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 월례비행 11월
염지혜 작가전: 꿈 속의 꿈에서 깼을 때
가소성 시대의 예술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Plasticity)
- 염지혜 론
글: 곽영빈 (미술비평가/영화학박사)
2017년 작업인 <커런트 레이어즈 Current Layers>의 엔딩 크레딧에서, 염지혜는 자신의 영감의 원천으로 “어도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유튜브, 셔터스톡, 그리고 수많은 온라인 사이트”를 들어 감사를 표한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농담도, 그에게만 고유한 인식도 아니다. 예를 들어 윤지원의 2015년 작업 <무제(스톡 푸티지 라이브러리)>(2015)의 부제인 ‘스톡 푸티지 라이브러리’란, 인터넷 환경이 일종의 디폴트이자 자연이 되어버린 ‘포스트 인터넷 아트’ 일반의 도서관이자 공동 포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이미지란 스톡 푸티지’라는 공리는 윤지원과 염지혜를 비롯한 ‘포스트 인터넷 아티스트’들의 영도(零度)이자 지평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1
하지만 이러한 지평(地平), 즉 바탕 또는 배경(background)과 형상(figure) 일반이, 고정적이거나 안정적이기는커녕 말랑말랑하고 변형가능하다는 것, 보다 적확히 말하면 ‘가소적(可塑的, plastic)’이란 것이 염지혜의 근원적 문제의식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분홍돌고래의 하룻밤>(2015)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분홍 돌고래 이미지가 웅변하듯, 염지혜의 작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형상과 배경들은 변형 가능한데, 이는 ‘아이슬란드(Iceland)’와 ‘고립(isolation),’ ‘고독(solitude)’이란 단어들을 조합한 제목의 인상과 달리, 바다에 부유하는 집과 반죽되는 밀가루, 자유롭게 바뀌는 얼굴 형상의 애니메이션들을 마치 뫼비우스의 띄처럼 보여주었던 <아이솔란드 5번 Isoland No.5>(2014)에서 예고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건 ‘밀가루 반죽’이다. 한국어로는 ‘조형적’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카트린 말라부가 적절히 환기해주었듯 원래 ‘plastic/plastique/plastisch’이란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은 ‘πλσσειν’(plassein)으로, 대개 ‘모양/형상을 만들다(modeler/mould)’는 정도로 이해되나 원래 점토나 밀랍 따위로 물건을 빚거나 만들다, 또는 말 그대로 ‘반죽하다’는 뜻을 갖기 때문이다. 2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2>(1991)에 등장한 ‘액체금속(liquid metal)’을 연상시키는 얼굴 이미지와 히말라야 산을 중첩시키며 시작하는 <우리가 게니우스를 만난 곳>(2015) 또한, 바로 이런 근원적 의미의 조형성, 즉 ‘가소성’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보다 명확하게 읽힌다. 게니우스는 로마신화에서 출생과 죽음을 돕는 ‘장소의 신’인데, 히말라야가 히말라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했으며, “느티나무”나 “풍요로운 뿔” 또는 “장승”처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히말라야 산의 고유성과 형상(성)을 근원적으로 무화시켜 버린다. 이러한 ‘신화적’ 인식은, ‘아마존 강에서 수영을 하는 처녀는 보뚜라 불리는 분홍 돌고래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아마존 설화를 전경화한 <분홍돌고래의 하룻밤> 뿐 아니라, ‘일식(日蝕)이 일어날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중국의 금기를 술에 취해 일식을 예측 못했던 천문학자들이 황제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라는 전설과 병치시키는 <검은 태양>(2019)에서도 반복되는 것으로, 디지털 화면 위를 떠도는 3D 영상과 글리치 이미지들로 가득한 염지혜의 작업과는 얼핏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긴장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현대의 마천루들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는 상대적 공간이 된다”(<우리가 게니우스를 만난 곳>)는 당대적 인식을 간파하면 다시 눈 녹듯 풀린다. 아프리카의 가나와 핀란드, 브라질 아마존 등으로 이어진 작가의 현실적 유랑이 담긴 <이방인(Solmier)>(2009)과 <원더랜드>(2012), <분홍 돌고래의 하룻밤>은, 한 때 ‘망명(exile)’이라는 토포스 속에서 다소 느슨하게 이해되기도 했지만, 이 모든 장소와 시대들은 궁극적으로 가소성(plasticity)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관류되는 것이다. 3
물론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근원적으로 “끔찍한 경험”이자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 규정했던 ‘망명’보다 ‘가소성’이 덜 고통스럽다는 말은 아니다. 2020년 전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웅변하듯, ‘인류세(anthropocene)’란 이름하에 끔찍하게 당대화된 ‘기후 위기’란, 지구라는 ‘바탕’과 ‘지평’의 가소성 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형상’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가소적인 것으로, 아니 지극히 가소로운 것으로 의문시한다는 근원적 의미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조들 중 하나인 ‘메르스(MERS)’ 사태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그것의 ‘비형상성’의 차원에서, 특히 이빨과 입을 통해 전개된 베케트의 <Not I>(1973)를 참조해 다룬 <은밀하게 빠르게>(2016)나, 2018년 대구미술관 개인전의 