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25_월례비행: 그렇다면 편대비행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 진행: 윤성호 감독
- 대담: 황철민 감독, 김동우 조각가, 박찬경 설치미술가
- 기록: 늘샘 인디스페이스 운영팀
윤성호 일단 여담을 한마디 해야겠는데 원래 관객이 많이 오는데 오늘은 많지 않다. 이건 영화의 힘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거고. 옆에 충무로영화제보다는 (참여율이) 좋다. 화면상태도 그렇고(웃음). 김동우 작가는 영화에서 잘 설명되고 있고. 황철민 감독은 조중동 프레임이 안 섰을 때도 <옥천전투>라는 안티조선에 대한 영화도 만들고 <프락치>같은 극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만든 이후의 경과와 오늘 다시 본 소회를 말해 달라.
황철민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몇 년 동안 전교조를 비롯해 해직교수들 위해서 상영을 여기저기서 많이 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상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2편이 만들어져야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가 희망 없이, 막연한 희망만 남겨놓은 채로 끝이 났는데 사실 승리를 했었다. 했었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 이사장이 해고가 되어 떠났고 김동우 교수가 복직을 하고 나도 그 덕에 복직을 했었다. 해피엔드가 됐었는데. 한국사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해피엔드가 되기 쉽지 않은데, 그 기간이 그리 길지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학교에 전 이사장의 하수인으로 임시이사가 파견됐다. 이사 총장 교무위원 1년 만에 다시 원상복귀. 이제 만든다면 승리의 2편이 아니라 고난의 2편이 될 거다.
김동우 글쎄 이 영화는 본의 아니게 주인공역을 하게 됐는데 4년을 싸웠다. 4년 만에 교육부 감사가 나오고 우리가 복직이 됐다. 그 이전에 해직되었던 교수들까지 6명이 복직을 했다. 황철민 선생은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사실 해직교수가 아니다. 자발적 사표를 냈으니. 그래도 당시에는 특별채용으로 다시 재임용되는 절차를 통해서 돌아왔다. 한 달 전에 완전히 거꾸로 가는 세상이 돼서 그 이사장의 얼굴은 안보이지만 하수인들이 장악,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의 상태로 갔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어떻게 이렇게 옳고 그름이 바뀌는지...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정권-정책이 바뀌고 기타 많은 대학이 이런 반복을 하게 됐다. 아마 1년 전이었으면 신나게 보고 얘기했을 텐데 오늘 보면서... 오늘 양평에서 교수 전체회의 총장 얘기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소위 학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위협하는 표현을 보고 왔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가, 더 큰 발전을 위해 잠시 거꾸로 가는구나...
윤성호 처음 월례비행으로 2월에 8년 전 다큐 <뻑큐멘터리 : 박통진리교>를 틀었다. 작년이었다면 재밌게 볼 수 있었을 텐데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지금 주역들이 되어 있어서... 박찬경 작가가 한예종 사태와 관련해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해달라.
박찬경 다들 아실 것 같은데... 영화계 뿐만 아니라 한예종으로 대표되는데 미술, 음악, 출판 전방위적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디’자 들어가는 곳에는 감사, 예산 중단, 활동하던 주요인물이 교체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공격하고 있다. 예로 인디레이블에 소속된 인디밴드들에게 지원되던 1천만원이 없어지고. 미술 쪽에서는 독립공간보다 대안공간이라는 말을 쓰는데, 독립이 아니고 대안이라서 1년이나마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권이 바뀌는 것에 따라 예상 가능한 거긴 한데 10여 년 쌓여온 역량들을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행패에 가까운 비상식적인 문화행정이라는 게 잘못하는건 물론이고 행정자체가 실종된 능력도 없고 비전은 물론이고 관심도 없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나는 가끔 문화전쟁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런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윤성호 개탄만 할 게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예습복습도 해야할 것 같다. 왜 작은 승리들이 큰 승리로 이어지지 않을까...
