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블랙> 한줄 관람평
김정은 |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집요한 분석
주창민 | 영화는 하나의 기록물이 되어 망각에 저항한다
승문보 | 끝나지 않은 악의 연대기
박마리솔 | 빙산의 일각을 위한 집요함
권정민 | 누군가는 꼭 해야 했던 이야기. 재연과 설명을 적절히 이용한, 잘 만든 다큐멘터리.
<더 블랙> 리뷰: 영화는 하나의 기록물이 되어 망각에 저항한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주창민 님의 글입니다.
우리의 지금은 과거와 다른가?
영화는 언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시기 언론의 행태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마비된 모습이었다. 정치색이라는 거름망으로 기사들이 걸러졌고, 사회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저널리즘영화 또한 블랙리스트 범주에 묶여 상영금지명령이 떨어지거나 제작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진흙탕 속에서도 언론을 대신하여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저널리즘영화는 문제 본연을 향한 관음의 욕망을 동력 삼아 과거를 네모난 스크린으로 불러와 재구성한다. 이 행위에는 망각을 거부하고 사건을 상기시키려는 힘이 있다. 계속해서 가라앉는 굴레에 위치하고 있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외친다. “우리의 지금은 과거와 다른가?”
이마리오 감독도 항상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불합리하고 모순덩어리인 한국 현대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응시한다. 이 깊은 응시는 사건을 파헤치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각인된다. 감독은 <주민등록증을 찢어라!>(2001), <미친 시간>(2003),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2006) 등의 영화들을 통해, 그리고 강릉 일대에서 진행하고 있는 액티비즘 다큐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현대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 블랙>도 마찬가지다. 다큐멘터리 연구자 이승민이 언급한 것처럼 <더 블랙>은 “망각에 맞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마리오 감독의 작품세계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리오 감독은 더 세련되고 진중한 태도로 10년 만에 돌아왔다.
2013.12.31.
영화는 ‘이남종’이라는 한 개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무엇일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답을 찾기 위해 굳게 닫힌 오피스텔 607호의 문을 열고 과거를 소환하고 기록하기 시작한다. 대선을 기준으로 타임라인이 구축되고 본격적으로 국정원 대선 개입 공작이 전시된다. 박근혜-국정원-경찰 그리고 배후세력 등 다소 기울어진 싸움판에서 카메라는 기민하게 반대위치를 그려내고, 말 그대로 ‘어두운 자’들을 비추기 위해 움직인다. 국정원 대선개입 공작의 흔적과 경찰들의 디지털 포렌식 작업은 수많은 텍스트와 현장 촬영영상으로 스크린에 기록된다. 당시의 녹취록, 영상, 인터뷰 등은 다시 재배열되고 대량의 텍스트와 함께 섞이며 점점 숨겨져 있던 진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고발이나 음모를 제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감정적인 배격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을 정확히 바로잡기 위함이다.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다시 기록되는 과정과 더 나아가 지난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다. 결과적으로 당시 국정원 대선개입 공작은 인정되지 않고 박근혜는 대선에서 승리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그 기점부터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가려져 있던 이면에 더욱 깊게 파고든다.
‘챕터 3. 검찰 특별 수사팀’의 서막, 인터뷰를 진행하던 카메라 앞으로 ‘검사X‘가 등장한다. 검사X는 실제 인물이 아니다. 그동안의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기반으로 하여 형상화된 재연배우이다. 보통 다큐멘터리에서는 재연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기 마련이다. 재연이라는 것은 결국 감독이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더 블랙>에서 매력적으로 사용된다. 배우의 연기는 검사의 이미지와 들어맞고 특유의 연극 호흡은 재연된 공간에 우리를 끌어당긴다. 재연은 타임라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X검사)의 시선을 통해 펼쳐진다. 육체화된 언어를 거쳐 윤석열 검사, 국정원 직원 등 인물들이 그려지고 그동안 감쳐줘 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재연을 통해 일종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다. 진실을 왜곡시킬 위험의 요소가 있는 재연의 방식이 오히려 사건 경위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거리를 두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준다. 대상화된 사건은 그렇게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다.
두려움 그리고 ‘이남종’
뿌연 안개 속에서 우리는 외면했던 진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검찰의 우두머리도 쉽게 해체해버리는 힘. 윤곽조차 그려지지 않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고 이남종 씨도 이 무력함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국정원 대선개입 공작의 기록이 막바지에 이르자 감독은 검사X에게 이남종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며 다시 그를 불러낸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무엇일까?” 처음으로 돌아와 묻는 질문. 영화 전체가 이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더 블랙>이라는 재구성된 기록물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검사X가 말한 것처럼 그의 죽음은 촛불 혁명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국정원 대선개입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언론마저 무시했던 익명의 한 대상은 모든 두려움을 혼자 가지고 가려던 열사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용기 있는 한 분신의 작은 불씨는 결국 촛불 혁명까지 이어졌고 정권은 바뀌었다. 또한 국정원 대선 개입공작에 대한 재수사도 진행 중이다. 어쩌면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이라도 <더 블랙>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문제의 전말은 시간에 따라 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계속해서 새로운, 아니 비슷한 사건들로 대체될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 것인가. 우리는 이 영화를 책갈피 삼아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감독의 전작 <미친 시간>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이 난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과거를 다시 경험하도록 단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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