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식하는 방법 <소공녀>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5월 30일 오후 7시 40분 상영 후
참석 전고운 감독
진행 이요섭 갑독 (<범죄의 여왕> 연출)
*관객기자단 [인디즈] 윤영지 님의 글입니다.
오랫동안 미소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사는 삶은 간단하고 어렵다. 그것은 선택이 필요한 일이었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선택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마다 <소공녀>의 ‘미소’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공녀> 전고운 감독과의 인디토크가 이어졌다. 진행은 <범죄의 여왕>(2016) 이요섭 감독이 맡았다.
전고운 감독 (이하 전고운): 안녕하세요. 방금 보신 <소공녀>를 연출한 전고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소공녀가 개봉한 지 두 달이 되어서 이렇게 많이 와주실지 몰랐는데, 너무 감동스럽네요.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고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요섭 감독 (이하 이요섭): 요즘 감독님이 가지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전고운: 많은 분들이 <소공녀>가 끝난 줄 아시지만, 사실 저는 계속 지역을 돌아다니며 극장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개봉 때만큼 개봉 이후도 은근히 바쁘더라고요.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어 딱히 화두라고 할 것은 없지만, 제겐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늘 주된 관심사고, 하고 싶은 재미있는 여성 캐릭터가 떠올랐을 때 가장 뜨거워지는 것 같아요.
이요섭: 그렇다면 최근에 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좋게 본 여성 캐릭터가 있나요?
전고운: 최근 작품은 아니지만 좋아하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를 최근에 다시 봤어요. ‘금자씨’도 전대미문의 여성 캐릭터지만,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가 너무 좋은 캐릭터들이라 흥분하며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의 주연 배우 샐리 호킨스를 원래 무척 좋아하는데요,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해피 고 럭키>(2008)의 여성 원탑 캐릭터 정말 좋아하고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요섭: <소공녀>는 훌륭한 완성도의 좋은 영화지만,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다시 한 번 찍고 싶다’ 하는 장면이 있나요?
전고운: 저는 후회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사실 방금 주신 질문은 마치 ‘다시 태어나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가’와도 같은 맥락인 것 같은데, 뭐 그렇다면 유럽을 말하겠죠. 그렇다면 유럽 영화처럼 찍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의미 없는 질문인 것 같아요. 다만 눈이 많이 내리는 장면을 찍고 싶긴 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서, 그것이 조금 한이 되긴 하네요.
이요섭: 왜 눈을 담고 싶었는지, 주요 배경이 겨울이었는지 궁금해요.
전고운: 일단 제가 겨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독주(毒酒)를 마시잖아요. 추운 나라에서 보드카를 마시는 것처럼요. 또, 제 생각에 <소공녀>의 미소가 살고 있는 나라가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직접적으로 목숨에 위협이 오는 계절이니까요. 이런 상징성도 있고, 눈이라는 것 자체가 클리셰고 뻔한 측면이 있지만 영상에서 줄 수 있는 특별한 아름다움, 마법 같은 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겨울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이요섭: 감독님이 촬영 당시 눈이 녹을 때마다 한숨을 쉬던 것이 생각나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늘 강진아(문영 역) 배우와 함께 였는데요, 강진아 배우를 문영 역으로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함께한 작업이 어땠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전고운: 강진아 배우는 단편을 늘 함께 해온 배우이기도 하고, 저와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소공녀>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나리오,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눴어요. 고민을 많이 나누는 친구여서 평소에 여배우로서 강진아 배우의 고민에 대해서도 많이 듣습니다. 여성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캐릭터 수 자체가 적잖아요. 더욱이 강진아 배우에게 들어오던 역할은 그 중에서도 피해를 당하는 여성, 착한 여성 등 폭이 좁았고, 그런 식으로 소모되고 소비되는 것에 지쳐있었어요. 새로운 캐릭터를 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죠. 그래서 <소공녀>에서 딱딱하고 한 편으로는 얌체 같은, 일반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정말 열심히 해주었어요.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좋고요. 언제나 좋고 반가워요.
이요섭: 아무래도 그간의 GV에서 이솜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다른 배우분들에 대한 질문을 조금 더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용 역 이성욱 배우의 경우 평소에 무섭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로 많이 등장하잖아요. 극 중 대용의 경우 섬세한 면도 있고 울보이기도 한데, 이런 새로운 면을 어떤 식으로 캐치해서 함께 작업하게 된 건가요?
전고운: 일단 이성욱 배우가 <범죄의 여왕>에서 무서운 역할을 맡기도 했죠. 강진아 배우가 이성욱 배우님을 추천했고, 저도 워낙 잘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믿고 캐스팅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대용과 다른 모습이 많아서 조금 힘들어 한 부분도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결국엔 해내시더라고요. 배우들은 결국 기본기가 되어있고 열심히 하는 분들은 믿어주면 제가 원하는 그 이상을 보여주는 사람이구나, 경험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요섭: 그렇다면 왜 대용을 미소보다 동생으로, 또 극 중 밴드의 막내로 삼았나요? 실제로도 이성욱 배우가 더 나이가 많고 인상도 강한 편이잖아요.
전고운: 배우가 캐스팅 된 이후에 제가 그분들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면 그 캐릭터의 '엣지'를 올려줄 수 있을까?’인 것 같은데, 이성욱 배우가 캐스팅 된 이후 대용 역에 대해 열심히 고민해 본 결과, 막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 제가 동안과 노안 같은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얼굴을 보고 나이를 짐작하는 거요.
