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보이즈한줄 관람평


송희원 | 현실은 기(승전)결, 우리만 아는 승전

이현재 | 타인의 진지를 비웃지 마라

이지윤 | 허기가 도는 세상, 빛나는 꿈

최지원 |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김은정 | 온 몸으로 흔들기






 <델타 보이즈> 리뷰: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델타 보이즈>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톤으로 네 남자의 대책 없는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분명 남성 사중창 콘테스트에 도전하는 이야기임에도 ‘도전 해볼까’로 시작해서 ‘제대로 해보자’로 넘어가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대로 노래를 연습하는 과정은 영화 후반부에야 등장한다. 심지어 이렇다 할 배경음악도 없다.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도전을 해내고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마음먹는 과정이 얼마나 지지부진한지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때문에 (공연을 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공연 전 마지막 연습 이후의 이야기는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의 박수소리만 사운드로 삽입될 뿐이다. 도전의 시작, 노력하는 과정, 결말이라는 순차적 구조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의 고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네 남자는 생각보다 능력이 없어서, 이미 여러 번 실패해서,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아서, 아내가 반대해서 등의 이유로 영화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짜증이 치미는 현실에 그들은 고함치고 주정부리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인물들의 공통적 ‘대책 없음’은 <델타 보이즈>의 단점이기도 하며 원동력이기도 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인물들이 굳이 도전을 계속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장사를 뒤로 한 채,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닌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하고 있던 생선가게와 공장을 그만두고 (잘 하지도 못하는) 사중창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자학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흘러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즉 영화는 어떤 도전을 할 때, 확신을 가지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한심해하고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획득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신화적으로 꾸며진 모험담, 꿈의 도전기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후반부에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 노래한다는 ‘대용’의 대사가 있는데, 이를 들은 ‘일록’은 더 큰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의 모험담에서는 대용의 희망찬 대사가 그 자체로 희망적인 것으로 읽히겠지만 <델타 보이즈>에서는 대책 없는 해맑음으로 읽힌다. 게다가 일록의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공들인 탑이 완성되기 직전에 무너지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희망적인 대용의 말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책 없음’은 분명 영화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다. 성인 남성 넷이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해서 고함을 지르고 현실적인 고민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노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장면들이 일으키는 반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인물의 강력한 캐릭터성과 무식한 고군분투는 독특하고 생생한 활기를 띠게 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주인공들의 지친 모습, 미성숙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희망적 메시지까지 담아내고 있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솔직하고 단순한 이 중창단 도전기는 어쩌면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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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한줄 관람평


송희원 | 먼 이국땅에서 펼쳐지는 여성들의 강인한 삶과 노래

이현재 | 잊혀진 꿈의 악보

박영농 | 고려(빼어날 고, 아름다울 려)의 아리랑

최지원 | 가락으로 전해지는 한의 정서와 감동

김은정 | 역사 한 켠, 여전히 노래하는 고려인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리뷰: 잊혀진 꿈의 악보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사진 하나가 투사된다. 오래된 사진을 처음 본 관객은 그 사진이 전달하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정지된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흘러 나와 그 사진에 대한 정보를 추측가능하게 만든다. 내레이션은 한국에서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쫒긴 그들의 기구한 기원을 짧게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되면 카메라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걷는다. 다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고통스러운 이주를 전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고려인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당도한다. 다시 내레이션은 그들이 처음 연해주에 도착하여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움집을 파고 살았던 시절을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 될 즈음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념비 위에 무희로 보이는 여인의 사진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제야 내레이션은 영화가 다루게 될 대상이 고려극장,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누구인지를 서술한다. 이상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이하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이다.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은 정해진 대상을 다루려고 하는 다큐멘터리로서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정보를 전달하는 쪽은 이미지를 돕고 있는 내레이션에 가깝다. 그렇다고 내레이션이 이미지들을 정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프닝임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내레이션은 선형적인 시간을 따라가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전달하는 정보의 시간대는 고려인의 기원이 된 러시아의 황망한 땅에서 고려인이 겪었던 이주의 시간으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황망한 땅으로 돌아간다. 회귀한 곳에서 내레이션의 서사는 다시 고려인들의 본격적인 삶의 터전이 된 중앙아시아로 비약한다. 정리되지 않은 내레이션은 이미지들을 한 곳에 묶지 않고, 묶이지 못한 이미지들은 벌어진 사태나 인물의 초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시퀀스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영화는 고려극장의 공연 장면이나 이함덕과 방 타마라의 노랫소리 혹은 풍경과 자료가 오버랩 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 열리고 닫힐 때 제시되는 사운드나 이미지가 시퀀스에 제시된 형상을 정리하거나 정보들을 좌표에 지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고려인들에 대한 김소영 감독의 시선이나 고려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접고 펼치는 기능을 한다. 이 기능이 형성하는 것은 고려인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떠돌고 이산되어야 했던, 그들이 걸어온 궤적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정돈하고, 나아가 고려인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일종의 거울이 된다. 영화는 정보를 좌표로 지정하지 않는 대신 유동적으로 조응시켜 그들이 왜 한국이 아닌 연해주를 그리워했는지, 어딘가에 정착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인지, 그들의 노래가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복원한다. 이 리듬으로 인해 영화는 고려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적 아카이브라기보다는 고려극단의 노래를 기준으로 정보를 정리한 일종의 악보와도 같다.





