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소녀> 한줄 관람평
김정은 | 남겨진 사람들과 얼룩진 감정들을 관조하다
주창민 | 죽음의 이유, 그 공란에 새겨지는 지독한 염세
승문보 | 검은 물결에 일렁거리는 인간성
권정민 | 무정한 세계에 내던져진 불온한 인간들
<죄 많은 소녀> 리뷰: 무정한 세계에 내던져진 불온한 인간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권정민 님의 글입니다.
대체 소녀는 무슨 짓을 했기에, 제목조차 <죄 많은 소녀>일까. 그러나 영화를 보면 이 영화가 소녀의 ‘많은 죄’가 아니라 ‘죄’와 ‘많은 소녀’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중에는 많은 소녀들, 그리고 많은 어른들과 그들 각각에게 주어진 다른 방식의 죄가 등장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단죄하려 들며, 또 누군가는 속죄하려 한다. 그들 모두는 죄에 사로잡혀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로에게 한없이 무정해진다.
<죄 많은 소녀>는 지난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과 올해의 배우상을, 제32회 프리부르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제51회 시체스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는 등 국내외로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리고 김의석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의 공식 개봉 전인 지난 9월 10일, 김세윤 작가는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죄 많은 소녀>를 “굉장한 힘을 가진 영화”라고 소개했다. 작가는 <죄 많은 소녀>의 음악감독으로도 참여한 선우정아의 ‘여정’이라는 곡을 틀어주며 가사의 내용이 영화의 주인공 영희가 말하는 이야기 같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이런 가사로 시작된다.
누구도 우릴 구원할 수는 없어
어릴 적부터 나는 다 알았네
<죄 많은 소녀>는 미스터리의 외피를 입은 처절한 심리극이다. 명과 암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장면 전환, 모노톤의 싸늘한 색감과 시종 불안하고 불온한 인물들의 눈빛, 거기에 기이하고 몽환적인 사운드까지 더해진 단단한 외피로 관객들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영화의 끝까지 끌고 간다. 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 경민이 실종되고,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는 경민의 실종(자살)에 대한 직간접적인 가해자로 치부된다. 영희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죄의식과 분노, 억울함에 매몰되어 자신의 결백함을 밝히려 발버둥친다. 이 지점부터 영화가 천착하는 것은 ‘경민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경민이 죽은 후 주변인들이 어떻게 부딪치는가’이다. 영화의 영문 제목인 'After My Death'는 이러한 화법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죄 많은 소녀>는 상실이라는 사건을 빌어 인간을 폭로하는 이야기이다.
조각난 사람들아, 무리지어가자
달아나는 척이라도 하자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영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악역으로만 소비될 수도 있었던 다른 동급생들에 대한 다면적인 묘사도 눈에 띈다. 초반에 영희를 괴롭히던 친구 역시 사실은 경민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해서 희생양을 물색해내는 나약한 인물이었고, ‘네가 안 좋은 기운을 전염시켜 경민이를 그렇게 만든 것 아니냐’는 물음을 무심하게 던지던 친구는 어느새 영희의 편에 서서 항변하며, 영희를 배신한 줄 알았던 친구는 사실 그 누구보다 영희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인물들은 서사를 풀어나가는 유용한 도구들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할 법한 복잡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쓸모 없는 인간들이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무게 역시 다르다.
극중 어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로 그려지는데, 그렇기에 오히려 작위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친구를 잃은 아이들에게 와서 ‘내가 교사 생활 20년 하면서 자살을 네 번 봤다. 6개월이면 다 잊는다. 결국 공부하지 않는 놈만 도태되는 거다’라는 말을 하는 주임교사 하며, 원칙에 충실할 뿐인 사무적인 형사, 학생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담임교사,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교장,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아이를 잃고 다른 아이를 추궁하는 어머니까지. 이 모든 인물들이 합쳐져 하나의 현실이 생겨나고 익숙한 지옥이 구성된다.
영화는 인물뿐 아니라 그 인물들이 서 있는 공간에도 현실성을 재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 있을 법한 인간들을 배치해 두고, 모두에게 익숙한 상황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아주 길게 등장하는 경민의 장례 장면이 그렇고, 아이들이 살아가는 소사회인 교실의 풍경이 그렇다.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은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이다. 영화에서 (현실과 다른)과장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은 딱 두 군데인데, 한 군데는 앞서 말한 레스토랑이고, 다른 한 군데는 경민이 죽기 전 통과하는 (마치 황천길로 이어진 동굴과 같은)어두운 굴다리 안이다. 죽음의 장소로 이어진 새까만 굴다리와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찬 하얀 레스토랑의 대비가 삶과 죽음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살기 위한 공간에서도 죽음을 좇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너는 나를, 그리고 난 너를
우리는 서로를 버리며 사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영화의 오프닝에 대해 생각해보자. 첫 장면은 영희의 수화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언어이다. 그때 관객들은 극중의 반 아이들, 즉 영희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변인들과 같은 불이해를 체감한다. 어련히 ‘그런 말이겠거니’하고 넘기고 난 후, 한참 뒤에야 비로소 소녀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영화의 첫 장면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불이해, 불화합, 고통스러운 관계, 그 속에서의 단념과 체념, 그리고 오만에 대한 극적인 우화이다.
아이들-경민과 영희-이 왜 앞다투어 죽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영화에서는 정확한 이유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말미의 레스토랑 장면에서 감독은 영희의 입을 빌어 말한다. “경민이가 이유를 말해줬다. 그런데 그게 너무 이해가 되어서,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두 소녀가 굴다리를 건널 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어차피 굴다리 안에서의 자세한 전말을 설명할 의지도 없으면서 ‘이유를 말해줬다-그게 너무 이해가 되었다’는 이 일반적인 대사를 굳이 내뱉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이미 2시간 동안 모든 이유를 보여주었다. 학교, 소녀들, 어른들, 더 나아가 한국이라는 무정하고 비통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불온함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한국인의 자살과 우울증은 이미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특히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보다 3배나 높다. 이 통계 결과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니 이 무정한 세계 안에서는 굳이 자살의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경험으로 이해한다’. 그럴 수도 있었다, 고 스스로를 회상한다. 모두가 알고 있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한 채 그저 통과했을 뿐인 어떤 ‘지나간 세계’를, <죄 많은 소녀>는 말미에서 ‘어른들’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경민과 영희의 ‘이유’를 관객들이 경험으로 이해한다는 점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잔인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 많은 소녀>를 단순히 죄의식에 대한 영화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회귀이고, ‘그럴 수도 있었던’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이상하고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일종의 성찰이기도 하다.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성감독이 만든 여자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종류의 비판에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특히 동성 친구들을 성애적 관계로 집요하게 묘사하는 것과 여학생이 남교사를 거짓 성추행으로 고발했다가 들통나 혼나는 장면 등 관객으로서, 특히 그 시절을 거쳐 온 여성 관객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과도한 설정이나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시선에 대한 의문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지점들을 감안하고서라도 <죄 많은 소녀>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나겠구나, 싶은 지점에서 영화는 한참을 더 나아가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영희의 마지막 대사를 듣는 순간, 영희의 돌아보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관객들은 러닝타임 내내 붙잡혀 있던 것에서 풀려나 익히 알고 있는 무정한 세계로 내던져진다. “이유를 말해 줬는데, 너무 이해가 되어서 도저히 말릴 수가 없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상황은 역전된다. 경민의 어머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고 물리는 굴레 안에서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스스로 속죄하며 참을 수 없는 불이해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지옥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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