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가능성
〈빅슬립〉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3년 12월 12일(화)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태훈 감독
진행 정성일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지윤 님의 기록입니다.
골똘한 관찰과 깊게 헤아리는 눈길에서 비롯한 영화 〈빅슬립〉은 고이 담은 감정으로 투박하지만 따뜻하게 서로의 잠을 바라보고 이내 깊은 잠에 들곤 한다. ‘밤’과 ‘잠’이 어려운 인물들이 연결되어가는 과정은 가끔은 충돌하고 깨어지지만, 어느새 따뜻한 햇볕이 이들을 내리 쬐기도 한다. 밤과 잠을 담아내며 빛이 공존하는 영화 〈빅슬립〉이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본다.
정성일 평론가 (이하 정성일): 아마도 한국 독립영화를 꾸준히 보신 분들에게는 소재의 관점에서는 낯설지 않을 겁니다. 학교에서 드롭아웃된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독립영화에서 가장 마주치는 이야기 중 하나이자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보신 분들이 있으실텐데, 지난 몇년간 가장 성공적이었던 드롭아웃 청소년들에 관해 제일 성공적이었던 작품들로는 〈꿈의 제인〉, 〈박화영〉 같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밀어붙이거나, 주인공이 인간으로서 완전히 망가지는 걸 볼 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게 〈빅슬립〉은 해독제처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빅슬립〉이 드롭아웃 청소년들의 유토피아 버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김태훈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매우 긴 시간 동안 드롭아웃된 청소년들을 문화센터에서 강의하며 그들과 만나 대화하고 지켜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 본 이 영화 〈빅슬립〉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게 되었고, 그렇게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일 겁니다. 영화 〈빅슬립〉에서 기영을 보고 있으면 세 명의 기영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 명은 자신의 문제를 안고 있는 기영입니다. 병든 아버지와 새 엄마 사이에서 여전히 불편한 기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에서 권 반장의 요구로 원치 않는 불법폐기물을 유기하러 밤마다 나가는 기영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좋아하는 초은에게 사람 사귀는 방법이 미숙한 기영은 애매한 상태로 그 관계를 유지시켜 나갑니다. 이게 첫번째 ‘기영’입니다. 두 번째 기영은 영화를 보면서 여러분들도 읽어내셨겠지만, 기영은 길호의 미래의 모습이자 동시에 기영 자신이 길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 번째 기영이 있습니다. 이 기영이 〈빅슬립〉이라는 영화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대목일 겁니다. 기영은 길호에게, 길호가 따라다니는 오현 무리에게 교사처럼 대화하거나 혹은 면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때로는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정신들 좀 차리고 살아. 정신들 좀.”이라고 야단을 치는 기영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회하여 김태훈 감독이 그 자리에 들어서 교사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화 〈빅슬립〉은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일차적인 관객들은 드롭아웃된 청소년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계몽 영화의 동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 〈빅슬립〉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영화는 드롭아웃 청소년들을 소재로 착취하거나 불필요할 정도로 폭력적인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우리 영화가 얼마나 센 줄 아냐며 으스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기영을 통해서 기꺼이 자기 집에 초대해서 자기 문을 열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 기사에서 잊을만하면 청소년들을 집에 끌어들여 벌이는 어른들의 추악하기 짝이 없는 폭력의 기사들을 마주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사회에서 마주치는 것은 지옥의 위협이라면, 이 영화는 문을 열어 두고 집으로 초대했을 때 낙원의 가능성이라는 질문과 우리를 마주하게 만듭니다. 드롭아웃 청소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아이들을 환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문제와 다시 만나게 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 〈빅슬립〉이 우리가 서사에 보는 것보다 훨씬 큰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질문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 질문과 마주하고 앞으로도 드롭아웃 청소년들을 다루는 영화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할 만큼 저는 성숙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어집니다. 명백히 이 영화는 드롭아웃 청소년들을 소재로 착취하고, 거의 피바다 같은 폭력적인 스펙타클, 폭력의 포르노 영화가 만연하고, 그러한 영화들이 굉장한 사회의식이라도 갖고 있는 척하는 걸 보고 있었을 때, 그 영화들에 비하면 〈빅슬립〉이 성숙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빅슬립〉이 한국 독립영화의 드롭아웃 청소년 영화에 관한 하나의 비판으로도 다시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어보고 싶었고, 이 이야기를 이 영화를 만든 김태훈 감독에게도 질문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드롭아웃 청소년들과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험하고 지켜본 김태훈 감독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자리에 김태훈 감독을 모시겠습니다.
김태훈 감독 (이하 김태훈): 안녕하세요. 제가 GV를 꽤 오랫동안 하고 있는데 오늘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요. 청심환을 먹고 왔습니다. (웃음) 오늘 제가 존경하는 정성일 평론가님과 함께 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고, 굉장히 떨리지만 최대한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빅슬립〉의 연출을 한 김태훈입니다.