여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사명이라면, 흘러나오는 영화는 과연 지금 시점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제시되고 있는 ‘악보’는 적절한 재현인가? 이는 결국 복원의 기준은 왜 리듬이어야 했는지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이 영화가 악보였어야만 하는 이유를 언뜻 찾을 수는 있다. 영화의 초반, 방 타마라가 (우리가 보았던) 고려극장의 공연영상을 보고 난 뒤 “나는 이 영상을 처음 봐요. 제 젊은 시절을 되돌려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영상의 주인공을 본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시간이 중첩되는 순간을 관람을 통해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다분히 체험적인 순간이지만, 방 타마라 본인에겐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받는 회귀의 시간이다.


이러한 회귀는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에 나오는 이함덕의 모습이 투사되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하게 형상화된다. 보는 이는 없지만, 투사되는 영상은 그 곳에 한 때 희망을 품고 왔던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제의이다. 이 제의는 잃어버린 역사를 마주한 이가 그것에 시선을 던지는 가장 적합한 태도이다. <고려 아리랑>은 자신만의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헤르메스가 되고 있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오버랩 된 영상과 자료들은 장소들을 움직이고 교통하게 만들고 중첩시키는 수행자로서 작동한다. 고려인이라는 망명자를 찾아 떠난 카메라는 그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영원히 떠돌 뿐이다. 이 떠돎의 상태는 고려인들이 처한, 그리고 처했던 ‘현실’과의 결연이며 이 현실은 본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자 최종적인 지향점이다. 결국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리듬만을 남겨놓아 자료를 ‘떠돌 수 있게’ 만든 것은 본 다큐멘터리가 수행하는 수사의 기반이자 윤리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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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제인한줄 관람평


송희원 | 비관과 희망의 뉴월드

이현재 | 구교환의 '제인'은 올해의 캐릭터

박영농 | 제인입니다

이지윤 |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여기, 뉴월드에서.

최지원 | 시시하고 불행한, 거짓말과 꿈이 덧칠되는 삶

김은정 | 불행과 함께 살기






 <꿈의 제인> 리뷰: 불행과 함께 살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소현은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배워본 적도 없고 아무도 알려줄 생각을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항상 함께 모여 있다. 즐거워 보인다. 소현만 빼고. 아주 처음, 그 시작에 놓여있었을 때, 모든 것은 신비롭고 자극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불행과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불행이라는 자극에는 쉽사리 익숙해 질 수가 없다. 그것은 비슷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비틀어 예상치 못한 곳을 아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이라는 것은 일견 다르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에 환호하게 된다. 불행에 더 예민한 방식으로 설계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비슷한 정도의 행복과 불행이라는 자극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행복에 익숙해져버려 더 이상 이것이 가져다주는 자극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불행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해 또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설령 비슷한 정도의 불행과 행복이 우리에게 닥친다하더라도 다르게 반응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비약하여 연민을 얻고자하는 오묘한 심리를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이는 일견 불가피해보이는 인간의 특성인 것이다.  





소현은 굉장히 소모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 말인 즉 주변의 인물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소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의 인물들이 자신을 떠나가게 만든다. 소현을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정호도 말없이 떠나고, 소현에게 다가왔던 지수도 떠나고 만다. 심지어 꿈의 제인마저도. 그러나 소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제3자로서 소현에게 공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극 속 인물의 입장으로서 그에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은 경멸스러웠고 언뜻 순진해보이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들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범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 속에 섞이고 싶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눈물을 보이는 것도 자신이 또 다시 실패하고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말았다는 실망감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다. 소현이 그렇게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외톨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과 그가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느껴질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은 어느 것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헤어날 수 없는 딜레마와 같은 것이다.





소현은 꿈을 꾼다. 끔찍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함인지 현실의 사건들을 조금씩 비틀어버린다. 그 곳에서 제인은 새로운 ‘가출팸’의 엄마로, 지수, 쫑구, 대포는 그의 식구들로, 바에서 일하는 주희는 쉼터의 자원봉사자로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소현이 받아들일 수 있고 소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소현은 정호와 헤어진 모텔로 찾아가 자살시도를 한다. 소현은 말한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그 때 제인이 그 방으로 들어온다. 그런 존재가 제인이다. 현실에서도 제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소현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슬픈 눈빛을 마주쳤을 때, 소현에게 말했다.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야.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학생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부모의 그늘 아래서 고민 같지도 않은 것들을 고민하며 산다. 학생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존재에게 부모가 없다면, 그 그늘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추락할까?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만다. 어떤 단어에 따라오는 보편적인 이미지. 그것이 마치 세계의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듯한 거대한 착각. 그러나 가끔씩 우리에게 이렇게 일러주는 메시지가 없다면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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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입니다한줄 관람평


송희원 | 사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시민들의 이야기

이현재 | 노무현을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가끔, 딱 그리운 만큼 그가 무서워질 때가 있는 것이다.