이요섭: 개인적으로 현정 역의 김국희 배우를 보며 가장 큰 위로를 받았어요. 현정의 눈빛이나 우는 장면을 통해서요. 김국희 배우 역시 여쭤보고 싶습니다.
전고운: 연극계에서 이미 유명한 분이에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고 만나 뵈었는데, 첫 미팅에서 대본을 읽지 않고 즉흥 연기를 해봤어요. 그때 김국희 배우의 연기를 보고 제가 울었거든요. 그것이 잊히지 않았어요. <원라인>(2016)이라는 영화에 잠깐 나오고 <소공녀>가 두 번째 영화였어요. 연극과 다른 영화의 메커니즘을 계산하는 데에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우는 장면은 제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몰입하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너무 감사했고 즐겁게 작업했어요.
관객: 미소의 머리카락을 점점 흰머리로 변하게 한 이유가 있나요?
전고운: 이것도 캐릭터의 엣지입니다.(웃음) 시각적으로 보일 수 있는 특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아요. 미소가 엔딩에서 백발이 되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처음부터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어떻게 개연성 있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차에 '광화문시네마' 김태곤 감독의 아이디어도 있었고, 한약 잘못 먹으면 새치가 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거기서 영감을 받아 새치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미소 캐릭터와도 잘 맞았던 것 같고요. 낙인 같기도 하고 독특하고 본의 아니게 이솜 배우 덕에 스타일리시 해지기도 했고요. 미소만의 작은 엣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관객: <소공녀> 첫 관람 때 위로를 많이 받아서 재관람하러 왔습니다. 미소의 직업을 가사도우미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고운: 이야기 내에서 여성이 가장 구하기 쉬운 일용직이 가사도우미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젊은, 미소 같은 친구가 가사일을 하면 엣지가(웃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청소라는 일이 전문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나 잘 할 수 없는 일이고, 많이 해봐야 체계적일 수 있는 좋은 기술이고요. 그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는 것이 싫었고, 또 남에게 안락한 무언가를 제공한다는 특징이 미소의 성격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가사도우미로 설정했습니다.
관객: 영화 속 작은 소품, 단역 캐릭터들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쓴 것이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록이의 집에서 자고 일어난 미소가 이불 밑에 넣어두었던 양말을 꺼내 신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런 일상생활 속의 섬세한 연출은 어디서 찾는 건지 궁금합니다.
전고운: 정말 디테일한 지점까지 봐주셨네요. 사실 저는 그렇게 섬세한 성격은 못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떠올리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은 넣어놓고 제가 보며 혼자 만족하는 부분인데 알아봐 주시니 너무 반갑고 기쁘네요. 양말 같은 경우 스태프 분의 모습을 보다가 떠올라서 현장에서 넣었고, 미소의 캐릭터 상 양말을 예의 바르고 정갈하게 아랫목에 넣어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관객: 독립영화를 극장에 와서 관람하는 게 처음인데, 너무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소공녀>라는 제목을 어떤 의미로 붙인 것인지 여쭤보겠습니다.
전고운: 제목을 두고 고민하던 중, 시나리오를 읽어 본 친구가 소설 '소공녀' 속 세라를 떠올리게 해주었어요. 세라는 부유한 환경에서 한순간에 하녀가 되는 인물인데, 하녀 시절과 제가 표현하려던 미소가 닮아있어서 그렇게 설정했어요. 원래 하고 싶었던 제목은 영어 제목인 'Microhabitat'이었던 것 같아요. 미소서식지(미소생물이 서식하는 특유의 다양한 환경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 의미고, 주인공 이름 미소가 미생물의 미소거든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서 <소공녀>라는 쉽고 간결한 제목을 선택했습니다.
이요섭: 그 단어는 어떻게 찾았나요?
전고운: 책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인문학 서적을 보다가 ‘Microhabitat’이라는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도시는 너무 과열되고 삭막하고 공간도 부족하다 보니 살아남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한 인간에게 공간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운동이 ‘Microhabitat 운동’이라고 하더라고요. 사람이 한 사람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자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도시라는 공간에서는 특히나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담긴 것이 <소공녀>였고, 그래서 Microhabitat에서 ‘미소’라는 이름도 따왔던 것 같아요.
관객: 미소가 현금을 금고에 보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고운: 이쯤 되면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엣지입니다.(웃음) 그런데 무책임하게 엣지만 심어놓은 것은 아니고요, 제가 설정한 미소의 전사가 원래는 작은 회사를 다니다가 당당히 그만두고, 모았던 돈으로 푸드트럭을 운영했다는 것이에요. 그때 쓰던 금고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관객: 미소가 친구네 집에 방문할 때 집의 크기가 단계적으로 점점 커지더라고요. 그 이유가 궁금하고, 친구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달걀을 선물하는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전고운: 제가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이야기 흐름을 짜다가 무의식 중에 그런 식으로 열거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미소가 거쳐가는 친구들의 상황을 사실 큰 고민 없이 단계를 밟아가는 느낌으로 하다 보니 그들의 여건이 조금씩 나아지는 순서로 이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달걀보다 실용적인 선물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싸고 사람의 에너지를 채워주니까 달걀이 적당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공녀>와 미소를 오랫동안 생각한 사람이 나 하나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디토크를 마치고 극장에 모인 관객들과 전고운 감독은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공녀>라는 영화는 관객에게, 관객은 감독에게, 또 함께 모인 관객은 관객에게 서로를 통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미소서식지가 되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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