정성일: 어떤 계기로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어떤 내용의 강의를 하셨는지, 그러면서 왜 이들에 관한 영화가 찍고 싶어지셨는지 그리고 만나는 과정 중에 길호의 사례와 비슷한 친구가 있었는지에 대해 들어보며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김태훈: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가 고향에서 우연치 않게 어린 시절에 다녔던 극장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커리어긴 한데 (웃음), 그 극장을 큰 돈을 들여서 한 건 아니지만 의자를 직접 드릴로 박아가면서 친구와 함께 2년 반 정도 단관 극장 운영을 했는데, 제가 그때 들었던 생각이 저 스스로 완벽한 감옥을 지었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필름을 직접 영사까지 했었는데, 매시간마다 그 시간을 체크하는 삶을 살다 보니 그 시절에 굉장히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다가 동네에 있던 아이들을 모아 청소년 센터를 빌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극장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빅슬립〉의 제작사인 ‘시네버스’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도를 기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학교 청소년들도 가르쳤지만 학교 밖 청소년들도 있었고, 가정 밖 청소년들, 소년원을 나왔던 친구들까지 여러 친구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가 제가 수업 초창기에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 때, 제 수업 때 구석에서 잠만 자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를 불러 왜 수업시간에 잠만 자냐,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없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어제 밤에 술에 취한 아버지가 무서워서 밤길을 서성이다 잠을 자지 못했고 여기 와서 자느라 선생님께 미안하다고 하며 제게 사과를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그 친구를 깨울 수가 없었어요. 제 어설픈 수업보다는 그 친구가 이 시간에 잠이라도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이후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친구의 자는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영화를 빌려서 그 친구에게 작은 위로가 될 만한 무엇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빅슬립〉을 찍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제가 영화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데, 늘 자는 학생이 있었어요. 매 수업 들어갈 때마다 자길래 똑같이 질문했습니다.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가 없냐고. 제가 생각해도 재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웃음) 학생이 월세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밤마다 대리기사를 나가느라 잠을 못 자는데, 선생님 수업이 너무 듣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친구가 엎드려 자는 모습이 너무 안돼서 엎드려 잘 수 있는 베개를 사다 주었거든요.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비교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빅슬립〉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질문해보겠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소재의 영화, 드롭아웃 청소년들에 관한 독립영화를 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이환 감독의 〈박화영〉,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을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빅슬립〉을 보며 앞서 이야기한 영화들에 대한 해독제처럼 만들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우열을 가리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현장에서 드롭아웃된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이 영화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감흥 같은 게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빅슬립’이 필요해 같은 생각을 하셨을텐데.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며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김태훈: 마음이 아팠습니다. 실제로 제가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고, 물론 과도할 정도로 폭력성이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똑 같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수업을 했었고, 영화들이나 매체에서 나왔던 학교 밖 청소년들의 모습이 과도할 정도로 단순하게 비춰진다고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영화 〈빅슬립〉을 보고 있으면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떤 선을 정해두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또는 쓰는 과정에서 이를 테면 이 서사, 소재, 인물들이 등장하는 순간에 종종 ‘반드시’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장면들을 절대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의 장면들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찍으면서 이 문제는 절대 건들이지 않겠다고 정해놓은 선 같은 게 있으신지요.
김태훈: 선을 정해 놓았다기 보다는 저는 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처를 후벼 판다거나 불행을 전시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까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추지 않고 현재의 이야기를 하며, 이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오해로 시작하여, 우리는 늘 아이들을 오해하거나 낙인을 찍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영화의 시간 안에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썼습니다.
정성일: 서로 면담하고 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오해나 선입견을 알아차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김태훈: 제가 수업을 시작할 때 처음 들었던 말이 전화번호를 주지 마시라는 거였습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의 무게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모든 어른들이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저를 감정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실제로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상처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게 짧은 시간 안에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고 시간을 들여 아이들과 만나면서 그냥 아이들일 뿐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저 자신이 되게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처음에 아이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다가갔을까 하는 생각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랜 시간 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기영은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인데, 저 또한 그래서 노력하고 싶고 영화를 보신 분들도 힘들지만 같이 한번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정성일: 〈빅슬립〉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김태훈 감독 마음 속에 있는 롤모델로 생각하는 영화 혹은 정말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 명단이 있으신지요?
김태훈: 저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 안에 따뜻한 인간애를 그냥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거기서 늘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늘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USB에 담아두고 지칠 때마다 꺼내보곤 했습니다. 실제로 〈빅슬립〉도 〈케스〉라던지 〈스위트 식스틴(달콤한 열여섯)〉 같은 영화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일부분 의상 같은 경우를 차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길호나 영범이 같은 배우들에게 〈스위트 식스틴〉을 추천하기도 했는데 반응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어렵다고. (웃음)
정성일: 켄 로치 감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케스〉와 〈스위트 식스틴〉은 꼭 보십시오. 켄 로치 감독의 거의 절정에 해당하는 영화 명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빅슬립〉이라는 영화 제목이 궁금하셨을 거 같습니다. 빅슬립은 아시다시피 숙어로 ‘영면’이라는 뜻이죠. 저는 제목만 보고 처음에는 기영과 길호 둘 중 한 명이 죽는 결말인줄 알았어요. 사실 숙면을 취하다 라고 할 때는 빅슬립보다는 ‘딥슬립’, ‘웰슬립’이라고 이야기하죠. 빅슬립에도 숙면이라는 뜻이 있기야 하지만, 영면이 먼저 떠오르고,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 보일드 소설 ‘빅슬립’을 각색하여 영화로 옮긴, 하워드 혹스의 1946년도 영화 〈빅슬립〉이 떠오릅니다. 누가봐도 영화사의 고전적인 영화 제목이라 그러한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텐데도, 이 영화의 제목을 ‘빅슬립’이라고 제목을 지은 사연이 궁금합니다.