박영농 | 꿈의 무현

이지윤 | 그저, 노무현입니다

최지원 | 한 사람을 기억하는 예의

김은정 |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 실로 놀랍다.







 <노무현입니다> 리뷰: 안녕하세요, 제가 노무현입니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그리움’이란 상실한 대상에게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수많은 저작물과 연달아 흥행하는 영화를 보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는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100만을 돌파할 만큼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다룬 영화는 이미 몇 편 나왔다. 그가 변호를 맡은 1980년대 부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2013)과 2000년 부산과 2016년 여수에서 각각 출마해 낙선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 백무현 후보의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2016)가 대표적이다. 이 두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노무현입니다>에서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던 노무현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영화는 2002년 2월에서 5월까지의 민주당 경선의 여정을 되짚는다. 노무현은 2000년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타파, 동서화합을 이루겠다며 부산 북·강서을로 내려가 낙선한다. 대의를 위해 당선 가능성이 낮은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한 그를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부르며 응원했고 결국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노무현은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200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쟁쟁한 후보들 곁에서 지지율 2%로 꼴찌였던 노무현은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제 방식을 통해 대선주자가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상 깊은 연설과 자발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돕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는 노무현의 명연설 장면들과 그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경선 당시의 역전극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다. 





<노무현입니다>는 크게 ‘노무현은’, ‘노무현과’, ‘노무현의’, ‘노무현을’이라는 제목이 붙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장마다 영화를 상당수 채우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일대일 인터뷰다. 인터뷰이는 총 39명으로 이화춘 전 정보국 요원과 노수현 전 운전기사, 유시민 작가, 안희정 충남도지사, 문재인 대통령, 노사모 회원들이 등장한다. 가까이서든 먼발치에서든 그를 지켜봤던 사람들은 사적인 일화들을 들려주며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증언한다. 인권변호사 시절 자신을 감시한 정보국 요원과도 친구가 된 일화와 운전기사의 결혼식 날 차를 대신 운전해준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영화는 이러한 다양한 증언들을 들려주며 ‘노무현은’, ‘노무현과’ 같은 미완의 문장을 관객 각자 스스로가 완성해 갈 수 있게끔 유도한다. 장의 제목은 관객에게 일종의 열린 형식의 질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추억을 환기하고 그리움에 사로잡힌 상황만을 전개하지 않는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습도 배치한다. 감독은 그들의 성숙한 참여의식을 보여주며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노무현’이라고 말한다. 보수 언론의 색깔론, 지역주의 프레임을 정면 돌파하며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도와주십시오”를 단호하고 힘 있게 외쳤던 노무현. 계파도, 당내지지 기반 세력도 없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대선 후보로 만들어낸 시민들 모두 ‘노무현’이다. <노무현입니다>은 노무현과 시민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를 복기하는 수많은 영상물과 자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왜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쉬이 보내주지 못할까. 그 이유를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대신하고자 한다. "떠나보내려고 해서 떠나보내지는 게 아니다. 떠나보낼 때가 되면 저절로 떠나가는 거다. 노무현에 대한 애도가 마감되는 건 사회가 바로 잡혀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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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낙원>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889







<낙원> 리뷰: 낙원으로부터의 배웅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시골 마을의 풍경에 물기가 어렸다. 여자는 남자와 말없이 눈을 맞춘다. 둘 사이에 이별의 공기가 흐른다. 여자는 들풀이 무성히 자란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남자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절뚝 여자를 따라간다. 여자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힐끗 남자를 돌아보기도 하고 남자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것을 따라 하듯 우산에 몸을 기대 절뚝절뚝 걷기도 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어지는 소리와 서정적인 음악이 어우러지고 두 인물은 한참을 걷는다. 보랏빛 석양이 질 무렵 남자와 여자는 조용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본다.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버스에 올라탄다. 남자는 홀로 남는다.