황철민 큰 승리로 이어질 수도 었었다. 한국사학들의 문제는 설립자들이 학교를 개인 소유로 생각하고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이 많고, 놓지 않으려는 것이 심하다는 것이다. 세종대의 경우 참여정부 시절 기회가 있었는데 준비가 안 돼 있었다. 한국사회의 복합적인 문제이다... 자유이사라는 명목으로 몇 명이 남았고 끊임없이 저항 정의사학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정권 바뀌고 다시 수중으로 떨어지는데 열심히 싸운 거다. 한예종 사태 관련해 진중권 교수가 짤렸다. 교수가 되기 당연한 분인데 오랫동안 교수가 못되고. 희한하다. 박노자 같은 분은 왜 한국에서 교수를 못하나? 노르웨이 맞죠? 멋진 사람들인데 왜 뒤에 교수가 아닌 강사인가? 여러분은 몰라도 나는 안다. 우리나라에서 교수가 되려면 사상 검증에 통과를 해야 되거든. 여러분 다니는 대학들 대부분 소위 얘기하는 보수 우익 대학들이다. 사상적으로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진보가 좋다 보수가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한 사회가 존재하는데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99%가 우익인 게 문제다. 조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우연히’ 생겨난다. 반면 보수는 ‘조직적으로’ 생산된다. 사회에 기여하는 괜찮은 교수는 교수가 될 수가 없다. 20대 초반 독일 유학 30대 후반 돌아왔는데 행운이 따라서 쉽게 대학 교수가 됐다. 잘 몰라서 뽑았을 텐데 생긴 게 착하게 생겨서 뽑아준다고 했다. 착하게 생긴 게 뭐냐, 말 잘 듣게 생겼고, 학교가 하는 일에 절대 반항 안하게 생겼고, 고분고분하게 잘 생겼다는 얘기이다. 사상검증이다. 이렇게 운이 좋게 교수가 되는 사람이 5-10%가 아닌가 한다. 그들이 상아탑에서의 양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된 분들. 진중권 교수 같이 분명한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교수가 될 수 없다.
윤성호 감히 요약하자면 민주화정부 때 뿌리를 못 뽑았다... 대부분의 보수우익 대학들, 한예종도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현수막에 ‘글로벌 리더가 되자’라고 붙어있는(웃음)... 그런데 이번 사태를 맞아 '우연히' 진보지식인이 되신 박찬경 작가가 대안에 대해 말해달라.
박찬경 특별한 대안은 없는 것 같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잘 찾아서 해야지... 예술 좀 해보려고 했더니 불려 다니면서 욕해야 되고, 20년 싸웠으면 됐지 또 해야 되나...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인터넷을 이용하고 운동의 새로운 방법들 그런 건 다 나와 있는 것 같고. 0점 제로 그라운드 어른들도 많이 돌아가시고... 개개인에게 묻는 것 같다. 네가 뭐할래. 뭘 할 수 있어? 지난 10년간 예술하느라 바빴지, 좋은 환경이었다는 거다. 이제는 좀 자기예술만 하지 않고 각 영역 손잡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자.
윤성호 진중권 교수애게 지난 강사료도 환수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투쟁하면서 지칠 때가 있었을 거다. 영화를 보면 학생들이 힘을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경험 같은 거, 팁들을 알려준다면.
김동우 글쎄 나는 세종대에 가기 전에는 부끄럽지만 예술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가 너무 강조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예술지상주의 입장이었고 프로파간다, 도구화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예술은 발전해 왔지만... 정치의식이 없는 무색무취한 사람이었다. 정치, 좌우... 사실은 지금도 그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을 안 한다. 왜냐면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데 왜 좌우 잣대를 들이나... 민주,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좌우 구분을 하는 것이 한국사회가 아닌가... 재임용 탈락되고 예술가로서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한 거다. 여자가 이렇게 통통하고 그러냐라고 보는 건 자유인데, 권력을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고치라고 할 때 정말 난감했다. 나도 오래 외국생활을 하다가 40대 후반에 엉겁결에 교수가 됐다. IMF도 오고 그전에는 전업 작가로 생활해서 작품도 좀 팔렸는데... 예술가 교육자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대학원도 간 적 없고 대학만 두 번 다녔다. 단순한 얘기다. 어떻게 예술가에게 이런 부당한 일이 있는가. 그리고 선택을 한거다. 고치고 편안하게 있은 길과 자존심을 갖고 불이익을 감수할 것인가. 며칠 고민을 했다. 그러고 나서 언제 내가 교수였다고 라고 왜 내 작품에 떳떳하지 못한가... 싸우자. 그 다음 또 선택이다. 조용히 작업 산속에 파 묻혀서 할 수도 있었겠고, 좌우 진보보수 떠나서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한 판 붙자, 그래서 점잖은 방법으로 1인시위를 택했고 3년 반을 했는데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겠나. 예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됐고 지금은 영화보고 즐겁지 않다고 했지만, 믿는다, 역사의 진행이 거꾸로만 마냥 가진 않을 것이다.
