을 넣어서 우리 엄마한테 당신 딸이 빨갱이라는데 이사 가라.” 했대요. 다른 조합원들이나 친구들은 엄마가 노동조합 왜 가냐 그러고, 때로는 때리기도 했다는데요. 저희 엄마는 너무 너무 쿨하셨어요. ‘나는 내 딸이 간첩 아니라는 걸 믿는다’, 역시 우리 엄마는 너무 멋있어. 내 엄마인 게 너무 감사했거든요.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하셨으면서 몸이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셨어요. 돌아가셨는데요. 제가 그때 엄마한테 청심환 하나 사다 드리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고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전태일 모친 이소선 어머니한테 이야기했더니, “순애야. 너 그러면 우리 집으로 퇴거 신고해라.” 그래서 제가 쌍문동 208번지에 퇴거 신고를 하고, 사실은 위장전입이죠. 주민등록만 창동으로 옮기고. 제가 거짓말로 시다를 해봤다고 한 거나 사는 곳에서 퇴거 신고한 거나, 이런 것들이 어쩌면 살기 위한 거였죠. 그 방법 말고는 제가 살길이 없었잖아요. 제가 엄마를 도와야 하고, 또 밀려나면 기술을 배울 수가 없잖아요. 절실했기 때문에 저는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몸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홍순관: 임미경 선생님이 숙희 언니 말 잘하지, 순애 언니 말 잘하지.” 하셨는데 진짜 말씀 잘하시죠.(웃음) 감독님, 인터뷰 장소가 서울시립미술관 창고라고 들었는데 그곳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정영: 불광동에 ‘SeMA 창고미술관이라는 데가 있어요. 그곳이 창고를 개조한 데라 되게 천장이 높아요. 그리고 공간도 넓은데, 1인 인터뷰할 때 조명 치기가 좋아요. 가장 아름답게 나와야 되잖아요, 선생님들. 영화는 큰 화면에서 나와야 되니까 표정도 하나하나 다 잡기 위해 조명과 촬영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스튜디오 같은 곳을 일부러 구했고요. 서울시의 도움을 받았어요. 저희가 서울영상위원회의 지원도 받은 작품이어서요.

연이 날린 것처럼 저희 영화가 기적 같은 장면들이 좀 있는데, 이숙희 선생님이 농성장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할 때 엠뷸런스 소리가 나오잖아요. 실제로 차량이 지나간 건데저희가 녹취를 풀 때도 어떻게 이렇게 효과처럼 엠뷸런스 소리가 탁 나나.” 했고요. 임미경 선생님 울면서 인터뷰하실 때는 그날따라 비가 내렸어요. 자세히 들으면 빗소리가 들려요. 마지막 장면도 보면, 공간에 설치 미술처럼 차양이 다 쳐져 있잖아요. 미로처럼 걸어가다가 자기 옛날 사진을 보는 장면. 거기는 통일상가예요. 저희가 직접 세팅한 게 아니에요. 저희가 어떤 장면을 찍고 싶을 때 그런 도움들이,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던 거예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홍순관: 그렇군요. 마지막 장면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저도 위안부관련 일을 초창기에 할 때 알게 되었는데. 이 일을 세상에 알린 것은 제 생각에는 그림입니다. 한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대’(‘위안부’) 출신 할머니가 계신다는 걸 알고 무작정 찾아가 미술 교실을 하는 겁니다. 할머니들이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리면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거죠. 전 노석미 선생님의 그림이 이 영화하고 정말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신순애 선생님의 책에 나오는 따님의 그림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설명을 해주시죠.