작품에는 유난히 빈자리가 도드라진다. 생각해보면 김종관 감독의 단편들이 대개 그랬다. <사랑하는 소녀>(2003)에서 드러난 두렵고도 애틋한 감정은 부재(不在)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운디드>(2002)의 소녀는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나아간 소년의 빈자리와 함께 머무르고 <영재를 기다리며>(2005)의 카나는 꽁꽁 언 손을 애써 녹이며 오지 않는 남자친구 영재를 한참 동안 기다린다. <모놀로그#1>(2006)의 여자는 지나간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의 빈자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처럼 김종관 감독의 단편 속 인물들은 타인의 빈자리 위에 서 있고 그 자리에서 파생된 상실감과 고독감을 앓는다. 인물들이 앓는 감정은 관객에게로 확장된다. <낙원> 또한 그러하다. 작품은 내러티브를 배제하고 감정만을 남김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한다. 둘 사이의 관계와 스토리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보다는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에 충실하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배우들의 표정, 작품 너머의 관객에게도 느껴지는 듯한 비 온 다음 날의 시원하고 촉촉한 공기, 시골의 적막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서정적인 음악은 그런 감정들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그들의 여정을 바라보며 쌓이던 감정은 여자가 떠난 뒤 선명한 고독감으로 변한다. 그들은 때론 보폭을 맞춰서, 때론 상대방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긴 길을 함께 걸어왔다. 비록 나란히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긴 여정의 끝에서 둘은 이별한다. 묘한 아픔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정류장에 머무른다. 통증과 상실감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 위로 비눗방울이 흩날린다. 남자가 비눗방울을 발견한 장면 후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와 떠나버린 여자는 <낙원>이라는 작품의 제목과 걸맞은 일종의 환상성을 부여한다.


서로가 함께했던 공간은 그들에게 낙원,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별했고 남자는 여자가 없는 낙원에 홀로 남는다. 낙원이었지만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공간에서 남자는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상실과 고독을 매개로 돌아오지 못할 낙원을 회상한다. 함께했던 낙원으로부터 그녀를 배웅한 그는 텅 비어버린 낙원에 한동안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빈자리를 목격한 관객 또한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각자의 낙원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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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어느 여름날 밤에>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3730







<어느 여름날 밤에> 리뷰: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인민군 ‘재성’과 ‘용준’의 섹스신에서부터 시작하는 <어느 여름날 밤에>는 곧바로 남한 사회에 정착해 살아가는 용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남한으로 내려온 용준은 작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에겐 새로운 애인 ‘태규’가 생겼다. 북에서 누릴 수 없었던 것들을 찾아 남한으로 왔지만 용준의 삶은 딱히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연인과의 동거생활을 유지하기도 벅찬 그에게 태규의 못된 장난이 감당할 수 없는 빚마저 떠안긴 탓이다. 어느 여름날 밤에 한 남자가 용준을 찾아온다.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북에서 내려온 재성이다. 그러나 용준은 재성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용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재성은 마침내 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고 용준에게 햄버거 봉투를 내민다. 인민군 용준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미제 햄버거’이다. 용준은 그 마저도 거들떠보지 않고 뿌리친다. 한편 철없는 태규는 재성의 정체를 의심하며 둘의 관계를 다그쳐 묻는다. 그저 아는 형일 뿐이라며 적당히 둘러댔지만 그동안 남한에서의 삶이 썩 녹록치 않았던 용준은 다시 나타난 재성에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자란 태규와 그의 철없는 행동에도 차마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용준, 여전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용준의 모습이 견딜 수 없는 재성의 관계는 서로 맞물려 갈등을 빚어낸다. 위태롭게 진행되는 세 남자의 동거는 잘 유지될 수 있을까.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 계속되는 용준의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햄버거 봉투를 내밀며 재성이 뱉는 말이다. 자유가 없는 북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이제 미제 햄버거를 먹을 자유가 생겼음에도 여전히 ‘같이’ 먹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북에서 재성을 사귀었던 이유를 ‘같이 힘들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는 용준은 마치 운영이 중단된 놀이공원과 같은 신세다. 이어지는 용준의 대사처럼 ‘관리 없이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용준은 재성을 잊게 된 것이다. 대신 그에겐 새롭게 ‘같이 힘들어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자유’는 주체가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하는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을 갈망했던 용준은 한편 끊임없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용준은 성매매를 해서라도 태규를 벌어 먹이지만 마땅한 보살핌은 받지 못하는 듯하다. 자유와 자본의 딜레마 속에서 갈등하는 용준은 마침내 재성과 키스하는 장면을 태규에게 들킴으로써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조건마저 무너지게 될 상황에 놓인다.