김태훈: 일단 동명 원작 소설, 레이먼드 챈들러 작가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요. (웃음) 빅슬립이라는 제목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무거워서 끝까지 고민하기는 했습니다. 동명 소설이 유명하다 보니 제 영화가 사실 ‘딥슬립’이 맞겠죠. 사실 영화를 찍으며 들었던 생각이 영화 속 세상도 구해지 못했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영화가 좀 더 확장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래서 죽음의 의미를 품고 있는 빅슬립이라는 제목이 어떨까 생각했고 주변 친구들이 용기 내서 (제목으로) 해 보라고 용기를 주어서 (웃음) 이렇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적 확장을 제 입으로 말하기가 송구스러워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어느 GV에서 한 관객 분이 이런 질문을 해주시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굉장히 따뜻한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니 이 영화 속 세계와 우리 세상이 이 두 인물을 죽음으로 몰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서 빅슬립이라는 제목이 어울린다고 해주셔서 제가 ‘맞습니다.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성일: 영화 〈빅슬립〉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모가 문제입니다. 기영은 오래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마 새 엄마와 살았을 겁니다. 기영은 길호 나이 또래일 때 집을 떠난 기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영의 말에 따르면, 그날은 엄청나게 추워서 빈집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영은 지금도 새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줌마라고 부릅니다. 길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거리로 나왔습니다. 추운 겨울날 평상의 전기 난로를 곁에 두고 잠을 청합니다. 기영이 공장에서 만난 기영이 만난 초은은 어머니가 ‘넌 눈치가 없어서 어딜가나 미움 받을 거’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으면 난 어딜가나 눈치를 봐요, 그래서 자신감을 잃었어요 라고 말합니다. 길호의 친구 영범에게 길호는 넌 집에 엄마 있잖아, 라고 하며 집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영범은 네가 뭘 아냐고 하며 영범은 차라리 길바닥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택합니다. 이 영화는 모든 인물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부모라는건 도대체 뭘까. 아버지란 무엇인가. 어머니란 무엇인가. 그리고 기영의 말을 빌리면, 이들이 인생을 꼬이게 만듭니다. 김태훈 감독에게 묻습니다. 부모라는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김태훈: 답변보다는 제가 만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우는 아이들을 만나 수업을 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아이들의 문제보다는 부모들의 문제가 더욱 보입니다.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했지만, 사실 그 아이들은 늘 쓸쓸하고 외로워하고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걸 저는 늘 옆에서 봐왔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고,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정성일: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영화를 보며 부모가 겹쳐 보이는 분들이 계셨을 겁니다. 신입생 면접에 들어가면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부모에 대한 증오를 표현합니다. 분노와 증오를 표현합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 사회의 무게가 되어가고 있고, 계속해서 사회는 왜 출산율이 낮냐고 다그치듯 물어보고, 이런 문제는 더 큰 문제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빅슬립〉은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고, 그래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칭찬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를 보며 저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영화 〈빅슬립〉은 가끔 수수께끼 같은 순간들이 있고 그 수수께끼들은 계속해서 출몰합니다. 생략이나 암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김태훈 감독과 우리가 알고 있는 드롭아웃 청소년들에 대한 지식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를 테면, 영화 첫 장면입니다. 이 영화 첫 장면은 이상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안 떠오르는 까닭은 알 수가 없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은 길호가 오현을 대장으로 하는 무리와 함께 손전등을 들고 동두천 다리 아래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장면으로만 따지면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무리들이 드롭아웃 무리들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또, 이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손전등이 남의 집을 털기 위해 쓰는 꼭 필요한 도구라는 점을 나중에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이미지는 아름답지만 이 장면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장면이 수수께끼 같으니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첫 장면을 이렇게 시작한 김태훈 감독의 결단이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태훈: 사실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대부분 선입견으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기영과 길호를 바라볼 때도 오해로부터 시작을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이 시나리오 자체가 거대한 수수께끼와 오해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이해하는 방식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확실히 불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저도 느끼는 바지만, 조금 혼란을 많이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빛이라는 게 저는 그게 무엇일까로 시작해서 그것이 아이들이었다고 나아가고 싶었던 이유이기는 했습니다.
정성일: 첫 장면을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데, 그 다음 신은 점프씬이었습니다. 길호는 오현의 무리와 있다가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떨어져 나오는 과정이 없습니다. 제가 드롭아웃 그룹들의 생태를 알지 못하지만, 한국 독립영화의 드롭아웃 청소년들을 다룬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장면은 드롭아웃 그룹들이 이탈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여기서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해서는 탈출했다고까지 표현하는, 가혹한 벌을 가하기도 합니다. 떨어져 나오는 과정을 찍지는 않았는데, 길호가 오현 무리와 다시 합류할 때에도 별다른 마찰 없이 다시 합류합니다. 나가고 싶을 때는 나가고, 들어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 있고, 혹은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드롭아웃 청소년들의 생태를 다룬 다른 드롭아웃 영화들에 대해 김태훈 감독께서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영화들이 만들어 놓은 소재 장르, 어떤 컨벤션을 만들어냈기에 오히려 저는 이 대목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을 것 같고, 이 그룹에 대한 오해를 부식시키고 이 과정 속에서 길호가 기영을 만나는 과정이 부드럽지 않았을까에 대해 생각은 하는데, 첫 장면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후 점프컷처럼 갑자기 만나는 장면으로 건너뛰게 되니까 영화를 쫓아가는 게 굉장히 힘들어진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편집된 것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태훈: 아이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장면은 넣어두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시에 편집을 이렇게 한 이유는 너무 거대한 잘못으로 이 영화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보의 양을 굉장히 생각하면서 이 시나리오를 썼던 것 같습니다. 오해로 시작하여 이해하는 과정으로 가기까지 얼마만큼의 정보를 어느 부분에서 얼만큼,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길호가 도둑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면, 관객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오히려 제가 선입견으로 이 아이를 바라보라는 듯이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반대로 그 장면이 마지막으로 간 경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이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보더라도 두 시간 동안 영화를 통해 이 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면 혹시나 편집의 빈 공간에 이 아이가 장신구들을 훔치지 않고 놓고 갔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썼습니다. 정보의 양을 결정하는 동안 저조차도 굉장히 불안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프로듀서가 와 계신데, 프로듀서께서 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가장 장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프로듀서: 다른 영화들은 청소년들을 나쁘게 표현하거나, 보는 데에 힘들거나 절망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시나리오를 보았을 때는 그런 부분들이 없고, 길호도 언젠가는 기영처럼 미래가 있겠지 하는 어쨌든 조금이지만 희망을 주는 결말이라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빅슬립〉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떤 것인가요?
프로듀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기영이 길호에게 “너 머리 잘라.”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길호가 기영의 말을 듣고 피식 웃는데, 이 영화에서 최초로 길호의 아이 같은 모습이 보이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합니다.