 

김정영: 노석미가 저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지만, 석미의 그림이 단순하지만 되게 힘이 있고 따뜻하고 정감이 있잖아요. 항상 석미 그림을 사무실에 붙여놨어요. 이 영화에 비주얼 전략으로 그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친구니까 차마 그런 부탁을 못하겠는 거예요. 저희는 저예산 독립영화인데, 노석미는 씬에서 잘나가는 작가잖아요, 그래서 차마 부탁 못 하고 있었는데 이혁래 감독님이 옆에서 부추겼어요. 신순애 선생님의 따님이 그린 그림을 보면, 너무나 슥삭슥삭 그렸는데도 표현이 되게 잘 되어있어요. 이런 식의 그림을, 선생님들의 젊었을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의 모습을 노석미가 그리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그 어려운 일을 이혁래 감독님의 푸쉬를 통해 용기를 내어 이야길 했어요. 노석미 작가는 지금은 보통 산과 자연, 고양이들을 많이 그렸고 초상화 의뢰를 받아 그리는 작가는 아니거든요. 맨 처음에는 조금 저어했었지만 직접 인터뷰를 할 때도 보면 되게 유려하게 잘하시잖아요. 나중에는 큰 단체사진 작업까지 흔쾌히 해주셨어요. 노석미 작가의 그림으로 선생님들의 초상화가 포스터로도 나오게 됐고. 아무래도 선생님들의 가장 빛나던 젊은 시절의 얼굴을 잘 형상화 시켜줬고, 마케팅적으로도 트위터나 SNS에서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노석미 작가의 그림이 흡입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참 고마웠죠.

 

홍순관: 신 선생님은 어떻게 따님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말하게 되셨어요?

 

신순애: 교수님이 늘 코멘트로 글을 누군가가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게 쓰라고 하셨거든요. 꿇어앉아서 시다 생활을 25개월 넘게 했는데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재능이 없더라고요, 저한테. 그래서 딸한테 내가 이렇게 앉아서 일을 했었는데 그림으로 하나 그려주라 했더니 슥슥 그려줬어요. 우리 딸이 영화에도 나올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그릴 걸 그랬다고 지금도 제게 조금 미안해하더라고요.

 

홍순관: 그래도 그림이 되게 중요한 자료가 된 거죠. 이혁래 감독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두 분이 연출하셨어요?

 

이혁래: 사실 저예산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하는 게. 그런데 두 사람도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아서요. 진흙탕을 구르듯이 작업을 했죠.

 

홍순관: 예산이 없을 땐 한 사람이 하는 게 더 나은 것 아닌가요?

 

이혁래: 인건비가 제대로 책정이 된다면야 그렇겠지만요. 꼭 그렇지 않기 때문에요. 물론 저희 영화에 참여해주신 스탭 분들께는 충분치는 않지만(드렸죠). 프로젝터 앞에서 대화 장면과 강릉 해변 장면을 촬영해주신 김치성 촬영 감독님도 앞에 계시는데요. 물론 김치성 촬영 감독님의 경력에는 합당치 않은 금액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정의 인건비를 책정하여 작업을 했죠. 저희는 제작과 연출을 겸했기에 이 프로젝트에서는 일종의 사장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인건비로 두 사람이 일을 했다, 정도로 생각을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홍순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 바다 장면도 기가 막혔습니다. 저희한테 내용은 안 알려주시고 임미경 선생님이 이거 완전 코미디야이러고 웃으셨잖아요.

 

임미경: 이거는 너무 웃긴 이야기인데요. (두 선생님을 보며) 이야기할까? 혹시 마지막(GV)이 될지도 모르니까 비밀스러운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셋이 걸어가면서 마이크를 차고 대화를 하잖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잘했는데 갑자기 숙희 언니가 , 우리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 똑바로 해야 한다고 그랬어.” 이 말을 마이크에다가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환하게 웃는 게, 너무 웃기는 실수를 해서.

 

홍순관: 그렇군요, 생각보다는 안 웃긴데.(웃음) 카카오톡으로 관객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질문입니다. 조금 마음이 아픈데요. “선생님들의 역사 너무 잘 봤습니다. 어린 나이에 큰일과 부조리를 겪으셨는데요. 그 이후의 삶과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생각을 어떻게 정립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후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셨는지 이런 걸 여쭤보는 것 같아요.