퀴어, 디아스포라, 분단, 군대, 자유, 자본 등 여러 키워드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 <어느 여름날 밤에>는 그 중에서도 자유와 자본의 문제에 가장 무게를 둔다. 세 남자의 관계에서 계속 등장하는 햄버거는 그 키워드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나아가 이 햄버거는 앞서 언급한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는 대사를 통해 ‘같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소재이기도 하다. 세 남자가 같이 살아가지 못 하도록 하는 것에는 이 영화가 다루는 키워드 모두를 대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같이’의 가치에 둔감한 요즘 한국 사회의 민낯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영화는 재성이 사투리 교정을 위해 동영상 강의를 보며 따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결코 낙관적인 결말로 보이진 않는다. 이미 서울 말씨를 완벽히 익힌 용준처럼 재성 역시 자유와 자본의 딜레마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을 찾지 못해 식어가는 영화 속 햄버거 봉투처럼 세 남자의 삶은 정착하지 못한 채 그 온기를 잃어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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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 투게더한줄 관람평

송희원 | 흩어져 악몽을 꾸던 이들, 함께 모여 꿈을 꾸다

이현재 | 간혹 서늘한, 갑자기 함께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차가운 위로

박영농 | 힘들다

이지윤 | ‘헬조선’에서 해피엔딩을 꿈꾸다

최지원 | 폭력이 파도치는 삶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위안

김은정 | "조금, 조금만 더" 어쩌면 거짓말일지 모를



 <컴, 투게더> 리뷰: [주의] 외면하지 말 것!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너’답게 살아봐!

두 번째 입시에도 실패한 ‘한나’는 자기 방식대로 삶을 꾸려가는 ‘유경’을 동경하며 ‘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음을 밝히며 유경은 한나에게 덧붙인다. “이왕이면 너답게 살아봐”. 한나는 감동한다.


아프리카가 날 기다린다!

한나는 집을 나서는 유경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실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아프리카가 자신을 기다린다며 택시에 짐을 싣는 유경. 먼 길을 떠나는 자신을 곁에서 배웅하는 한나를 바라보다 유경은 입을 맞춘다. 한나는 결심한다.



<컴, 투게더>는 한 가정 속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한 ‘범구’는 좌절감에 시달리던 중 같은 아파트 주민인 ‘호준’과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범구는 곧 호준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깨닫고 우정을 나누지만 미묘한 여운을 남기던 호준은 이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범구는 비애를 느끼며 안마방에서 난동을 부리다 경찰서 신세를 진다. ‘미영’은 카드 회사에서 일한다. 줄곧 실적이 높아 사내 평판이 좋았지만 경쟁자 ‘은정’의 약진에 영업 실적 2위로 전락하고 만다. 그 내막에 은정과 영업소장의 내연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미영은 퇴근 후 그들이 탄 차량을 뒤쫓는다. 미행을 따돌리려다 은정과 소장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미영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마침내 미영은 다시 영업 실적 1위로 올라서게 되지만 그는 사직을 결심한다. 재수생 한나는 이번에도 명문대 입시에 아깝게 실패한다. 예비 번호를 받고 추가 합격을 기다리지만 입학을 포기하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한나는 합격자인 양 거짓말을 하고 다른 합격자 ‘아영’과의 만남을 갖는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한나와 아영은 남자들과 합석하게 되고 만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영은 나쁜 꿍꿍이가 있던 남자에게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한다. 외면하려던 한나는 다시 찾아가 아영을 구하지만 끝내 바래다주지는 않는다.



각자가 처한 감당하기 힘든 현실 탓에 끝임 없이 삐걱대던 이 가정은 한바탕 사건을 겪고 나서야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범구는 미영에게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좀 쉬라며 다독이고 미영은 그런 범구에게 이번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결국 추가 합격이 된 한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한다. 명문대 진학을 다그치던 범구와 미영은 그런 한나의 결심을 응원하기에 이른다. 정리해고와 실적경쟁, 입시경쟁의 현실에서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유경의 조언처럼 ‘나답게 살기’로 일단락 지어지는 듯하다. 극을 이끌어가는 세 인물의 갈등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문제의식을 분명히 느끼고 있지만 부조리한 현실구조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비교 가능한 다른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가 아닌 타인을 향한 시선은 현실에 대한 주체적 개입을 불가능하게 한다.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내재된 갈등을 사적 복수의 차원에서만 다룬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나답기 살기’의 전략으로 당면한 사회를 외면 혹은 도피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 한들 이전의 부조리를 다시 마주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때도 그들은 ‘나답게 살기’의 전략으로 일관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졸업>(마이크 니콜스, 1967)의 마지막과 대비된다. 범구, 미영, 한나는 가족의 정을 다지며 오랜만에 나선 나들이에서 소나기를 피하려다 진흙탕에 구른다. 그마저도 즐겁게 웃어넘기고, 한데 엉켜 누워버린 이들을 카메라는 버드 아이 뷰로 비춘다. 청년 혹은 미래세대를 대표하는 한나의 미소를 클로즈업하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래세대에 대한 희망을 담아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한나와 같은 세대인 나는 그 장면이 전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 <졸업>의 그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세대인 유경은 영화의 후반부에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런 그를 동경하며 결심을 굳히는 한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나름 세운 계획이 있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한나의 앞날이 아직은 생기 넘치는 세렝게티처럼 설정되어있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것임을 현실의 한나들은 이미 감지하고 있다. 입시경쟁의 과거와는 전혀 상관없는 미래로 향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부조리는 그를 실적경쟁(미영)과 정리해고(범구)라는 다음단계로 안내할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유경의 말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너답게 살아봐!”는 “딴 데 가서 알아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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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기이한 춤: 기무>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122