정성일: 시나리오를 보며 고쳤으면 하거나 동의하기 힘들었던 대목은 어디인가요?
프로듀서: 지금은 없어진 장면인데, 초은과 기영이 처음에는 약간의 로맨스 같은 대목이 있었는데, 감독님과 상의를 해서 삭제되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정성일: 영화의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질문을 드리면, 이 영화는 진행되다가도 이따금 필요 이상으로 멀리 찍은 롱숏이 문득 등장합니다. 당시 롱숏이 마스터숏 기능을 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인물을 보잘 것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롱숏이 리듬처럼 반복됩니다. 이걸 찍기 위해서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들을 굉장히 힘들게 헌팅했다는 느낌까지 있고, 애썼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영화 〈빅슬립〉에서 롱숏의 역할들은 어떤 것인가요?
김태훈: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이 아이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이었습니다. 늘 밝은 척하고 강한 척하는 친구들이 이야기하면 할수록 너무 외로워하고 쓸쓸해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 근원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부모님, 혹은 사회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이 영화에 그런 부분을 제가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촬영적인 부분이나 사운드적인 부분, 조명 부분에서 주문을 했던 게 굉장히 쓸쓸하고 외롭고 어두운 가운데 한줄기 빛이 표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고, 그러다 롱숏을 함께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영화 〈빅슬립〉은 스토리를 따라오는 것에 비하면 시나리오 쓰기가 굉장히 힘든 시나리오 였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세 개 혹은 네 개의 트랙으로 서사가 진행됩니다. 하나의 트랙, 기영과 길호의 트랙이 있습니다. 두번째, 기영과 초은의 트랙이 있습니다. 세번째 트랙, 기영과 아버지 혹은 새 엄마의 트랙이 있습니다. 네번째, 기영과 권반장의 트랙이 있습니다. 네 가지 트랙의 공통점은 기영입니다. 이 영화는 길호의 영화가 아니라 기영의 영화입니다. 드롭아웃 청소년들의 소재라고 길호의 영화라고 하면 영화 대충 보는 것이죠. 영화 빅슬립은 기영을 주인공으로 중심에 둔 것을 보고 저는 약간 의아해졌습니다. 왜 길호가 아니라 기영을 중심에 놓았을까. 영화는 끝까지 길호는 어른 기영의 세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기영이 마지막 장면에서 왜이렇게 피곤하게 들어왔는지도 모르며 길호는 기영의 세계에 진입하지도 못합니다. 상투적인 방식으로는 기영의 공장에 길호가 다니게 되는 방식이 있을텐데 길호는 기영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합니다. 길호는 끝까지 기영의 피로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왜 피로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질문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기이하게 느껴지는 건 이 네 개의 트랙을 하나의 트랙으로 수렴하지 않고, 끝까지 네 개의 트랙을 유지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며, 그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됨으로써 이 영화의 스펙트럼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스펙트럼이 넓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영화의 서사가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끝까지 밀어붙인 건 연출자의 결단으로 보입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태훈: 저는 시나리오를 쓰며 이 인물들이 결국에는 모두가 기영이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모두가 일정 부분은 닮아있고 모두가 각자 저마다의 아픔이 있지만, 그 아픔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와 인물들은 서로 거울보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이야기적으로 만나기보다, 서로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걸 보고 있는 우리들도 저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싶었고, 이야기들이 서사적으로 모이는게 아니라 하나의 인물을 본 것처럼 착시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관객: 영화 잘 봤습니다. 첫번째로 영화 렌즈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다른 영화보다 망원렌즈를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로, 초은이 밤에 차를 태워달라고 기영에게 말을 하는데, 그 다음 장면이 두 사람이 차를 타는 장면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장도 오케이했어 너를 끼워줄게.” 라고 말하는 장면과 연결되어 있던데, 이 연결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태훈: 촬영감독님과 전 작품들도 함께 촬영을 해왔었는데, 스태프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던 부분이 등장인물들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형식으로 찍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보듯 촬영을 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 어울리겠다 생각하여 그렇게 촬영하였습니다. 장면의 연결 관련해서는 그 부분이 서사적으로 감정적 변화를 이루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했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관객: 어떤 계기로 학교 밖 청소년들을 가르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기영은 감독님이 아닌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태훈: 우연치 않게 학교 밖 청소년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가 첫 시작이었는데, 그쪽에서 대안학교가 따로 있었는데, 그 대안학교 아이들을 가르쳐보겠냐는 제안을 받으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다른 학교 밖 청소년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다른 센터에서도 쉼터에 가서 수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으면 수업을 하였고, 이태원 언덕배기에 가출 청소년들이 많이 모인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듣고 테이블 하나를 들고 가서 수업을 한적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만나며 계속해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영에게는 일부분 저의 생각이 들어가있지만, 따지고 보면 아이들 곁에 있어주셨던 선생님들과 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모든걸 던져서 아이들 곁에 있어주었던 어른들을 보며 상상한 캐릭터입니다.
관객: 영화에서 기영이 화분을 버리는데 이 사람의 마음이 포기인지 깨달음인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는 기영과 길호가 늘 따로 잤는데, 마지막에는 서로의 곁에서 같이 자는데 그때의 기영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김태훈: 화분을 버리는 기영의 심정은 자포자기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희망은 없고 자신 또한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였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게 길호가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영은 굉장히 지쳤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지친 몸을 그대로 뉘일 수밖에 없어 그곳에 누웠을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엔딩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길호와의 친근함이 생겨 옆에 누웠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웃음) 기영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 아이들을 가르치다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태훈: 영화를 전공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영화 만들기, 창작수업을 했는데, 저도 결혼을 하고 나이가 마흔이 가까워져 오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작 영화를 한다고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왜 당당하게 영화를 찍지 않고 늘 도망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흔이 되기 전에 장편에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생애 최대의 도전을 했던 것 같습니다.