황철민 싸움을 하려면 우리가 공부를 좀 해야잖나. 싸움에 대한 책들이, 손자병법에, 적을 알아야 이긴다, 그런 얘기가 있는데 사실 적을 알기가 어렵지. 촬영금지 가처분신청, 출입금지 가처분신청을 낸다... 관객들이 가끔 왜 한 쪽만 인터뷰했냐 이사장도 인터뷰하고 그래야지 편파적인 거 아니냐, 그러는데 이런 영화 인터뷰해줄 이사장은 한국에 없다. 상식적인 방법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 있는 방법으로 가야되는거다. 의지가 중요하다. 김동우 선생님과 통화했을 대 의지가 보였다. 한 번 붙으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며칠 하다가 쪽팔려서 못하겠다, 이러면... 교수가 노동자 같이 이게 뭡니까 라고 했다고 한다. 투쟁에서 좌절하는 이유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닌가 한다. 내가 딴 건 못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영화니까. 다큐를 해서 투쟁의 종자돈을 만들어보자.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적이 강해보였는데 싸우다 보니까 서서히 약점드이 보인다, 균열들이 보였다. 차돌을 딱 들면 균열이 없어 보여도 현미경으로 보면 거기도 균열이 있을 거다, 아마. 의지로 달려드는 자세, 이런 게 필요했다는 거다. 사실은 그 내부의 균열 때문에 무너진 거다. 그건 그냥 드러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고 죽을 때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할 때 보이게 된다. 이사장 고발할 때 그 자료들 어떻게 가지나. 비리는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 끼리 가지고 있다.
관객 대학사업의 문제, 구조, 자본, 계급으로 까지 생각했을 것 같고 다루어질 법 한데, 영화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하면서 끝나는데 더 밀고 갈 수 있지 않았나?
황철민 프로파간다를 하려면 좀 교활해야 한다. 어떤 정보는 의식적 차원에서 어떤 정보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전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관객과의 만남이라는 게, 두 가지가 조화롭게 전달, 음식으로 쳤을 때 소화가 잘 되는 거다. 이성적으로 잘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을 했고. 그런 부분은 감성적인 부분으로 축소를 시킨 거다. 한국사회, 한국 사학의 문제점들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흥행이 많이 된 영화도 아니지만 흥행에 더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메시지가 강할수록 감성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볼거리 제공, 영화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돈인데. 돈이 만드는 압도감이 주는 건데. 이런 영화는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이 제한되어 있다. 딱딱하게 전달하는 것은 관객에게 예의가 아니다. 내가 서비스 정신이 많다(웃음). 독립영화하기 좀 아깝다(웃음). 영화를 보고 음악이 죽여준다 그러는 분이 많은데 음악은 김동우 선생님이... 딱딱하고 물렁한 것이 조화되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윤성호 저도 독립영화 진행하긴 좀 아깝죠. 저는 이 영화를 2002년에 봤습니다. 캠코더 들기 시작할 땐데.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처음 느낀. 나한텐 그 정도 경로가 됐다.
김동우 앗 뜨거워, 반사작용으로 했을 뿐이다. 맑스가 얘기했지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고난-의식-행동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의식-존재. 때리면 아프다, 왜 때려 저항/복종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많은 교수가 해직 아팠지만 덤비지 않았거든. 문제는 나와의 싸움이다. 적과 싸우지만 적은 보이지 않고. 세종대학과 싸우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조중동 사법부 가처분 신청 명예훼손 신청 그런 일을 당하면서 투쟁한 것이다. 솔직히 길었으면 분신했을 거다. 그게 머릿속에 온다. 희망이 없는 내 극단의 모습은 무엇이냐. 누가 보든 안보든 나는 선다. 낮에 법원에서 오라고 해서 보고 저녁에 와서 경비원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때 아무도 안볼 때 와서 섰을 때 나는 이긴다. 물론 도와주는 분들도 있다. 거기에 의지하면 안 된다 생각한다. 내가 열정으로 할 때 도와주는 분들도 생기는 거다. 눈물겹게 고맙지. 하지만 그것에 의지해선 안 된다.
윤성호 인디포럼 작가회의가 매년 천만 원 정도를 지원받았는데 올해는 못 받았다. 인권 영화제 등도 마찬가지다. 분노보다 실소가 나왔다. 이렇게 눈에 보이게... 매년 채무파티를 했는데 이번에는 채무변제파티를 해야 될 거다. 여러 가지 즐거운 액션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때 부천영화제 김홍준 위원장이 쫓겨났을 때나, 활력연구소를 뺏겼을 때, 땅을 다져놨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그때 미리미리 연대를 못했던 게 아쉽다. 매번 월례비행이 MB요격 론으로 끝나는데, 예술이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지면 정치가 예술에 얼마나 간섭을 하는지 체감하고 있다.
[출처] 200908 월례비행 그렇다면 편대비행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INDIE SPACE) |작성자 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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