<기이한 춤: 기무> 리뷰: 삶의 시퀀스 그리고 응시

<기이한 춤: 기무>와 <호수길>을 통해 본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기이한 춤: 기무>(이하 <기무>)는 한때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사용했던 건물과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박동현 감독은 기무사 건물의 내·외부를 찬찬히 보여주며 건축학자의 입을 빌려 건물의 보존 가치를 말한다. 또한 건물 일대 한옥마을 골목길을 비추며 시간이 축조한 삶의 공간을 재조명한다.

  



기무사 과거와 현재


기무사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종로구 소격동의 이 터는 1864년 종친부, 192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8·15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71년부터 국군기무사령부(전 국군보안사령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기무사는 국방관련 기밀보안업무를 수행하는 국방부 직할 군 수사정보기관이다. 기무(機務)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밀을 지켜야 할 중요한 일’을 뜻한다. 기무사가 주로 수행하는 업무는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군사보안지원, 군관련첩보 등 특정범죄 수사 등이다.(출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기무사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도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전신인 보안사령부부터 민간인 사찰로 여러 차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기무사 지하실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남산 지하실,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불법 연행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출처: 윤상호, 손영일, “기무사 대해부”, 동아일보, 2014.6.2.) 


영화는 기무사가 과천으로 이전한 후 빈 곳으로 남아있던 건물 모습을 기록한다. 영화가 촬영된 당시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이 확정되었지만, 기무사 건물의 보존 또는 철거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종친부의 터이자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곳이기에 건물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7월 3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2013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일부로 건물 형태가 보존되었다. 





<기무> 자막, 대한민국 재개발의 역사


영화 전반부는 기무사 건물 내·외부를 고정된 카메라로 천천히 비춘다. 건축학자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 덧붙여지는 한편 화면 하단에는 짤막한 자막으로 대한민국 역사 특히 재개발사를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1864년 종친부 확장 이건”, “1910년 한일합방”, “1961년 청계천 복개”(“2003년 청계천 복원”), “1979년 대민간 사찰업무 전두환 명령”(“2009년 기무사 민간사찰 재개 논란”), “2001년 상암동 재개발”(“2009년 상암 뉴타운 건설”), “2006년 은평 뉴타운 건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2009년 용산 재개발” 등. 전후 맥락 없이 무조건적인 철거와 재건축으로 대변, 서술되는 대한민국 역사는 화면 위에 위태롭게 축조되는 <기무>의 자막과 닮아있다. 빠르게 전환되는 자막은 재개발로 인해 무참히 스러져간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의 삶을 은유한다. 2009년 1월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숨진 “2009년 용산 재개발” 참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자막이 반복 재생하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재개발”이라는 철거의 방식을 대한민국은 현재까지도 명칭만 “뉴타운”으로 바꿔 똑같이 답습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박동현 감독은 서울 도시개발로 사라지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며 문화 속에서는 다양한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숭례문이 가장 그랬던 것 같습니다. 총독부 건물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총독부 건물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그것을 남겨두고 사람들에게 그런 역사 또한 남기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깨끗이 없애는 것이 중요한지”(출처: [인디포럼2010 데일리 9호] 박동현 감독 인터뷰) 박동현 감독이 했던 인터뷰와 <기무>에서 건축학자가 한 말처럼 재개발의 방식은 광범위한 시민적 참여를 통해 보존과 철거 그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관료화된 권위의 판단으로 파괴적인 재개발과 뉴타운 방식이 반복되어 왔다.  





<기무>와 <호수길>의 골목길 풍경과 삶의 시퀀스


기무사 건물을 관조하던 카메라는 영화 중반부부터 건물 일대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어느 골목길 풍경 하나를 7분여 동안 긴 침묵으로 응시한다. 동네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어떤 아주머니는 대화를 나누다가 수레에 물건을 싣고 온 행상에게서 그날 저녁 찬거리를 산다. 옆집 할아버지는 세탁소에서 찾은 양복을 옷걸이에 고이 들고 온다. 앞집, 옆집 사람들이 잠깐 멈춰 서서 거리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나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조금 의식하다가도 다시 본인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감독이 긴 기다림 끝에 얻은 이 장면을 나는 삶의 시퀀스가 담긴 장면이라 말하고 싶다. 거기에는 물리적 장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활동들이 일어나고 그곳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와 의미가 있다. 감독은 긴 응시를 통해서 관객 스스로가 그 장면, 삶의 풍경을 바라보고 감각하게 유도한다. 


