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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Playing/정기상영 | 기획전

3월 인디포럼 월례비행 '김현정 감독 단편선' 비평

by indiespace_은 2020. 3. 26.




인디포럼 월례비행 3월: 영원한 화자 '김현정 감독 단편선'



글: 조민재 감독(<작은 빛> 연출)



나는 당신이 모르는 공간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곳은 오로지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고 당신이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 헤집고 다녀도 숨어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열어주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열어주는 그 공간은 화자가 어느 한 시기 머물렀던 곳이다. 천천히 공간을 둘러본다. 그리고 나의 공간을 떠올린다. 화자의 공간 한 면이 나의 공간 한 면과 포개어진다. 나눠진 두 개의 공간은 포개져 하나의 블록을 만든다. 화자의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블록 안을 헤매게 된다.



작년 11월 김현정 감독과의 짧은 만남에서 감독은 개인의 서사로도 충분히 좋은 서사를 만들 수 있다고 스치듯 말했다. 나에게는 그 말이 좋은 서사라는 거대한 벽을 담담하게 마주하면서도 때로는 그 앞에서 흔들리는 말처럼 들렸다. 나와 고민이 다르지 않기에 그 말을 따라 감독의 영화를 다시 깊게 보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세 작품  <은하비디오>, <나만 없는 집>, <입문반>을 오랜 시간 나눠서 보았고, 짧은 시간 묶어서 보았다. 



<은하비디오> 혼자 비디오 가게를 운영해 온 은하가 이사를 앞두고 있다. 은하가 오랜 시간 마음을 담았을 공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정리하기를 미뤄두었던 마음을 발견한다. 은하는 그 마음을 마주하기 위해 근원을 찾아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떠나가는 은하의 뒷모습은 거세게 흔들린다. 은하는 자신의 마음의 공간과 같던 비디오 가게를 말끔히 정리하고 떠나간다. 


<나만 없는 집> 세영은 끊임없이 마음을 채우려는 듯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가족들은 세영의 말을 좀처럼 받아 주지 않는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언제나 세영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세영이다. 걸스카우트가 하고 싶은 세영은 언니의 예상치 못한 반대에 겪는다. 그 과정에서 항상 모든 마음을 표현했을 거 같은 세영의 마음 깊숙한 곳에 참아두었던 마음을 터트린다. 잠시나마 엄마의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세영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일상에서 다시 마음을 채우려는 듯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입문반> 가영은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가까워지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 때문에 쉽지 않다. 가영은 함께 공부하는 민정의 관심으로 다른 동료들과도 친해지고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민정은 가영에게 성적 폭력을 가하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린다. 가영은 민정의 폭력에 대해 폭로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가영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버스마저 놓쳐버리고 만다. 가영은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곳에 머무른다.  

 


세 편의 작품을 보고 나면 과거의 기억을 꺼내서 이야기하게 된다. 살아온 시대와 경험이 다르더라도 하나로 관통되는 지점을 발견하고 더욱더 깊게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것이 단순히 감독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듯 감정과 공감을 중시했기 때문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빈약하게 느껴졌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작아 보이던 공간이 커다랗게 확장됨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 개의 공간을 세심하게 방문하다 보면 내 속에 숨겨두었던 공간을 방문하게 된다. “오래전 이미 지나간”이라는 말로 미뤄두었던 흔들리는 마음을 발견하고 곧 닫으려 하지만, 화자가 들려주는 정직한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쉽게 닫지 못한다. 화자의 이야기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내 이야기도 한 장씩 끼워 넣게 된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감독의 개인의 서사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개인의 서사로도 충분히 좋은 서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감독의 말에서 과거 흔들리는 마음을 느꼈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서사를 그리는 방식은 좋은 서사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풍부하게 확장성이 좋은 큰 세계관을 그리는 방식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이 커질수록 많을 것을 담을 수 있고 어쩌면 많은 사람의 마음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부풀린 세계관은 그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한 체 납작해져 버린다. 작아 보이던 김현정 감독의 서사가 커다랗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독의 영화는 커다랗게 빙산의 일각을 수직으로 보여주는 구조가 아니라 청자들을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끌어들여 수많은 개인의 공간들을 병렬로 연결해 이야기의 크기를 커다랗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늘 흔들리는 인물들의 마음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바라보게 만든다. 흔들렸던 정신적인 것을 영화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 담아내지만, 절대 잡아두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흔들리는 그 상태 그대로 왜곡 없이 담아내려 한다. 그것은 아마도 감독이 과거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흔들리는 마음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은 소설가 김애란의 동명 소설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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