 

임미경: 사회에 적응은 저희가 무지하게 잘하는 편이에요.(웃음) 열두 살, 열세 살 때부터 막 굴렀잖아요. 그래서 어디에다 내놓아도 우리는 정말. 그러니까 누구한테도 지지 않게 열심히 사는 스타일이에요. 시다를 했을 때도, 데모를 하러 막 나가도 그 사장이 저보고 와서 일해달라고 할 정도예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남이 하나 할 때 우리는 막 다섯 개를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언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노동조합에 다니는 사람은 그렇게 일을 했어요. 전태일 열사의 친구, 선배님들이 하는 이야기가, “깡패가 죽었다, 깡패 친구들이 저런다.”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 그분들도 정말 열심히 사셔서 본이 살아요. 저희 뭐, 세상 살아가는 데 적응하는 거 정말 너무 잘했지? 너무 잘살고 있어요.

 

 

홍순관: 가벼운 질문이 하나 있어서요. 촬영 시 코디, 의상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신순애: 감독님이 뭘 입고 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알아서 입고 왔는데요. 관객과의 대화를 하니까 신순애 선생님 옷 좀 뽀대나게 입고 오라고.(웃음)

 

김정영: 그런 식으로 했죠. 이숙희 선생님한테 여쭤봐요. “선생님, 무슨 색깔 옷 입고 오실 건가요?” 그러면 나는 빨간색하면 선생님들한테 전화할 때, 이숙희 선생님은 빨간색 옷 입고 오신답니다, 그러면 나는 무슨 색!’ 이렇게 알아서 이숙희 선생님을 기준으로 딱딱 진행됩니다.

 

홍순관: 진짜 승부욕 있으시다니까요.(웃음)

 

이숙희: , 그게 아니고요. 저는 얼굴을 가꾸고 머리를 예쁘게 하고, 옷을 잘 입고 이런 데에 솜씨가 없어요. 옷은 만들지만. 왜 인터뷰에 옷을 여러 벌 입고 나왔냐면, 카메라가 돌아가면 경직되는 거예요. 표정이 굉장히 굳고, 말을 원래도 제가 딱딱하게 하는 편인데 더 딱딱하게 해서 저는 다시 찍고, 다시 찍고 해서 여러 가지 옷이 나온 겁니다.(웃음) 옷을 뭘 입고 와라 이렇게 된 게 아니고요.

 

홍순관: 가벼운 질문이라 제가 했는데, 굉장히 자세하게 해주셨어요.

 

이숙희제가 유머를 다큐로 받는 스타일이라 그래요.(웃음)

 

홍순관: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아무나 못 합니다. 여기서 몇 분이 그게 궁금하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조합원분들과 연락하시는지. 세 분은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다른 분들은 어느 정도 연락이 되는지요.

 

이숙희: 청계피복노조 출신들이 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청우회라고요. 전태일 열사의 친구분들, 영화에 나오는 선배님들이 주축이 되어 모임을 해서 명단으로는 백여 명이 넘게 있어요. 그렇지만 연락이 다 되진 않기 때문에 영화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은 없고요. 저희는 사건 이후에도 계속 미싱일을 했기 때문에 항상 그 언저리, 청계피복노조, 전태일의 언저리에 계속 살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다 만나게 되어있어서, 뭐 특별하게 연락하진 않았고요. 이 영화를 보고 한 20년 전에 만났던 친구가 전라도에 사는데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광주에서 관객과의 대화할 때 만나자, 그랬는데 코로나가 더 심해져가지고 못 내려갔어요.

 

홍순관: , 그렇군요. 코로나가 참 빨리 마치고 정리가 되어 만나면 좋겠네요. 자녀들의 반응도 궁금해하시네요.

 

임미경: 우리 사돈은 아직 영화를 못 봤어요. 얘기를 안 한 것 같아요. 우리 사위는 이 영화를 보고 너무 뜻밖이라고,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걸 보고 우리 딸한테 이거 진짜야?”라고 물어보더래요. 사위한테 제가 물어봤어요. 영화를 보고 소감이라던가 한 마디쯤은 해줘야 되는데 왜 한마디도 안 하니, 하고 물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머님, 진짜로 그 판사 얼굴이 보였어요? 나이가 그렇게 어린데 판사 모습이 보였어요?” 저희 사건이 단독 판사가 아니고 세 명의 판사가 담당했어요. 저희가 뭐 큰 죄인이라 해야하나, 세 명이나 있는 합의부 판사였어요. 이 사람들이 이제 마지막에 판결을 해야하는데 서로 어떻게 해야 하냐며 눈치만 보고 있는 거예요. 난감한 표정. 나는 실제로 그게 보이면서 그 사람들한테 연민을 좀 느꼈다, 그랬더니 사위가 어머님 나이도 되게 어리셨는데 굉장히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힘이 됐어요. 사위는 껄끄럽잖아요, 조금.(웃음)