이 장면은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2009)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길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내레이션 없이 담담하게 골목길 사람들의 풍경을 오래도록 기록한다. <기무>, <호수길> 두 영화의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머문다. 골목길 프레임 밖으로 한 사람이 사라지면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노는 아이에서부터 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보를 하는 노인,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까지. 두 영화의 골목길 풍경, 삶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배역들이다. 또한 두 영화의 카메라 모두 대상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골목길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렴풋이 들리지만 무슨 대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청권 안이지만 자세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너무 멀지도(무관심하지도) 너무 가깝지도(침해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카메라는 담담히 그들의 삶을 기록할 뿐이다. 누군가는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게 힐끗 보고 지나쳤을 풍경들이 두 감독이 응시하는 동안 삶의 시퀀스로 온전해진다. 응시를 한다는 것은 상대(대상)를 지그시 바라봄을 의미한다. 관객은 그 응시를 통해 공간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 공간은 경제적 가치로 값이 매겨진 ‘부지’가 아닌, 다양한 배역들의 일상과 만남이 부대끼는 삶의 무대이다. 두 감독은 그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기억 속에 잔상을 남겨 그 풍경을 보존하려 하는 듯하다. 카메라가 촬영을 멈춰도 그곳에는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관객들의 뇌리에 잔상처럼 남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관객은 이 골목길 풍경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그곳에 있어야 할 삶의 풍경이 사라지면 우리는 분명 아쉬워하게 될 것이란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기무> 후반부에는 수직으로 급격하게 치솟은 고층의 건물을 원경에서 보여준다. 영화 처음과 중간에서 카메라가 골목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풍경을 가까이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이제 골목길에 나와 앉아있지 않고 건물 안에 ‘들어있다’. 화면에서 경제업무 지구의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학교 하나가 멀리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를 크게 들려준다. 카메라와 학교 운동장 사이의 시각적 거리감과 사운드가 불일치한다. 가청권 밖인, 그 거리감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호수길>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철거로 비어버린 동네 풍경 위로 클로즈업된 아이들의 얼굴이 디졸브 되는 장면이다. 정재훈의 영화가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이미지로 담아냈다면 <기무>는 사운드로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듯하다. 





보존되어야 할 역사와 삶의 풍경


<기무> 마지막 장면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며 남기는 잔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잔상을 담는 방식은 흔히 사진에서 시간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장노출 기법과 유사하다. 영화에서도 느린 잔영을 남기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간과 장소에 새겨진 시간성을 상징한다. 동시에 장소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각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요구와 역사적 맥락에 의해 기무사 건축물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현재 미술관의 일부로 보존된 기무사 건물처럼 삶의 역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퇴적된다. 단지 경제적 가치만을 따져 무조건 부수고 밀어버리는 재개발, 이 주기적인 파괴의 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공간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맞게 보존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건물과 골목길에는 역사와 함께 그곳에 새겨진 미시적인 개인들의 삶이 존재한다. 이것을 응시하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회피(철거)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역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또한 잃게 될 것이 아닌가. 역사와 그 장소에 새겨진 개인들의 삶, 이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삶의 풍경을 이제는 응시하고 보존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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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경복>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2094






<경복> 리뷰: 단순하고 투명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경복>은 관객에게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넣었지?’라는 당혹감을 종종 안겨주는 영화다. 때때로 자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막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한없이 투명하게 보일 때이다. 당혹감은 정확히 이러한 영화의 특징에서 온다. 별다른 계산이 없어보여서 당혹스러운 것이다. 첫 장면이 그렇다. <경복>은 기타를 메고 홀로 터널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이 장면이 한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카메라가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터널을 걷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에 의해서 촬영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져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특유의 이상한 분위기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엇을 보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듯하다.





이러한 특징이 특히 잘 드러나는 부분은 제3자의 위치를 지키다가 갑자기 원 숏으로 전환될 때이다. 부모님이 휴가차 여행을 가고 ‘동환’과 함께 방에서 뭉개던 ‘형근’은 무작정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집을 팔아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집에 들이게 된다.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대화를 관찰하다가 갑자기 동환을 원 숏으로 잡는다. 3명의 대화가 진행 중인데 동환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한다. 대화 상대의 시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동환이 보고 있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동환은 카메라를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3명 사이에 느닷없이 끼어든 카메라는 마치 자신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기는 불분명한 상태로 시퀀스가 끝나 버린다.





이 당혹스러운 카메라의 난입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은 그들이 방에서 뒹굴며 ‘정영음’(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순간이다. 누구의 기억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플래시백처럼 몇 장의 사진들이 지나간다. 그 사진들은 앙드레 바쟁이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사진을 “방부 처리한 시간”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지아 장커와 미아자키 하야오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잠시 등장하는 앰비언스는 마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지나간 시간과 그것을 물성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사진이라는 매체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듯 들린다.