중핵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커런트 레이어즈>(다시 말해 <지구의 연대기적 연구>, <플라스틱글로 머럿틱한 삶의 형태>, <포토샵핑적 삶의 매너>), 4 태양이 잠시 보이지 않는 현상인 ‘일식’을 넘어, 환경문제로 인한 태양 자체의 반영구적 비가시화를 시사하는 <검은 태양>(2019)을 떠올려보라. “히말라야 봉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장소”라는 언급을 통해 <우리가 게니우스를 만난 곳>에서 작가가 보여준 자기 모순적 안간힘은, 남극에서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는 빙하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고 없다. 5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염지혜의 작업을 (에이젠슈타인이나 벤야민을 느슨하게 환기하는) ‘몽타주(montage)’나 (호미 바바의) ‘잡종성(hybrid)’, 또는 (바우만의 핵심 토포스였던) ‘액체성(liquidity)’의 연장선에서 독해하려는 게으름들 역시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염지혜의 문제는 요소들의 혼재나 병합, 또는 몽타주를 통한 잠재적 병치 가능성이 아니라, ‘요소들 자체의 가소성(elemental plasticity)’이며, 그것이 내재적으로 수반하는 ‘형상과 배경 자체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잘 알려졌으나 여전히 제대로 독해되지 않는 유명한 텍스트에서, 벤야민은 영화의 끝없는 “개선가능성/수정능력(Verbesserungsfähigkeit)”을 중요한 특징으로 드는데, 그 예로 12만 5천미터 길이의 촬영분에서 3천미터로 추려져 편집된 찰리 채플린의 영화 <파리의 여인 A Woman of Paris)>(1923)를 든다. 한마디로 영화란 잠재적으로 무한한 조합으로 편집/수정될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통해 영화는 역설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숭앙했던, 혹은 벤야민의 흥미로운 관찰을 빌면 영화와 같은 고차원적 개선가능성의 기술이 없었던 “그들의 [낮은] 기술 수준 때문에 예술에서...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영원한 가치”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고 지적한다. 영화처럼 무한히 “조립 가능한 예술작품의 시대”에, 한 번 만들어지면 변형될 수 없는 조각(der Plastik), 즉 “조형예술(der Plastik)이 몰락(Niedergang)”하는 것은 “불가피(unvermeidlich)”하다는 것이다. 6
우리의 진단은, 벤야민과 이후의 번역자들이 단순히 ‘조각(der Plastik)’으로만 환원시켜온 ‘조형예술(der Plastik)’을 그 ‘가소성(die Plastizität)’의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재규정함으로써, 다시 말해 그리스적 ‘근원(Ursprung)’임과 동시에 20세기 근대성의 산물이라는 이중적이고 시차적인 의미에서 ‘플라스틱’으로 되돌아간다. 열에 녹아 다종다기한 자연물, 또는 퇴적물들과 엉겨 붙은 플라스틱이 암석화된 것을 가리키는 ‘플라스틱글로머레이트(Plastiglomerate)’를 지구의 현상태와 등치시키는 염지혜의 작업은, 적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가소성 시대의 예술작품’인 것이다. 7
- 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곽영빈, 「스톡 푸티지의 추억, 혹은 무제(Untitled)의 역사: 윤지원론」, 『여름의 아홉 날』, 서울: 시청각, 2019, 4-25쪽. [본문으로]
- 2) Catherine Malabou, L'Avenir de Hegel: Plasticité, Temporalité, Dialectique, Paris: Vrin, 1996, p. 20. [본문으로]
- 3) 2012년 귀국한 그가 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 제목은 <망명에는 보이지 않는 행운이 있다>(2015)로, 심보선 시인의 싯구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었다. [본문으로]
- 4) Edward Said, “Reflections on Exile,” in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 171. [본문으로]
- 5) 대구미술관 개인전은 <그들이 온다. 은밀하게 빠르게>, <커런트 레이어즈>, <미래열병> 삼부작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지구의 연대기적 연구’, ‘플라스틱글로머러틱한 삶의 형태’, ‘포토샵핑적 삶의 매너’는 하나의 단채널 영상작품인 <커런트 레이어즈>를 구성하는 세 개의 장으로서, 각각 독립적으로도 작동한다. [본문으로]
- 6)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Vol. 7,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89, p. 361. [본문으로]
- 7) 벤야민 자신이 번역한 프랑스어판에서 “der Plastik”은 “la sculpture”로 번역되어 있고, 영어판들 역시 이를 따라 sculpture로 번역한다. “La décadence de la sculpture [der Plastik] à l'époque des oeuvres d’art montables apparaît comme inévitable” Walter Benjamin, “L’oe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version française,” in Écrits français, Gallimard, 1991, pp. 49. “In the age of the assemble artwork, the decline of sculpture is inevitable.”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Its Technical Reproducibility: Second Version.” in Selected Writings Vol. 3, 1935-1939, trans. Howard Eiland and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 1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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