 

신순애: 저는 노조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이랑 결혼해서, 아이들 앞에서 뭐를 숨겨본 적이 없어가지고요. 엄마가 그냥 공부를 하면 공부하나보다, 하고요. 중간에 공부를 포기하려고 했더니 엄마, 우리 고등학교까지 마쳤는데 설마 굶기야 하겠어.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그렇게 응원을 해줘서 무사히 대학교도 마칠 수 있었고요. 늘 남편과 딸들이 엄마는 뭐든지 옳은 것만 해하는 믿음이 있더라고요. 되게 감사하죠.

 

홍순관: 한 분께서 영화 잘 봤다며 인권 활동가를 꿈꾸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상을 무사히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숙희: 네.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신순애가 이야기했던대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을 진행한 적 있었어요. 그때 생활지원금을 받았고요. 그런데 그 땐 대체로 감옥에 갔던 저희 같은 사람들만 되었기 때문에, 2009년에 국가 폭력에 대한 소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노조 활동을 같이 했던 원풍, 동일, YH, 콘트롤데이터 이런 데가 전부 다 같이 국가 폭력에 대한 소송을 시작했어요. 2009년에 시작해서 2021년에 저희가 끝났습니다. 12년 만에. 이길 수 있었던 게 마지막에 감독님 두 분 때문이에요. 특히 이혁래 감독님이 저희에게 많은 것들을 줬어요. 원풍, 동일 이런 데는 다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회사가 없어져도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청계피복노조에 속했던 사업장들은 다 작은 업체들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취업할 때 취업 규칙도 없고,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어요. 증명할 수 있는 건 노동조합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노동조합도 801월에 전두환 씨가 대통령 되면서 민주노조 없앨 때, 문 닫고 모두 퇴근한 사무실을 경찰들이 뚫고 부수고 들어와서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증명할 수가 없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감옥을 살거나 구류를 살았던 사람은 증명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조합원들은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고민하고 있던 중에 이 영화 작업을 하고 있었잖아요. 말씀을 드렸더니 같이 자료를 찾아봐 주겠다 해서 파주에 있는 전태일기념관 창고에 가서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자료들을 다 헤쳐서 찾아봐 주셨고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증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몇 명이 나왔어요. 왜냐면 노조 다닐 때 부르던 이름하고 호적상 이름하고 다른 친구들이 몇 명 있었거든요. 그걸 우리더러 증명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호적상 이름하고 동일하다는 증거를 내라는 거예요. 근데 그걸 찾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이혁래 감독님이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선생님, 그분들 결혼사진 쓰면 안 될까요?” 하시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왜요, 그랬더니 거기 하객으로 친구들이 다 갔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증명이 된 사람들이 친구로서 참여를 했을 테니까 그 사진을 제시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결혼 사진을 받고 거기에다가 감독님이 말풍선을 다 달아서, 이 사람은 누구, 이 사람은 누구. 하객 이름들을 다 붙여준 거예요. 그래서 다행히 전부, 55명이 승소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홍순관: 세상에, 12년 만이라뇨. 고생 많이 하셨어요. 영화를 보면 몇 가지 단어가 확 떠오릅니다. 그중의 하나가 노동 교실인데요. 영화에는 평화교실로 계속 나오고 인터뷰로는 노동교실로 나옵니다. 실제 이름은 노동교실인가요?

 

이숙희: 네. ‘새마을 노동교실이라고 붙였어요.

 

홍순관: 평화교실하고는 다른 교실인가요?