이 장면이 지나가면 “다들 어디론가 떠났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는 형근의 진술이 들려오고 그 뒤 형근은 자조 섞인 유쾌한 유머가 진행되는 술자리에서 갑자기 울어버린다. 이 눈물이 독특해지는 것은 그가 울기 전에 삽입된 플래시포워드 때문이다. 이 플래시포워드는 형근의 눈물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플래시포워드가 지칭하는 바는 영화 전반이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방부 처리된 시간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위에서 <경복>의 원 숏들은 마치 그들이 어찌저찌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처럼 보인다. 영화는 기계 없이 만들어 질 수 없고, 기계는 능동적인 사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카메라를 켜고 끄는 사람이 필요하다. 영화는 결국 (적어도 지금까진)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숙명을 지닌 매체이다. <경복>은 이 단순한 영화의 숙명을 원 숏이라는 가장 투명한 구도로 잡아내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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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플랜한줄 관람평

송희원 | 합리적 의심으로 선거의 투명성을 요구한다

이현재 | 음모론이든 증명이든 일단 썰이 재미있다. 그래서 듣고 싶어진다.

이지윤 | 플랜의 존재, 그 이전에 보장 받아야 할 우리의 개표권

최지원 | 흥미로운 동시에 서늘한

김은정 | 1:1.5 황금비율



 <더 플랜> 리뷰: 합리적 의심과 투표 이전의 개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약 3,000만 명의 투표지를 담은 13,500여 개 투표소의 투표함들은 251개의 개표소로 이동된다. 이동된 투표함은 개표소에서 개봉된 후 1,300여대의 전자 개표기에 의해 분류된다. 오후 9시 4분, 기호 1번이었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된다. 개표가 완료될 때까지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제치고 박근혜 후보는 한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약 4년이 흐른 2017년 4월, <더 플랜>은 다시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12년 12월로 시간을 되감는다.



18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과정을 둘러싼 의혹은 적지 않다. 대선을 며칠 앞두고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졌으며 대선 이후엔 무효표 분류와 연관된 부정선거 의심 정황을 주장하는 글과 사진이 온라인을 떠돌기 시작했다. ‘부정선거’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에서 여러 차례 눈에 띄기도 했다. 이러한 18대 대선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 사이에서 <더 플랜>은 전자 개표기가 토해낸 3.6%라는 높은 비율의 미분류표에 주목한다. 그리고 전자 개표기가 분류한 미분류표 중 박근혜 후보가 얼마나 더 많은 표를 가져갔는지를 설명하는 K값 1.5와 그것이 전국 251개의 모든 개표소에서 같은 패턴을 가지고 등장했음을 증명하며 새로운 의심을 탄생시킨다.


미스터리 추적 형식을 띤 다큐멘터리 <더 플랜>은 의도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팩트 체크에 포커스를 둔다. 증명이 어려운 누군가의 기억이나 의견이 아닌 선거관리위원회의 문서와 통계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의심에 대한 합리성을 갖춰나간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와 국내외 컴퓨터 전문가, 통계학 전문가, 해커의 말들이다. 그들의 말은 사견이 아닌 사실과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말하는 인물들을 다각도에서 담아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말하는 인물들이 마치 한 공간에서 반박하고 동의하고 말에 말을 덧붙이는 듯한 연출을 취한다.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그래픽은 어렵게 느껴지는 전문가의 말을 관객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더 플랜>은 18대 대선의 무효와 법적 수사를 촉구하기보다는 다가올 ‘앞으로’를 이야기한다. 전자 개표기가 해킹과 개표 조작 프로그램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드러내며 새로운 개표 방안 모색을 주장하고 개표 시스템에 있어 필요한 것이 철통보안이 아닌 투명성임을 강조한다. 국민이 지닌 투표권에는 개표권 또한 당연히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절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작품이 개봉되기 하루 전인 19일,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선관위는 19대 대선이 종료된 이후 <더 플랜> 제작팀의 요구가 있다면 조작 여부 검증에 필요한 범위에서 제 3기관을 통해 공개 검증에 응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이 요구한 개표의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다. 동시에 선관위는 ‘어떤 조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의혹을 제기한 분들은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기를 기대함’이라는 협박의 어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어째서 문제시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플랜>이 그저 불온하고 과장된 음모론을 그려내고 있다는 의견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의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믿기 힘든 수많은 사건들이 사회를 흔들었고 그런 배경에서 터져 나오는 의심들은 과장이라 치부될 수 없다. 의심이 필요한 시대에서의 의심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히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설사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유세로 길거리가 떠들썩하고 투표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곧 투표 독려 캠페인과 영상이 주변을 가득 채울 것이다. 쏟아질 ‘투표하세요’라는 외침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더 플랜>이 드러내는 개표의 투명성 보장과 그것을 가능케 할 합리적 의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플랜의 유무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투명하고 공정한 개표를 약속받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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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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