관객: 김영성 배우 캐스팅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태훈: 저는 영화의 완성이 캐스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캐스팅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디에 출연했는지는 전혀 따지지 않았고 무조건 공개 오디션으로 끝까지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프로필을 받았을 때 3000명이 넘는 분들이 지원을 해주셨어요. 3000개가 넘는 프로필과 영상들을 일일이 모두 검토를 했었고 김영성 배우의 경우 오디션 마지막 날 등장을 하셨어요. 저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를 캐스팅 해야하나 하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눈빛과 걸음걸이 제스처가 정말 ‘기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스태프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등장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오디션을 보는데, 막걸리를 마시며 길호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영성 배우가 저한테 음악 하나 틀어도 될까요 라고 여쭈더니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틀고서 의자에 앉는게 아니라 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서 그 대사를 하시더라고요. 완전히 제가 생각했던 모든 걸 뒤집어서 연기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겠다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지정대본 연기는 모두 끝났는데, 한가지 부탁을 더 드렸습니다. 죄송한데 욕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요. (웃음) 자기 자신에게 하는 욕이어도 좋고, 흔히 말하는 불량 청소년들에게 하는 욕이어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욕을 해달라고 했더니 김영성 배우가 잠시 시간을 가지더니 폭발적인 욕을 제게 쏟아붓고 (웃음) 저도 그 에너지에 차마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저도 막 일어나 ‘더 해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거의 그렇게 황홀경으로 캐스팅을 한 것 같습니다.
정성일: 김영성 배우가 〈범죄도시 3〉에 나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나요?
김태훈: 전혀 몰랐습니다.
정성일: 그 영화가 〈빅슬립〉에 선입견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혹시 안 해 보셨나요?
김태훈: 했습니다. 저희가 먼저 촬영하기는 했지만, 그 영화가 먼저 개봉을 했기 때문에 김영성 배우의 이미지가 〈빅슬립〉이 나왔을 때 어떤 선입견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관객: 영화에서는 기영과 관계를 맺는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에 기영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어 보이고, 그래서 초은은 기영의 안식처 같은 느낌도 듭니다. 감독님은 기영과 초은의 로맨스를 더 그리고 싶었는지, 로맨스 장면을 삭제하신 이유는 스토리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인지 궁금합니다.
김태훈: 로맨스 장면이 좀 폭력적이었던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은 빠지고 동료애로 접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초은이라는 인물은 기영의 오해로 시작하는 인물이라고 상상을 했어요. 울고 있는 초은의 모습을 보고 으레 여성성이 결핍된 기영이 저 여자를 자신이 지켜주어야겠다는 선입견으로 시작했다가 오히려 마지막에는 초은에게 리드를 당할 정도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그런 상상을 하며 시나리오를 썼고, 초은이라는 인물에게 기대어도 충분할 정도로, 작아 보이지만 거대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생각하며 초은을 그렸습니다.
관객: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가 뒤따르는 시선이 인물들에게 나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굳이 직접적으로 그런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태훈: 저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 충분히 관객 분들도 그 분노와 증오를 예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고, 증오가 드러나는 순간 그 증오의 감정에서 멀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에게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증오의 감정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이 영화를 통해 그 감정을 멀리서 지켜보고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지점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 〈빅슬립〉에는 갑자기 롱테이크로 진행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상적인 롱테이크는 기영이 길호에게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한 다음 마루에 서서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라고 대화하는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로 찍었습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의 감정을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이 장면을 설명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감정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태훈: 그 장면이 사실 콘티 상으로는 나눠찍기로 되어 있었는데, 촬영을 하는 동안 저는 현장에서 제가 느끼는 바가 영화에 꼭 표현될 거라고 믿고 있는 편인데, 장면을 찍으며 두 사람을 오가는 감정과 유머들이 고스란히 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눠 찍기를 포기하고 편집에서도 용기 있게 두 사람 사이의 감정과 관계를 위해 롱테이크를 선택했습니다.
정성일: 그런 경우에는 배우들이 당황하기 마련인데, 그런 지점에서 현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땠나요?
김태훈: 사실 배우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늘 좋았기 때문에 제가 어떤 방향으로 가자고 해도 아마 다 들어주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찍을 때 방식이 모든 장면을 원테이크처럼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인물들의 감정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타입이라 한 인물의 감정을 찍고 있으면 그걸 마치 롱테이크를 찍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아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오히려 배우들에게는 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게 스태프들에게도 어려움이 되긴 하였지만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되, 우리는 이 방법을 포기하지 말자는 방식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영화 〈빅슬립〉에는 딱 맞춰놓을 필요가 없는데도 서로 짝을 맞추어놓아서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라고 질문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기영이 병든 아버지 집에 방문했을 때 새엄마가 ‘올해 농사가 참 잘됐어.’라며 사과를 깎아줍니다. 길호가 기영을 다시 찾아왔을 때, 많은 다른 것들을 사올 수도 있는데, 사과를 사 들고 찾아옵니다. 마치 길호가 새 아버지를 찾아오는 느낌으로 사과를 들고 찾아오는데, 이 두 장면을 맞춰놓은 것 같은데 그 의미의 네트워크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장면에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셨을 텐데, 영화를 보는 쪽에서는 여기서 무엇을 느끼면 될까요? 혹은 길호가 사과를 들고 왔을 때 무엇을 느낄까요?
