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을 더듬어 현실의 나를 오롯이 대면하다 <누에치던 방>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2월 2일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이완민 감독 | 김새벽, 이상희, 이주영 배우
진행 이동진 영화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과거와 현실이, 그리고 낯선 인물들이 낯선 방식으로 얽히고설키기 시작한다. 모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영화의 전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의 감정과 과거를 통해 연대를 모색하는 새로운 관계의 출현이다. 잠실이라는 공간을 에워싼 특유의 분위기와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누에치던 방> 인디토크에 이동진 영화평론가, 이완민 감독, 김새벽, 이상희, 이주영 배우가 함께 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이하 진행) : 개봉 3일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신지.
이완민 감독(이하 감독)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3월이 되면 알 수 있지 있을까. 그냥 상처받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진행 :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또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이상희 배우(이하 이상희) : 굉장히 디테일한 상황 환경 묘사가 많아서 대본을 읽기가 어려웠다. 감독님에게 솔직히 제 심경을 말했더니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셨다. GV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멋쩍은데 감독님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웃음) 닮고 싶고 곁에 두고 싶은 좋은 사람이다. 이 분과 함께 한다면 영화가 망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진행 : 김새벽 배우님께 질문 드리고 싶다. 전철에서 감독을 처음 만났고 두 분이 전화번호 뒷자리가 같다는데, 엄청난 인연이 아닌가 싶다. 영화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김새벽 배우(이하 김새벽) :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나온 다른 영화 시사회에서 처음 뵙고 같은 방향의 전철을 타게 되었다. 감독님께서 전화번호로 연락을 남겨주셨는데 뒷자리가 똑같았다. 제 생일과 전화번호 뒷자리가 같은데, 거기서 느낌이 왔다. 이 분도 생일이 같은 게 아닐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둘 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웃음) 감독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아주 짧은 쪽지였지만 거기서 사람이 느껴졌고 감독님께 반하기도 했다.
진행 : 이주영 배우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이주영 배우(이하 이주영) : 단번에 이해가 잘 되는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연달아 두 세 번을 더 읽었다. 맥락의 측면도 있었고 생소한 단어도 있었고. 그래서 거의 공부를 하다시피 했다. 감독님을 처음 뵌 건 추운 겨울이었다. 여태까지 해온 작업과는 다른 작업이 될 수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팀과 함께라면 내가 그냥 뛰어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주저 없이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역할이나 분량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이 퍼즐들이 어그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행 : 캐스팅이 흥미로운 영화다.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 면면이 연기가 탁월하다. 25년에 걸쳐 오고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1인 2역과 2인 1역이 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도 한다. 캐스팅을 할 때 원칙 같은 게 있었나.
감독 : 10대 역할과 30대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캐릭터를 나누어 생각했다. 유일하게 1인 2역을 한 김새벽 배우의 케이스는 조금 달랐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의도였다. 실제로 완전히 다른 무관한 인물로 봐도 되고 유령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도 된다.
진행 : 배우 분들은 연기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했나.
김새벽 : 감독님께 (연기하는 인물이) 같은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여쭤봤는데 어느 쪽도 상관없다고 하더라. 다시 물었더니 둘이 달랐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확실하게 단언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감독님이 준 몇 가지 키워드에 맞춰서 적당히 맞춰가려고 했다. 예를 들면 감독님이 자주 해준 말인 ‘빡침’, ‘정념’, ‘자기 검열 없는 상태’ 같은 단어다. 이런 단어들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다.
이상희 : 과거를 표현하는 것 자체는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어쨌든 고등학생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님이 ‘머리를 묶으면 고등학생처럼 보일 거예요’라고 하시더라. 자신이 없어서 가발을 사달라고 했더니 급하게 산 것 치고는 비교적 저렴하게 하나 구했다. 길이에 맞춰 감독님이 가발을 직접 잘라줬다. 거칠어 보일 수도, 티 날 수도 있는데 그게 나름대로 순수해 보이기도 하다며 합리화한다.(웃음)
이주영 :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홍승이 선배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성인이 된 '성숙'의 습관이나 외모 같은 걸 모사해야 했다면 더 고민할 부분이 많았을 텐데, 감독님이 제가 고민했던 것들을 없애는 매개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장면이나 감정에 집중하는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오히려 홍승이 배우님보다는 김새벽 배우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게 해주셨다. 저도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긴 하다.
감독 : 이주영 배우를 오디션에서 만났을 때 홍승이 배우님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질문 중의 하나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결론이 없는 상태에서 인물이 어떻게 나아가는 지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어 갔다.
진행 : 제목의 의미가 잠실의 뜻풀이인데, 영화의 주무대가 잠실에 있는 아파트다. 감독님의 개인적 추억과도 관련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굳이 '누에치던 방'이라는 우리말로 바꿔서 제목을 정한 이유가 있나.