 

이숙희: 평화교실은 1972년에 노동조합에서, 전태일 씨가 돌아가시고 나서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는데요. 첫째는 일요일 작업 단속, 두 번째는 월급 떼인 거 받아주는 거였고요. 세 번째가 모든 노동자의 소망인 공부. 그래서 새마을 평화 교실을 만들어서 725월부터 중학 과정을 합니다. 영화 보면 그 좁은 사무실에 200명 이상이 신청했다고 나오잖아요. 그게 바로 평화교실이었고요. 시간이 지나고서 노동교실이라는 이름으로 된 겁니다.

 

홍순관: 신 선생님. 신순애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써보고, 노동교실이 열리자 마자 닫히는 와중에 실제로 공부를 얼마나 하셨어요? 그 교실에서.

 

신순애: 공부요? 미싱 일할 때 말고, 잠잘 때 말고는 계속 공부를 했죠. 숙제 꼬박꼬박하고. 제가 굉장히 말도 잘 듣고 뭘 하면 내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해요. 공부도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행복했죠.

 

홍순관: 그림과 노래가 이 영화의 아주 큰 몫을 차지하는데, ‘흔들리지 않게뜻 없이 무릎 꿇는이라는 노래가 생각나요. 선생님들은 떠오르는 노래 있으신가요?

 

신순애: 잔인한 노래인데요. 김민기 씨가 만든 노래인데, ‘서방님의 손가락이라고 산업 재해에 대한 노래예요. 해봐.

 

이숙희: (노래를 하며)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싹둑 잘려서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집에 오니 빈털터리래. 이 옷을 만들면은 누가 입나요. 사장님 사모님이 사서 입나요. 코쟁이 노랑머리 사서 입나요. 우리들은 작업복만 어울린대요. (다 같이 박수)

 

홍순관: 이거 저도 중학교 때 불렀거든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불렀어요.

 

이숙희: 오만 원은 잘 받은 거예요. 저희 언니, 오빠들은 삼만 원 받았어요.

 

임미경: 언니는 그 노래가 제일 좋아?

 

이숙희: 제일 좋은 건 아니고. 하라 그러면 항상 그걸 부르게 되더라고. 진짜로 제가 좋아하는 건 따로 있어요. 한 번 불러볼까요. 78, 9년도 내가 부녀부장할 때 조합원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인데요. (노래를 시작하며) 누구나 한결같은 민족의 자손. 지식인, 노동자라 분리된 현실은 그 누가 만들었나. 찾아나 볼까나. 끝까지 찾아서.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합니다.

 

홍순관: 이럴 때 진짜 꾀꼬리 같으세요. 목소리가 어쩜 이렇게 예쁘세요. 아니, 임미경 선생님 왜 이렇게 웃으세요.(웃음)

 

김정영: 임미경 선생님이 가수예요.

 

홍순관: , 그러면 또 들어야죠.

 

임미경: 아니에요. 저는 옛날에는 투쟁가를 정말 정말 잘 불렀어요. 투쟁가 중에 저는 제일 제가 흐뭇하게 부르는 게 뻥 터졌네예요. (웃음) 노래로는 할 수 없고 가사로 이야기해드릴게요. 뻥 터졌네. 뻥 터졌네. 서울 구치소가 뻥 터졌네. 노래는 잘 모르겠어요.

 

신순애: (노래 시작하며) 뻥 터졌네, 뻥 터졌어. 서대문 구치소가 뻥 터졌네. 가세, 가세. (임미경 함께) 몽땅 가세. 서대문 구치소로 몽땅 가세.

 

임미경: 사람을 하도 많이 잡아가서 구치소가 뻥 터지는 줄 알았어요.(웃음)

 

신순애: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오는 이순자가 , 말이 씨 된다. 우리 이 노래는 진짜 부르지 말자.”(웃음)

 

홍순관: 근데 진짜 노래 잘하시네요. 새로운 발견입니다. 나중에 영화를 한 번 더 만든다면 아예 OST를 녹음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임미경: 두 번째는 우리 승리하리라예요.