김태훈: 두 가지 측면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길호와 기영은 명백하게 거울보기로 이야기를 진행했고, 마치 길호가 기영을 보며 미래를 생각하고, 기영이 길호를 보며 과거처럼 느끼는 전체적인 구성을 왔다 갔다 하듯이 구성하였고, 사과 장면도 그러한 구성 중에 하나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왜 사과로 했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경북 영주 출신인데, 이곳이 사과가 특산품입니다. (웃음) 제게는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을 했고, 길호가 기영에게 사과를 들고 찾아왔을 때 그 씬의 마지막이 사과를 비추면 끝나는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계속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보고 있잖아요. 사실 이 아이가 사과를 주기 위해 어떤 것을 사서 가져오고, 밥 대신 사과를 먹고, 사과를 방값이라며 놓고가는 그런 것들을 뒤늦게 생각하면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저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정성일: 인상적인 설명입니다. 진심으로요. 둘째 날, 기영과 길호가 대화를 하며 기영이 물어봅니다. ‘엄마는? 죽었어요. 집에 가면 아빠가 때려요.’ 라며 대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보며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영은 서서 길호를 내려다보고, 길호는 올려다보며 대화를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장면은 픽스드 롱테이크로 찍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때 하나를 앉혀 놓고 하나는 서서 대화하는 장면을 찍으며 감독께서는 한 쇼트로 의도적으로 찍을 수 없게 두 사람을 위치시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장면은 한 쇼트로 찍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찢어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대화가 영화에서 기영과 길호가 서로가 거울이 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 때문에 기영은 길호가 자기의 과거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거고, 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는 기영을 보며 길호는 막연하게라도 자신과 같은 경험이 있었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장면이었을 텐데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을 찢어 놓은 구도로 연출하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김태훈: 저는 그 장면이 제게 있어 가장 불편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어른으로서 믿어줄 수 있는데, 그거까지 들어야 하나, 그거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기영의 모습과 그걸 듣고 있는 길호의 모습을 보며 저는 두 사람을 도저히 한 자리에 놓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과거 이야기는 전혀 묻지 않게 되었는데, 이 영화는 어찌됐건 이 아이의 아픔을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보여주어야 하는 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장면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대화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그 방식에서도 저의 태도가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장면을 찍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기영은 두 번의 굉장한 결단을 하는데요. 첫번째 결단은 길호에게 집에 들어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호 입장에서도 굉장한 결단이었을 겁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을 텐데. 말하자면, 이것이 드롭아웃 청소년물이어서 그렇지 순식간에 공포 장르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영화들이 집에 들어가면 무언가 일이 생깁니다. 제가 더 깜짝 놀란건 둘째 날 기영이 길호에게 집을 맡기고 출근을 합니다. 이건 하룻밤 재워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집을 맡기고 출근을 하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닐 겁니다. 기영이 가진 길호에 대한 신뢰를 무한한 신뢰라고 말하기에는 무책임한 것 같습니다. 기영이 길호에게 집을 맡기고 출근하는 신뢰의 근거를 영화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이야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태훈: 기영은 길호에게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보았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기에 막걸리를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실 기영이라는 캐릭터를 설계하며 저 역시 이 캐릭터가 완벽한 판타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이 관계의 무게를 이겨 낼 만한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있다면 어떻게 할까 있다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해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만 도달해도 좀 멋진 일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영이라는 인물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가슴 서늘해지는 건, 기영은 길호에게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뢰를 안고 집을 맡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영이 나가며 길호에게 전화 있냐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곧 이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무한히 신뢰하는 이 사람에게 길호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기영은 길호에게 신뢰를 베푸는데 길호는 기영을 신뢰하지 못할까요. 길호는 기영이 나가자 영범과 통화하다 갑자기 길호가 우리 여기서 뭐 좀 쌔벼갈까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영범이 아닌 길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뒤이어 뻥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이 생각을 (길호가) 했다는 자체가 신뢰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집을 맡기고 나가는 무한한 신뢰에 이 장면을 붙여놓음으로써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태훈: 길호라는 인물을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을 때, 오히려 그 모순성으로 다가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우리가 길호라는 아이를 착한 아이로 보는 것과 나쁜 아이로 보는 것, 그 두가지를 뒤섞어서 이 아이를 진짜 존재하는 아이처럼 만들고, 보는 관객들이 점점 이 아이를 믿어가는 과정을 오해에서 시작되어 이해로 가는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의심을 하게 되고,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에 대해 관객과 어떤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신뢰를 이 아이가 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등, 그런 부분들이 길호가 이후에 자신을 믿어달라고 외치는 순간에서 우리는 길호를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기영은 드롭아웃된 청소년들을 면담하듯 진행되는 씬들이 있습니다. 세번째 날 밤, 기영은 길호와 식탁에 마주 앉아 ‘열일곱 어린 나이 아니야.’라며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은 면담 교사가 마치 길호와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는 기영이 오현의 무리에게 정신 촘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장면, 마치 연설하듯이 나타나는 장면은 오랜 시간 청소년들을 면담해온 김태훈 감독이 외치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 영화의 1차 관객은 드롭아웃 청소년들이고,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은 이 영화의 2차 관객들이라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혹은 이 장면들이 영화를 찍으며 꼭 찍고 싶었던 장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만났다면, 굉장히 설명적이라 거부감도 들었을 텐데, 이 영화에서는 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식탁에서 기영과 길호가 이야기할 때는 진심을 담아 오랜 경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온 대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면담교사로서 김태훈과 이 영화의 연출자로서 김태훈 사이에서 기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관해 이야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태훈: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 곁에 진정으로 함께 해주는 어른들이 꼭 있더라고요.