감독 : 옥탑방이나 고시원 같은 공간과 연결 지을 수도 있고 잠실이라는 지역과도 연관시킬 수도 있다. 보다 직접적이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잠실에서 학교를 다닐 적에 창가에 앉아 딴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이 잠실의 뜻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 때 잠실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누에치던 방'으로 풀어 쓴 건 잠실이라는 지명과 과도하게 연결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관객 : '성숙'과 '익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독 :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동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결혼 관계가 아니더라도 그런 동거관계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관객 : 홍승이 배우가 맡은 '성숙'이라는 인물만이 유일하게 모든 캐릭터와 접점이 있는데, 어떤 생각을 하며 캐릭터를 구성했는가.
감독 : 처음 생각했을 때는 우리가 소위 운동권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 주려는 의무감을 가진 캐릭터를 상상했다. 다만 찍는 과정에서 이런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를 받았고, 이런 걸 무조건적으로 대상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을 해주셔서 그 인물에 대한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그게 영화 속에서 드러난 것 같다.
관객 :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감독 : 먹는 장면, 잠을 자는 장면, 휴식하는 장면이 일상과 가깝다고 생각해서 넣었다. 특별히 의식하고 넣은 장면들은 아니다.
진행 : 초판이 138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어떤 장면들이 삭제됐나.
감독 : 분량을 어떻게든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화장실도 다들 가고 싶어하실 것 같고.(웃음) 자의식 과잉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영화 문법과는 다르게 영화가 진행되는데, 길이까지 길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장면도 있다. 누군가가 '채미희'를 촛불동지라고 부르자 '조성숙'이 촛불동지는 부정적 뉘앙스가 아니냐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인데, (2016년의 촛불혁명 과정을 거친 마당에) 촛불동지라는 표현을 굳이 옹호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뺐다.
관객 : 포스터를 보면 배우들이 무채색 옷을 입고 있는데, 왼쪽으로 갈수록 색이 진해지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옅어진다. 김새벽 배우의 옷만 유채색인데 영화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감독 : 포스터는 제가 아닌 다른 분들이 제작했는데, 영화의 채도를 따라간 게 아닐까 한다. 현실을 찍은 장면은 낮은 채도로, 현실이 아닌 장면과 과거 장면은 누렇게 처리했는데, 현실과 비현실을 대비시키면서 과거는 환상이자 노스탤지어라는 생각을 담고자 했다.
관객 : 영화에서 남성이 두 명 등장한다. 남성 캐릭터를 굳이 등장시킨 이유가 궁금하다.
감독 : 여성적인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목적의식이 있다기 보다는 늘 제가 마음속에 가졌던 반감의 표현이다. ‘여성이나 남성은 꼭 이런 이미지로 그려져야 해’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제약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남성 캐릭터들을 넣었다.
관객 :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프레임을 짰다고 하셨는데, 추모나 애도가 아닌 희망의 메시지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선 같은 게 영화 속에 있는가.
감독 : 저는 이 영화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직면하는 것 자체가 변화를 예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인물들이 과거에 매여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관객 :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다. '미희'가 '성숙'과 친구가 되는 와중에 '성숙'이 동거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미희'가 전에 만났던 남자를 '성숙'이 만나기도 한다. 남성 캐릭터를 그런 관계 속에 둔 이유가 궁금하다.
감독 : 인물이 너무 많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가기도 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그리기가 모호해서 있는 사람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가자는 생각을 했다. 굳이 연애 관계에 집중한 건 아니다.
진행 : 마지막 인사말과 함께 GV를 마치고자 한다.
감독 : 해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뭔가를 잔뜩 적어왔다. 영화가 좀 혼란스럽다는 의견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가 아무거나 막 던지는 건 절대 아니다.(웃음) 여러 고민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가 여러분이 각자의 삶에서 고민하는 부분에 대한 재료가 됐으면 한다.
이주영 : 관객 여러분들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 감독님이 다음 작품도 멋지게 찍을 수 있게 좋은 입소문 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상희 : 독립영화를 많이 접하지 않는 분들이라면 영화를 어렵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우려했다.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분명 있지만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셔서 너무 감사하다.
김새벽 : 시나리오에 ‘사람을 그렇게 잘라내냐. 너는 나한테, 나는 너한테 영향을 줄 수 있는데 그냥 잘라내 버리면 아무 것도 못하지 않느냐’라는 대사가 있다. 저에게는 그 대사가 이 영화의 전부다. 영화를 찍은 뒤에 과거의 불편했던 관계를 대면하는 계기가 생겼는데, 그게 겁냈던 것만큼 두렵지는 않더라. 여러분도 이 영화를 통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와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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