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 월례비행 10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글: 송효정 평론가
기지촌이었던 곳은 한때 과수원이 있던 배벌로 불렸지만 이후 죽어서야 그곳을 나올 수 있다는 뺏뻘로 불렸다. 간신히 남은 당산나무를 지나 영화는 이질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선다. 그곳엔 쓰레기와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잔해, 유령과 죽음이 배회하는 옛 기지촌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죽지 못하는 자, 죽어도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남겨진 속신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기묘한 울림의 내레이터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이야기될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죽음들이 도저한 곳 뺏뻘에서 여자 박인순이 이승을 헤매는 유령들을 찾으러 온 저승사자에 맞서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외형상 다큐멘터리를 표방했으나 재연 드라마, 허구적 각색이 뒤섞어 진실과 허구의 지위를 논쟁적으로 탐문하는 실험적 방식을 택했다. 영화는 ‘나’라는 화자가 전설 같은 옛 이야기를 전하며 시작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끝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려는 시도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첫 번째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의 국가 폭력 경험을 조사하는 구술 면담의 방식이다. 이는 인터뷰와 영상 채록으로 진행된다. 사실의 담론 구성을 표방한 인터뷰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 이 인터뷰는 허구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를 통해 박인순이라는 여성의 생애사의 편린들이 제공되지만 인터뷰이인 박인순이 보이는 비일관성과 기억 소실로 인해 인터뷰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박인순의 삶은 제도 속으로 편입될 수 없는 모순과 균열 속에 남겨져 있다.
다른 방식은 망자를 명부에 등록하는 저승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저승사자들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뺏뻘의 영혼들을 위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이야기를 만들어 주어야 저승에 데려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고아로 태어나 양색시가 되어 늘어나는 빚에다 고약한 포주와 폭력적인 미군에 고통받던 여성이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도 신파적이어서 믿을 수 없을 법하다. 그런 점에서 저승 사자들의 이야기 만들기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 두 가지 방식, 인터뷰를 통해 공식 기록에 등재하는 진실의 담론과 이야기를 통해 저승의 명부에 등록하는 허구의 담론 모두는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 아마도 이는 감독들이 왜 이처럼 기묘한 방식의 실험적 다큐멘터리에 접근해 가는가에 대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대조의 형식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텔레비전의 탐사프로그램이다. 박인순의 이야기를 고통의 이야기로 각색하고 슬픔과 동정을 소비하는 방식, 이는 너무도 천진한 악의성을 품은 생의 인위적 인과성의 각색일 것이다. 그와 가장 대조적인 지점에 박인순의 삶은 논리적인 언어로도 정서적인 언어로도 포괄될 수 없는 스키조의 파편적인 경험들로 뭉쳐져 있다.
무명씨들의 무덤 속에서 유령들이 솟구치고, 출입을 막는 쇠사슬엔 금줄인 양 한지가 묶여있으며 공간의 한 구석엔 부적도 달려있다. 저승사자들이 내려와 유령들을 데려다 아홉 고개 넘어 망자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매달 자궁에서 쓸려져나가던, 생의 첫 순간이 죽음이던 아이들. 맞아서 빚에 시달려 잔혹하게 모욕되어 시체로 죽어간 여성들. 이들이 아직 삶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기에, 영화의 형식은 이들을 저승으로 오롯이 보내는 진혼굿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갑고 산뜻한 리듬의 바흐의 음악과 끝까지 죽음(의 인격)마저 거부하며 이를 비웃듯이 낄낄대는 박인순의 최종적 표정에서 우리는 삶을 죽음의 영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 가짜라며 호언하는 삶의 기묘하고 처절한 몸짓과 소리를 마주하게 된다.
사실 여자는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 속에선 누구나 모두가 거대한 환영을 보고 있으므로. 영화는 담대하고 기묘한 에너지의 여성(들)의 삶의 증거를 어떠한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를 성찰하고 탐문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거대한 환상 앞에 있지만 때때로 영화의 진실은 이 장막을 찢고 홀연 돌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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