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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Review] 〈나를 구하지 마세요〉 : '시선을 맞춘' 구원에 관한 이야기

by indiespace_한솔 2020. 9. 22.







 〈나를 구하지 마세요〉  리뷰:  ‘시선을 맞춘’ 구원에 관한 이야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염정인 님의 글입니다




위기와 구원


사람들은 모두 살면서 무수한 위기를 겪어낸다. 대부분의 격랑은 금세 가라앉지만, 아닌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타자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보기도 한다. 내 삶의 운전대를 완전히 뺏긴 기분이 들 때면 구원자를 찾게 된다. 단절되고 고립된 순간, 누군가와의 연결은 간절하다. 정연경 감독의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구하는가 혹은,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업 실패로 아빠가 자살하자 남겨진 엄마와 딸 선유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다. 엄마가 딸을 죽이고 자살을 시도하는 충격적인 내용이지만, 관객들에게 경악스러움만을 남기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 소재를 특보로서 관객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특수한 사건으로부터 위기구원이라는 보편적인 키워드를 불러내어 관객을 극으로 끌어들인다. 남몰래 누군가로부터의 구원을 기도해 본 적이 있다면 선유는 완벽한 타자가 될 수 없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선유의 언어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외침이라기보다는 내면에 존재하는 파동에 가깝다.


선유는 어린 여자 아이이다. 그것도 위기에 처한. 많은 한국영화에서 선유와 같은 아이는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였다. 이들은 위기이자 고통의 상징으로 존재했으며 주로 히어로와 같은 성인 남성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모험했다. 하지만 <나를 구하지 마세요>에서 선유는 모험의 주체로 나서며 자신을 구하지 말라고 말한다. 선유에게 위기와 구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빠의 죽음 이후 선유와 엄마는 유흥가 한복판으로 이사한다. 서울에서 외곽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한다. 거리의 소음과 네온사인은 방 안까지 침투하며 선유의 삶을 괴롭히지만, 선유는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선유는 엄마의 칼질을 돕고 싶어 하고 종이접기로 방 안을 꾸밀 뿐이다. 선유는 주어진 현실 안에서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간다. 이러한 선유의 어른스러움의 이유는 가장 아이다운 정국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선유의 세계에서 정국은 부럽고도 의아한 존재이다. 선유는 정국이 아무것도 몰라서 부럽고 공부를 하지 않아 의아하다. 선유에게 공부는 필요 없는 사람 되는 거에 대한 불안을 해결해 주는 필사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국은 나는 내가 너무 필요하다고 답한다. 정국의 간결한 대답은 선유의 어른다움이 자신의 필요를 타자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아이의 취약함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는 내가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정국은 선유의 구원자로 등장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난 뒤 정국이 선유를 '구했는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정국은 극 중 거의 유일하게 선유가 원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선유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호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짝꿍이 자신에게만 주는특별하고 비싼 초콜릿은 거부했지만, 정국이 모두에게나눠준 초콜릿은 받았다. 정국은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하는지를 아는 아이였다. 수영장에서 숨을 참고 있는 선유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삶을 포기하려는 선유를 힘으로, 묻지 않고 구해내지 않았다. 정국은 물에 들어가 같이 숨을 참아줄 뿐이었다. 정국은 누군가를 돕는 일은 베풀기와 같은 행위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과정 역시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행위임을 기억하게 해준다. ,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선유의 말은 완벽한 진실도, 거짓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가일지도 모른다.





한편, 영화는 선유 엄마의 삶에도 구체적인 관심을 보인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뉴스로서 이해하면 선유 엄마는 단지 가해자로서 등장하겠지만, 영화는 선유 엄마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선유 엄마를 직설적으로 합리화하는 방식이라기 보단 선유 엄마가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상황을 제시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선유 엄마는 고깃집 서빙과 공장 노동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선유 학교까지 찾아가 아빠의 보험금을 묻고 자신에게 아들의 죽음을 원망하는 시어머니를 두고 있다. 또한 그나마 안부를 묻고 살던 친구마저 떠난다. 성실히 노동했지만, 전기세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고립되어가는 선유 엄마는 사회에 대한 불신도 컸다. 정육점 아저씨가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자 엄마는 강하게 반응하며 선유에게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경고한다. 선유 엄마의 서사는 어쩌면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단지 어떤 도덕성에만 기댈 수 없는 삶의 환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건에 대해 책임을 묻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담담하게 선유가 세계와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선유의 세계에도 봄날이 올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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