 

홍순관: 운동가도 세월에 따라 잊어버리더라고요. 유행이 있습니다. 유행은 있지만, 그래도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정신 때문에 이런 자료가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이 세 분의 노래가 굉장히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다큐를 찍기 전과 지금처럼 상영이 된 후의 변화한 게 있을까요?

 

이숙희: 저는 속이 꽉 막혀있던 여러 가지 일 중에 가장 큰 9·9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싸움을 했지만, 평가할 시간이 없었어요. 한 번도. 늘 다음 싸움들에 묻혀있었고. 9·9 사건은 굉장히 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평가해본 적이 없었는데요. 이 다큐 덕분에 그래도 띄엄띄엄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제가 알고 있던 기억과 미경이가 알고 있던 기억이 다르기도 하고,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됐고요. 그래서 막혀있던 속이 좀 풀렸다, 그런 점이 하나 있고요. 또 달라진 점은 제가 아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잖아요. 그럼 이제 웃자고 여배우님 오셨어요.” 이래서,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농담도 다큐로 받는 스타일이니까 그런 것들이 너무 괴로워서.(웃음) 그렇습니다.

 

신순애: 저는요. 제가 이 영화에 나오는 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굴곡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제 삶에서. 어려운 시기가 있잖아요, 살면서. 그럴 때마다 늘 저한테 나중에 생각해보니 구세주가 나타나서 일을 해결해주고 그랬는데요. 이 영화도 그 중에 하나인 거 같아요. 저는 책을 쓰면서도 왜 그렇게 사진을 찍는 걸 싫어했을까 스스로 이해를 못 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됐어요. 그 당시 사진 현상을 하려면 장당 100원이나 150원을 내야 해요. 저한테는 150원이 사치였거든요. 그러니까 찍어봤자 나는 안 찾을 거니까, 내가 왜 찍냐 그랬고요. 그런 것들이 영화를 찍으면서 하나씩 나와서 한 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고 아프기도 하지만. 또 하나 내가 너무 감사한 건 제가 돌아가신 엄마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감독님이 우리보다 어린 애들, 연소근로자 위안 잔치를 12월마다 했는데 우리들의 어머님도 한 번 모시고 하자 그래서. 지금은 떡도 배달만 하면 탁탁 해주지만 그 당시엔 우리가 쌀 사다가 대야에 불려서 이고 가서 방앗간에서 해오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어머님들 잔치를 했는데, 감독님들이 어디서 사진을 찾았는지 앨범이랑 맞춰서 저한테 선물을 해주셨는데요. 어저께도 눈물을 찔끔 흘렸습니다. 이상입니다.

 

임미경: 저는 별로 바뀐 게 없어요. 숙희 언니처럼 사람들이 , 배우님 오셨어요.” 이거 말고는.(웃음) 그냥 내 가슴 속에 사무쳤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제가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항상 마음에 뭔가 나를 꽉 누르고 있는 게 있었어요. 지금은 좀 가벼워지긴 했어도 아직 다 풀지 못한 거 같은 응어리가 있는데, 이 영화를 찍고 나서 좀 푼 것 같은 느낌은 있습니다.

 

신순애: 아니, 70년대엔 제가 울보였거든요. 맨날 다들 순애 언니 울지마,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미경이가 너무 울어가지고.(웃음)

 

임미경: 아니, 정말 언니는 그때 나이가 더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여기가 꽉 막혀있었어요. 이걸 뚫어야 되는데 그걸 계속 억누르고, 억누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후회는 하지 않는데 밤에 잠을 잘 때, 이걸 트라우마라고 하나 봐. 항상 뭔가에 쫓겨서 나를 누르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조금은 풀린 것 같아요.

