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 월례비행 2월: 좋이 적요로운 것들 <여름날>
글: 송효정(영화평론가, 인디포럼 상임작가)
스처간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의지도 계획도 없이 일상을 소요한다. 오정석 감독 의 첫 장편 <여름날>은 익명의 얼굴들과 무력한 나날을 따라간다. 영화 속 대화는 대개 무의미하며 나날의 일과는 우연한 촉발을 따르며 서사는 일정한 흐름과 결절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도착과 떠남이라는 여행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마저 무위한 일상 속에 녹아버린다.
승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 거제도로 내려와 컨테이너에서 기거한다. 시절은 한여름, 거제도엔 바캉스 객이 한창이다. 서울서 대학을 졸업한 뒤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낙향한 그녀에겐 어떤 계획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서울로 돌아갈 것인가 고향에 남을 것인가 삶은 여전히 미지수다. 토착민도 이방인도 아닌 애매한 처지의 승희는 거제에 있는 외가 가족들 혹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어딘가 조금씩 벗어나 있다.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좀처럼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이 의지 없음은 영화를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휴양지영화 혹은 로드무비로 분류하는 일탈의 영화에조차 어떤 지향성, 가령 현실의 손상에서 벗어나 치유와 회복을 갈구하는 해방의 의지가 작용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행을 통한 힐링이나 애도,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카메라는 종종 무의미해 보이는 승희의 뒷모습과 옆모습 그리고 자는 얼굴을 길게 비춘다.
무위와 평범함을 호소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렵다. 이는 이들과 대조되는 번잡한 소음와 이 색적 사건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무위와 평범함의 호소란 니힐리즘이나 돌출된 활력으로 귀착되기 쉽다. 그런데 <여름날>은 한없이 무기력한 흐름으로 승희의 나날을 따라가면서도 니힐리즘이나 의도된 활력을 영화를 귀결 짓지 않는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한가로운 일정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잠을 잔다. 슬픔과 고립에 무너지지도 않고 새로운 삶의 좌표를 세워야겠다는 밭은 조바심도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무의미, 적요로운 배회, 결실 없는 만남의 반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름날>은 동시대 독립영화 범주들 가령 세대론적 감성구조, 현실 반영적 의제 혹은 응집된 감정적 격렬함과 매우 동떨어져 보이는 영화다.
과소의 의지, 익명과 고립, 방관자적 조망이라는 작품의 특징은 영화 속 두 번 반복되는 낚시에서 두드러진다. 우연히 발견한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나간 승희는 거제 청년을 만나 낚시를 하지만 두 번 다 물고기를 낚기는커녕 얽힌 낚싯줄을 푸는 데 오히려 절절맨다. 수확 없이 돌아오는 낚시는 이 영화의 형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만 감독은 이 메타포에 큰 힘을 주지 않고 자연스레 흐름 속에 녹여낸다. 거제 청년과 승희 사이에는 에로틱한 긴장감 없는 참으로 투명한 우정과 교감의 정서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고향을 떠나기 전 승희는 거제 청년을 찾아 공장 앞으로 간다. 공장을 나오는 노장자들의 숱한 얼굴들 속에서 어쩌면 승희는 거대한 익명의 얼굴과 마주쳤을지 모른다.
조망(looking)과 응시(staring)를 구별하며 수잔 손탁은 자발적이고 유동적이며 집중력에 따라 관심적이기도 무관심적이기도 한 것이 ‘조망’이라면 고정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강제된 것이 ‘응시’라 했다. <여름날>은 관조적 카메라로 승희를 따라가는 무위로운 조망의 영화이며, 니힐 리즘의 측에도 의지의 측에도 강제되지 않은 채 낯선 유배지를 소요하는 작품이다.
<여름날>이 보여주는 의지와 정념의 결여, 목적과 지향의 모호, 현실 반영적 의제나 세대적 공감대의 부재함에서 우리는 이들 없이 순수하게 영화적인 경험에 도달하겠다는 역설적 의지를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목적에 긴박되어 있지 않은 이 좋이 적요로운 나날의 배회 끝에 그녀가 해질녘 홀로 도달한 산 정상에는 오랜 왕조의 왕이 유폐되었다는 ‘폐왕성’의 잔해가 남겨져 있다. 그 땅끝엔 가보지 못한 섬과 바다와 아직은 보이지 않는 대륙들이 구름 속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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