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프라이드시네마2024 〈겨울나기〉 장준영 감독 인터뷰
떠나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글입니다.
어떤 겨울은 우리를 또다시 외롭게 만들지만, 어떨 때는 그 끝에 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돌아오듯,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떠나가는 것들은 정리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장준영 감독을 만나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들을 들여다보며 조용한 용기를 건네는 〈겨울나기〉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겨울나기〉 잘 봤습니다. 6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만큼,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올해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이어 썸머프라이드시네마2024까지, 또 한 번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된 소감을 들어보고 싶어요.
썸머프라이드시네마에 〈겨울나기〉가 초청됐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나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했을 때는 아무래도 가족이나 지인들이 보러 오기가 조금 어려웠었는데 이렇게 서울에서 또 한 번 영화를 다 함께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작품이 감독님의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첫 장편으로 각자의 겨울을 나며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 이 영화의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겨울나기〉는 2년 정도 오래 휴학을 하면서 만들게 된 영화예요.
학교 프로그램으로 세 편의 단편을 찍으면서 저도 모르게 다음 영화는 더 힘을 줘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스스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딱 서른의 나이에 휴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저에게 흘러들어오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중 제일 친숙한 소재가 가족이었고 가족을 중심으로 저에게 다가왔던 여러 감정과 상황들을 시나리오로 써 내려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연’을 ‘어디서나 애매한 나이의 평범한 서른 중반의 한 여자’로 설정하신 걸까요?
네 맞아요. 서른은 젊은 나이지만, 저는 그 당시에 서른이 되게 애매한 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나에게 30대 중반의 나이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얼마나 더 권태로움이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여러 생각과 감정을 ‘연’에게 투영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 걸레로 바닥을 열심히 닦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는 양말복 배우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돼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는데요.
이 영화가 크게는 ‘연’의 서사로 흘러가기는 하지만, 저는 계속 순환하면서 반복되는 세대와 사람들 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시점이 아닌 과거 시점의 ‘숙희’의 모습을 먼저 보여줬고 그 당시의 ‘숙희’도 지금의 ‘연’처럼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답답하고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모습이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이 가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연인 ‘수’에게 “가족? 다 감정노동이야.”라고 체념한 듯 말하는 ‘연’의 장면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감독님은 가족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제가 가족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캐릭터에게 부여했던 것 같더라고요.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은 자의적인 선택으로 가족이 된 게 아니고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은 법적으로나 아니면 어떤 의지와 마음만으로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되게 이상하면서도 재밌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수’가 이루고 싶어 하는 가족 관계와 ‘연’과 ‘숙희’의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가족 관계가 저에게 흥미로운 지점이었어요. 그래서 어쩌면 가족이 된다는 건 되게 무의미한 일이고 단순히 마음에 따른 일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쓴다는 명목으로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캐릭터 한 명, 한 명을 구상하시게 된 과정을 들어보고 싶어요. 미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첫째 ‘정’, 홀로 치매 증상을 보이는 엄마를 모시며 동성 연인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모두 불안해 보이는 주인공 ‘연’ 그리고 미혼모가 되어 돌아온 막내 ‘희’까지. 세 자매의 캐릭터를 각각 이렇게 설정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단순하게 한 인물로부터 출발했던 것 같아요. 지금 저 자신조차도 제가 나중에는 어떤 상황에 처하고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는 것처럼 한 인물 안에서도 다양한 인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쩌면 ‘연’이라는 캐릭터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게 ‘정’이 될 수 있는 거고 ‘희’가 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인물들의 이름을 외자로 지은 이유를 많이 물어보시는데요,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에 접근하게 되면서 인물들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고 특별한 이름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가장 보통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반대로 더 흔하지 않은, 독특한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엄마가 도우미 이모님을 몇십 년 전 자신이 기다렸던 여자로 착각하는 모습을 통해 과거 그녀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음을, ‘희’와의 대화를 통해 어렸을 적 ‘연’이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촌오빠에게 추행당했음을 조심스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정보를 제시하기보다 대사나 상황만으로 정보를 아주 조금씩 드러내면서 관객이 인물들의 과거를 예측할 수 있게끔 연출하셨어요.
저는 어떤 사람의 극적인 인생사에서 되게 슬펐다거나 괴로웠던 감정들이 있을 때, 인물의 감정은 굉장히 솔직하되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오히려 되게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사나 상황도 함축적이거나 많이 드러내지 않는 쪽으로 연출했던 것 같아요. 원래 제 연출 방식이 이러기도 하고 휴학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문학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에는 인물의 직접적인 감정이 온전히 표현된 지점들이 많이 없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어쩌면 이런 문학적인 표현법에 매료돼서 인물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방식이 시나리오를 쓸 때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것 같아요.
이와 비슷하게 응급실 장면에 관해서도 질문드리고 싶어요. ‘연’과 ‘수’는 익명 메신저 어플로 알게 된 후 서로의 닉네임만 아는 상태로 계속 만남을 이어가요. 결국 ‘연’은 아픈 ‘수’에 대해 묻는 간호사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책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연’과 ‘수’가 본인을 드러내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궁금해요.
애매한 기로에 놓인 30대를 그려낸 만큼, 저는 이들이 삶의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에 조금 권태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인물에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도 ‘연’이라는 인물은 어떤 권태로움이 있을 것이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외로운 마음으로 누군가와 만나는 것에 더 편하고 익숙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세 자매와 엄마가 함께 대게를 먹는 장면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데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각자의 마음에 짐이 있었던 거잖아요. 엄마가 오랜 미안함 때문에 계속 첫째 ‘정’에게만 게살을 발라서 그릇에 얹어주는 것처럼요. 감독님께서도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시다 보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씩 있으실 텐데 그중 〈겨울나기〉에서 연출적으로 특별히 신경을 썼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으신다면요?