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선생님이 아닌 분들도 자기의 시간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주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 분들을 보며 대체 저 사람은 왜 저기에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아이들 옆에 있어주는 걸까하는 질문의 꼬리를 물고 나온 캐릭터가 기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영은 길호라는 인물을 보며 자기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인물인데 저는 거기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이 저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아이들의 말을 통해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저의 위치를 바라보는 그런 시간을 늘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영이라는 인물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길호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자기의 어린시절이 그랬을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기영이라는 인물이 길호의 곁에 이 영화가 끝나도 있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현 무리에게 소리치는 장면에 관해서는 완성된 대사가 없었습니다. 배우들에게 그 장면이 가장 진실된 순간이지만, 완전히 제가 쓰는 순간 이건 연기가 될 것이니 있는 그대로의 감정들을 함께 찾아 나가보자고 말을 했고, 이 진실된 순간을 보기 위해 모든 촬영 과정에서 가장 많이 찍은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기영 또한 안 좋은 일을 하는 상황이고,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마치 이 아이들을 탓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하고,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폭력적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 같은 것들이 혼재된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 기영과 초은의 장면 중, 가장 어색했던 건 서로 벤치에 앉아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리베스트라움’, 사랑의 꿈이 흘러나옵니다. 이건 좀 뜻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음악을 왜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영과 길호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강가를 산책하는 장면이 있는데, 길호가 뜬금없이 기영에게 ‘왜 결혼 안하세요.’라고 질문하고 그 장면 뒤에 기영과 초은의 벤치 씬을 바로 붙여두며 흐르는 곡을 사랑의 꿈을 사용했기 때문에 갑자기 여기서 음악과 편집, 서사의 진행이 톤앤매너를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태훈: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컸었습니다. 사랑의 꿈은 공장에서 틀어주는 음악이라고 설정하고 쓰기는 했었는데, 사운드 감독님께서 갈 거면 더 가보자하며 이 영화의 숨통이 된다고 말씀 해주셨고, 거기에 동의를 하며, 이렇게 하게 되면 대사들이 훨씬 더 재미있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성일: 여전히 오해가 남습니다. (웃음) 몇 가지 오해가 풀리지 않는 장면들이 있는데, 길호가 기영의 집에서 나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영범이 오현 무리를 끌고 집 앞에 끌고 와 집 안에 들어오고 자는 때입니다. 영범은 오현에게 완전히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떤 화해의 과정에 대한 쇼트없이, 둘이 다시 사이 좋게 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갑자기 다시 영범과 화해가 된 듯 넘어가게 되는데, 길호가 기영 집에서 마치 기영을 배신 한 것처럼 몰려 쫓겨나자 영범에게 갖는 분노가 굉장히 컸을 것 같은데, 용서의 과정이 저는 길호라는 사람을 훨씬 더 설명할 수 있고, 이 아이의 착한 심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범과 길호가 같이 농구, 축구를 하는 장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장면 이후에는 영범이 기영의 집에 찾아와 길호를 착한 아이라고 말하는 장면 말고는 다른 순간들은 건너 뛴 것에 대해 시나리오에서부터 없었는지, 편집 과정에서 건너 뛰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김태훈: 시나리오부터 없었습니다. 저는 길호와 영범의 관계가 일반적인, 잘못을 저지르면 사과를 해야 하는 관계를 뛰어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가출 팸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오현이라는 우두머리 친구가 있기 때문에, 그와의 갈등과 불협화음들을 서로가 이해해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길호라는 친구는 늘 영범을 지켜주는 존재처럼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영범은 그에 대한 죄책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죄책감 때문에, 기영의 집을 혼자 찾아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또한 그 일 때문에 또다른 길호에게 있어서 죄를 만들고 그 죄를 또 사과하기 위해 기영을 찾아가는 그런 과정이 좀 더 그 또래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또래의 아이들의 언어 같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정성일: 김태훈 감독의 아이들에 대한 관찰에서 얻은 경험과 정보, 그리고 영화로 이 아이들을 처음 보고 있는 우리들의 정보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종종 감정선이 끊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암시될 수 없을 정도로, 추론할 수 없을 정도로 빠진 장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영은 길호를 찾으며 오현 무리를 찾아옵니다. 막 화를 내고 싸우고 소리지릅니다. 기영은 그런 다음 길호와 따로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이 대화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영의 오해에 대해 어른이 사과하는 순간이었고, 길호는 어른의 사과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순간이기도 했겠죠. 이 대화의 순간의 내용보다도 길호의 표정, 반응 그리고 이걸 힘겹게 고백하는 어른이지만 성숙하지는 않은 기영을 롱숏으로 찍어 대화가 전혀 들리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하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고, 이 장면이 미학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미학적인 태도가 영화 속의 감정을 차단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김태훈: 사실 그 장면에 열 줄이 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떤 말을 할까, 사과를 하기도 하고,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긴 대사가 촬영 직전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성 배우와 대화를 하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영이 이런 말을 했을까. 그 순간 처음으로 되돌아 가서 기영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기영에게는 저희 아버지가 그랬던 거 같은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담배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늘 제가 아버지를 본 모습은 구석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쓸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본인만의 유일한 위로였다고 생각이 드는데, 기영에게도 유일한 위로이자 삶의 낙이 담배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기영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가 고작 ‘담배 한 대 피울래?’라는 말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위로를 건네고, 길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하며 그 씬을 마무리하는 게 수많은 대사보다 그 감정이 더 큰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기영이 길호를 데리고 나와 벤치에서 이야기합니다. 저는 왠지 오현이 쫓아와 멀리서 지켜봤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오현은 길호가 부럽겠죠. 저는 그 장면이 있어야만 다음 장면에서 길호한테 짜증나고 화가 난 오현이 그 집에 가 털이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에 길호가 ‘이건 아니지.’하며 멈춰 버리고 떠나잖아요. 그것을 오현이 붙잡을 생각하지 않고 지켜봅니다. 오현이 그냥 보내지 못했을 거 같은데, 오현이라는 인물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현이 떠나가는 길호를 바라보며 붙잡지 않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빠진 장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되었고, 거기에는 내가 길호는 못 잡겠구나 하는 장면이 필요한 것 같고 길호를 못 잡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자기에게는 없는 기영 같은 어른이 길호에게는 있다는 사실에 못 막은 거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엉켰다는 느낌까지 받았어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태훈: 저는 그 과정이 기영이 아이들 무리를 찾아오는 과정에서 오현이 그런 감정들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끝까지 기영이 길호를 데려가려는 모습에서 오현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장면을 마무리했는데, 오늘 정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웃음) 그런 장면이 있었다면 훨씬 완성도 있었겠다는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맞은 듯이 들었습니다. (웃음)