 

 

홍순관: 바다에 다 풀고 가, 영화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오늘 오신 관객분들이 박수를 정말 더 많이 드리고 싶으실 거예요. 받으시고, 위로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질문을 지금 하고 싶었어요. 두 감독님께 이 영화를 만든 계기를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김정영: 저는 억울함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세상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 유명한 사람들의 역사나 성공한 사건들 위주인데요.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속에서의 맹아는 억울함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바탕 우리 영화로 다 풀었으면 좋겠고요. 9·9 사건을 영화로 담겠다고 했을 때, 어떤 분은 실패한 사건을 왜 하냐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당시 이분들이 사건을 겪을 때의 마음, 너무나 찾고 싶은 나의 동료와 후배, 이런 마음들. 선생님들의 인터뷰를 모은 게 진실이잖아요. 개인사가 모이고 그 말들이 맞춰졌을 때의 힘과 진실이라는 게 되게 놀라웠어요. 내가 인터넷에서 보아온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이분들이 직접 육성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큰 스크린에서 사람들이 많이 보게 해야되겠다. 그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이혁래: 제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건, 출연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슬픈 이야기이고 듣기 힘든 이야기긴 하지만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거든요. 제가 느낀 듣기의 즐거움을 관객분들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일 컸고요. 마지막 인사를 짧게 하자면, 물론 여기 오신 관객분들께 가장 감사를 드리지만, 우리 영화를 진정으로 완성해주신 분들께 관객분들의 양해를 구하고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출연진 선생님들, 아까 인사드리신 김치성 촬영 감독님을 비롯한 스텝 여러분, 이 어려운 과정에서 우리 영화를 홍보해주시고 배급해주신 영화사 진진의 대표님과 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홍순관: 포스터를 보니까 이런 게 있어요.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는 안부이게 홍보문구로 붙어있던데, 오늘 보신 관객 혹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을 해주시죠.

 

신순애: 저는요, 아까 이숙희가 이야기했잖아요. 재판 12. 말하자면 원고는 저희들이고 피고가 대한민국이에요. 법정에 가면 원고 나왔냐고 해서 우리들이 이름 써서 내고, 피고 대한민국 나왔는가 하면 그때 속으로 되게 웃겼거든요. 국가를 상대로 12년을 싸운다는 건 쉽지 않거든요. 저는, 공적인 거하고 사적인 거 하고 구분해서 사시면 좋겠다 싶어요. 그러니까 사적으로는 최대한 에너지를 뺏기지 말고 공적인 일에 에너지를 쏟아서 하시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임미경: 저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한 가지 길만 보고 가요. 이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면 누가 옆에서 흔들어도요. 정의가 살아있었으면 좋겠어요, 항상. 정의로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옳은 세상. 숙희 언니가 이제 다 이야기할 거예요.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세상이 될 건지.(웃음) 저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기니까 들어보세요.

 

이숙희: 오늘의 청춘에게 제가 말하기 좀 그런데요. 이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걸 늘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고요. 그리고 청춘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의 문제를 외면하면. 그 자리가 나빠지면, 내가 있는 청춘의 자리도 나빠진다는 거. 이렇게 좀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 해요. 예를 들어서 시다들을 괴롭혀서 돈 버는 사람은 사장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 시다를 괴롭히는 데에 재단사가 참여하는 경우가 있고, 미싱사도 참여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라고 정당성을 부여하겠지만 시다의 삶이 피폐해지면 미싱사의 삶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청춘의 것도 해결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전 세대를, 직종이 다른 분들의. 예를 들면 비정규직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문제에도 여러분들이 한 마디씩 힘을 보태주고 그들의 삶이 좋아지도록 해주시는 게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도 좋아지는 길이다. 지금 파리바게뜨의 임종린 지회장이라는 여성노동자가 지금 단식을 11일째 하고 있습니다. 노조 탈퇴하고 한국노총으로 가라고 강요하는 이런 회사, 연장 업무 제대로 계산 안 해주는 회사. 이게 파리바게뜨에 근무하는 제빵사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목소리들을 그렇게 모아서, 여러분들이 다 같이 힘을 내서 가면 저희들이 살았던 세상보다는 조금 더 좋은 세상에 여러분들이 살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홍순관: 말씀 고맙습니다. “역사는 현대사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역사도 현대사죠. 이런 영화를 통해서 거울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 주위도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영화사 진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요. 이렇게 멋있는 여배우 세 명을 알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고요. 귀한 장면들을 담아주셔서 두 분 감독님께도 진심으로 관객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도 이 늦은 시간까지 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주셔서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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