대게를 생각하니까 갑자기 울컥하는데요. 대게 먹는 장면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일단 저희 엄마가 대게를 정말 좋아하세요. 그래서 가족들이랑 대게를 한 상 가득 펼쳐 놓고 먹을 때마다 저는 게살을 잘 못 바르는데 엄마는 되게 꼼꼼하게 잘 발라서 드시거든요. 그렇게 둘러앉아서 다 같이 대게를 맨손으로 빨아 먹는 모습이 어쩌면 타인이 볼 때는 되게 기묘하고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족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족끼리 대게를 먹는 장면을 영화에 넣었고요.
그리고 연출적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은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인 것 같아요.
제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기도 한데요, 모든 일들이 파도처럼 거세게 몰려왔다가 이내 잠잠해지면서 편안을 느끼는 것처럼 ‘연’이 집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가족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하나씩 비추는 걸 보면서 저도 마음속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되게 좋아해요.
그런 ‘연’이 식사 준비를 하면서 누군가를 마중 나갑니다. 감독님은 ‘연’을 찾아온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셨어요? 저는 엄마랑 자매들이 다 같이 들어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거기서 딱 영화가 끝나더라고요.
저는 ‘연’이 문을 열고 누군가를 맞이하는 게 사랑 혹은 가족의 형태로서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봐서 찾아온 사람이 ‘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과 ‘수’가 나중에는 서로의 이름도 알고 서로의 집도 자주 놀러 가는 그런 관계로 차차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 역할의 장선 배우와 엄마 역할의 양말복 배우를 포함한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좋았는데요, 특히나 이 영화는 감정이 높이 치솟을 법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담담하게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이런 감정 표현에 대해 현장에서 배우들과 특별히 이야기 나눈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되게 많았어요. 오히려 배우들의 감정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리허설이나 현장에서 모두 최고의 감정을 보여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덩달아 같이 글썽거리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그 장면들을 영화에 직접 쓰지는 못했어요. 최대한 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었고, 배우와 감정이 저에게보다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제가 연출로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극 중 인물들의 감정이 관객들에게 먼저 격하게 다가가게 되면 제가 연출자로서 뭔가 못다 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인물들의 감정과 감정에 기반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연출에 무조건적인 정답은 없으니까 저도 아쉬운 부분들이 분명히 있기는 한데요,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최대한 감정 표현은 솔직하되 감정을 담아내는 과정에서는 계속 주저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것 같아요. 사실 여관 장면에서도 장선 배우와 양말복 배우가 엄청 우셔서 저도 같이 울면서 찍었어요. 저로서도 삭제하기에 되게 아쉬운 얼굴들이긴 했지만, 이야기와 상황이 관객들에게 먼저 감정적으로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잘라냈던 장면들이 몇몇 있었어요.
아무래도 가장 어려웠던 감정은 ‘수’와의 장면들이었어요. 특히 응급실 장면을 찍을 때는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고 ‘연’이 아픈 ‘수’의 집을 찾아갔을 때도 장선 배우뿐만 아니라 저조차도 그 당시의 ‘연’의 마음과 감정 상태에 다가가기가 조금 어려워서 그 감정을 잡기까지 계속 촬영이 딜레이됐던 기억이 나요.
영화에서 ‘연’은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연인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무언가를 자신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모르는, 그런 답답함이 계속 쌓여있는 인물 같았어요. 이렇게 그동안 나만 힘들고 나만 많은 짐을 홀로 짊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연’이 모두에게 각자의 힘듦이 있었고 각자의 짐이 있었다는 걸 천천히 깨닫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연’이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감독님께서 ‘연’의 미래를 한 번 상상해 본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반복적인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쩌면 ‘연’의 미래도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숙희’의 빈자리처럼, ‘연’도 끊임없이 무언가에 얽매여서 계속 본인만의 겨울나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 거거든요. 또 그동안 막혀있던 응어리들이 다 수면 위로 올라온 후에 ‘연’이 그것들을 소화해 내는 시간을 보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스스로 소화를 해내려고, 이겨내 보려고 애쓰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연’의 성장을 후반부에 나오는 불꽃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함께 여행을 떠난 그날 밤, 여관에서부터 집의 여러 공간에까지 불꽃이 연이어 피어오르는데요, 이 불꽃이 의미하는 바가 따로 있을까요? 그 불꽃을 기점으로 ‘연’이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 장면을 을왕리에서 찍었는데 실제로 을왕리에 가보면 불꽃놀이를 많이 하더라고요.
전에 제가 여행을 갔을 때도 영화에 나온 같은 숙소에서 묵었었는데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폭죽이 퉁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늦은 새벽이지만 누군가는 깨어 있다는 안도감도 들고 같이 있는, 외롭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가족에게도 그런 좋은 자장가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그 불꽃은 어쩌면 조용한 희망 같은 거였는데 그 희망들이 삶을 살아갈 때 보이진 않아도 그들이 떠나고 남겨진 공간에는 계속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인물들에게 직접적으로 불꽃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냥 이들이 떠나갔던 공간들에 하나씩 피어오르게끔 했어요.
다음 작품을 위해 구상 중인 아이디어나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크고 작은 주제들이 있으실까요?
이번 작품은 조금 짧은 분량의 장편이었지만, 더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장편 시나리오를 계속 쓰고 있어요.
50대 중반 여성의 이야기인데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50대 중반 여성이 일반적으로 가지지 않는 감정들과 여러 상황을 담은 작품입니다.
마지막으로 〈겨울나기〉가 관객들에게 어떤 영화로 다가갔으면 하나요?
제가 문득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썼다면, 〈겨울나기〉가 문득 우리 각자의 삶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와 잠깐동안 맴돌다 갈 수 있는 그런 영화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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