정성일: 한편으로는 김태훈 감독의 스타일이 드라마를 만드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를 테면, 기영과 새엄마의 사이에도 드라마가 있는데 구태여 안 만들고, 초은과 드라마가 생길 수도 있는데 안 만들고, 오현 무리와도 드라마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안 만듭니다. 드라마에 대해 갖고 있는 감독의 거부감은 어떤 것인가요?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취향이자, 애티튜드이자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세계관인데, 그걸 알면 김태훈 감독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5년간 영화학교에서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정말 많은 학생들이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절대 안 놓칩니다. 다만 차이는 얼마나 물고 안 놓느냐죠. 또 어떤 학생들은 드라마가 생기는 순간들이 오면 너무 괴로워합니다. 필사적으로 안 만들려고 하죠. 저는 김태훈 감독이 그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김태훈: 정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웃음) 드라마를 보면 공감하면서 보기는 하는데, 이상하게 영화를 찍는 순간만큼은 그 영화 속에 있는 인물들이 진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가지고 오면 이상하게도 가짜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그래서 오히려 배우들도 오히려 연기를 못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든지, 다큐적인 부분을 가져온다든지, 아니면 원씬원컷으로 찍는 제작방식으로 만든다든지 같은 강박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성일: 기영은 폐수를 버리는 문제로 권반장과 크게 싸웠습니다. 보통 싸우고 나면 끝나거나 공장을 떠나는 등 결판을 내는데, 기영은 그러고 나서도 마지막 씬 직전까지 그 일을 계속합니다. 권반장은 까탈스러운 기영을 이 일에서 빼면 되는데, 권반장은 기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권반장과 기영을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상업 영화였다면, 즉각 떠오르는 건 권반장이 기영과 사귀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없으면 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기영도 이 일을 계속 하고 권반장도 기영을 버리지 않고, 감독은 이 문제를 서사로 해결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마 내일도 기영은 폐수를 버리고 갈 겁니다. 이렇게 놔두는 것이 왜 중요했을까요. 사실 이 장면은 안 찍어도 됩니다. 밤샘 작업하고 들어와 자는 걸로 찍었어도 됩니다. 이 구조로부터 영원히 기영이 못 빠져나올 것처럼 그린 영화도 아닙니다. 그냥 그만두고 빠져나오며 됩니다. 그래서 의아합니다. 드라마를 안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는 이 장면에 대해 설명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역시 (이 장면이) 수수께끼 같습니다.
김태훈: 폐수 폐기물 장면 같은 경우, 아버지의 폭력성과 맞닿아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영이라는 인물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은 인물이지만, 아버지처럼 점점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그 순간이 스스로가 가진 폭력성이 드러나는 순간이 폐수를 버리는 장면들과 비슷한 장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들이 만든 세상의 끝에 폐기물이 있고, 그런 폐기물을 버리는 기영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순간이라고 저는 상상을 했고, 개인의 폭력성이 자꾸 드러나는 그 순간 순간이 또 아버지가 되어가는 순간이고 기영이 가진 아버지와 같이 살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온화하고 따뜻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들이 제안에서는 기영이 가장 강력하게 내면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고, 그 갈등의 폭발의 끝에 폐수를 버리고, 초은에게 화를 내고, 길호를 데리고 온다고 찾아가서 겨우 화만 내고 돌아오게 되는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 기영이 길호에게 아버지가 되려 하지만 실패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성일: 제가 〈빅슬립〉에서 가장 굉장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영화가 중간에 갑자기 끝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날 수가 없는 영화인데 그냥 갑자기 끝납니다. 그 순간에 첫번째 반응은 ‘미친 거 아니야’입니다. 최상의 칭찬이죠. 결단이니까요. 기영은 내일도 폐수를 버리러 갈 것이고, 기영과 초은은 이 애매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겁니다. 잘 될 거라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기영과 아버지, 새 엄마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화장할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새엄마와 잘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길호의 내일은 영화에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길호가 다른 삶을 살겠다는 어떤 의지도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는 낙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어떤 실마리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낙원의 가능성을 제시한 다음에 이 영화는 어떤 해피엔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저는 이 순간에 어떤 굉장한 결정을 내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를 10년 가까이 쓰셨다고 하는데, 하루 이틀 쓰신 게 아니니까 시나리오의 엔딩을 이렇게 끝냈을 때에는 어떤 결단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엔딩에 대해 설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
김태훈: 사실 닫힌 결말에 대한 엔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엔딩을 끝낸 이유는 제가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오히려 벽에 부딪혔던 부분이 제가 아무리 위로를 전하려 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나리오 안의 세계도 구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최초로 돌아갔을 때, 제가 수업을 하며 만났던 매일 잠만 자던 친구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 영화도 더 이상 이들이 힘들게 더 스토리를 굴려서 이들의 힘든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 어설픈 영화도 당장 끝내고 이들에게 따뜻하고 깊은 잠을 재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엔딩을 맺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올해 제가 본 한국영화 중에서 〈빅슬립〉의 엔딩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 영화 중간 중간의 많은 지점이 의문스럽고 수수께끼같고, 저는 몇몇 장면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질문들도 했습니다만, 엔딩은 가장 좋습니다. 거의 결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죠. 김태훈 감독께서는 드롭아웃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작품에서도 계속 하게 되실까요?
김태훈: 형태만 바뀔 뿐 제가 쓰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때의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계속 다가오게 되더라고요. 어떠한 형태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계속 아이들의 이미지와 그 감정들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계속해서 이야기될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 멋진 엔딩을 한번 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태훈 감독의 다음 영화를 응원하면서 이 자리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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