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것 인디포럼 월례비행 <우경> 대담 기록
일시 2017년 11월 29일(수)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응수 감독, 유운성 평론가
진행 변성찬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신 님의 글입니다.
월례비행의 11월 작품은 김응수 감독의 <우경>이었다. 10년 전에 이미 촬영을 마쳤지만 이제서야 뒤늦게 관객들을 방문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경>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한겨울에 영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상영이 끝나고 김응수 감독, 유운성 평론가와 변성찬 평론가의 대담이 있었다.
변성찬 평론가(이하 변) : 영화에 제작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데요, 올해 공개된 신작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전에 촬영된 영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언제 촬영했는지, 어떤 계기로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응수 감독(이하 김) : 제작연도를 써넣지 않는 태도는 앞으로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항상 써놓으면 바꾸고 그래야 하더라고요. 실제로 찍은 건 10년 전입니다. 영화를 제작한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전작인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찍고 나서 후반작업을 진행할 때 유운성 평론가가 사적으로 후반작업을 돕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때는 마다했는데, <우경>을 찍고 싶어졌을 때 연락을 했죠. 그때 보내주겠다던 돈, 지금 주면 안되겠냐고.(웃음) 당시에 정말 사적인 동기로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상 유운성 씨가 제작의 실비를 다 대주신 영화입니다. 자막에 기재되어있죠. 그런데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몰려서 최종 작업이 늦어졌고 10년 만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변 :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제가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유운성 평론가를 통해서였는데요, 당시에 딱 한 마디를 하시더라고요. “좋아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영화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시죠.
유운성 평론가(이하 유) : 영화 내적인 이야기는 좀 이따가 자세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를 처음 본 것도 벌써 꽤 오래 전입니다. 한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김응수 감독님이 충주에 계실 적에 집을 방문해서 감독님이 만든 네 편의 가편집본을 내리 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좋게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도 오늘 처음 본 겁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데 차근차근 얘기해보겠습니다.
변 : 이 영화는 정말 제목에 충실한 영화죠. 단 두 장면을 빼고는 '우경'이라는 인물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우경이 눈이 잘 안보인다는건 알겠는데, 그 사실이 좀 애매하게 표현된 부분이 있습니다. 스틱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후반부에는 맹인에게 할애되기 힘든 시점숏이 활용되기도 했고요.
김 : 주인공은 실제로 유전적인 이유가 있어서 앞을 못 봐요. 희미하게 보인다고 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동네에 직선으로 나있는, 장애물이 없는 길은 그냥 쭉 걸어가기도 하는데, 잘 모르는 길의 경우에는 저희가 가이드를 하기도 하고, 본인이 어떤 식으로든 감지를 했습니다. 우경이 실제로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닌데, 스틱을 보여주는 순간 영화의 어떤 지점이 와해되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시각장애인에 대한 영화구나' 식으로 딱 닫혀버릴 것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영화에는 그런 명확한 단서들보다 낯선 것들을 많이 담으려고 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사실 저도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어요. 촬영 첫 날부터 뭘 해야 하고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몰라서 당황을 많이 했고 그런 흔적이 영화 안에도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찍으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수단들이 무용지물로 변해버리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음악을 부가적으로 더했다면 내면에 대한 묘사를 더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거죠. 저는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시점 숏에 관해서는, 그 숏을 이 인물에게 보여주고 싶은 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은 우연하게 포착한 느낌이 잘 살아있어서 사적으로 좋아하는데요, 꽉 짜여진 듯한 일관성을 깨뜨리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변 : 영화의 사운드 편집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독님은 영화에서 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기도 한데요, 이 영화의 경우는 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유일하게 삽입된 것 같은 소리가 시계가 작동하는 소리인데요, 이런 부분에 대한 코멘트도 부탁드립니다.
김 :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1963) 시계소리와 같은 압도적인 느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또 나중에는 그런 게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관객 : 이 영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찍은 건지 궁금합니다.
김 : 10회 정도 찍은 것 같아요. 주말마다 내려가서 찍었습니다.
변 : 그럼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여행은 몇 박 며칠인건가요?
김 : 그것도 한 번에 가지는 못하고 두 번에 나눠서 갔던 것 같습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친구이기에 길게 나가있을 수도 없어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갔죠.
변 : 여행을 간다는 설정은 먼저 제안을 하신 건가요?
김 : 여행을 해야 한다는 정확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영화 제작을 하면서 처음과 끝을 분명하게 설정해서 만든 영화는 없습니다. 저는 항상 제작 과정을 즐기려고 하는데 그런 성격이 영화에 투영된 것 같기도 해요. 다만 이런저런 장소들을 방문한 데에는 다 각각의 이유가 있습니다. 가령 우경이 이전에 자살시도를 몇 번 하다가 실패를 하고 그 이후에 고향에 내려가 술만 마시면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어떤 수녀님이 우경에게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서 그걸 계기로 마음을 다잡아 안마를 하는 법도 배우고 공부도 시작했다고 해요. 그런 이야기 때문에 성당을 방문하는 장면이 영화 안에 있어요. 또 절은 우경이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더라고요. 눈병이 아버지 쪽 유전이라고 해요. 아버지도 약시고요. 그래서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주 계시던 절을 방문한 것입니다. 바다와 강은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인연이 있는 장소라고 했습니다. 여자친구도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 동반자까지 둘 다 그렇게 살기는 어려워서 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일관성 있거나 의미 있는 이야기 단위로 환원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그런 시도를 애초에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유 :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이 영화가 우경이라는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들리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사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기준에서 사용하는 연출의 정의를 생각해본다고 해도 다큐멘터리보다는 극영화의 문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 새떼를 보는 시점숏뿐만 아니라 초반부에 방안에서 이런 저런 행위를 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가 주인공의 삶을 많이 관찰해서 재구성해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령 커피를 끓이는 장면에서 우경의 손만이 클로즈업된 인서트숏이 그렇죠. 맹인이 아니라면 행위자의 주관적인 인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 장면은 우경이 맹인이기 때문에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인물을 관찰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내 장면의 연출 전반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 : 영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영화를 찍고 난 이후에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야 '아, 이게 그런 행위였구나.'라고 깨달은 점도 많습니다. 그 분의 세계에 대해서 제가 뭘 알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호기심 어린 태도로 촬영을 한 장면도 많은 것 같아요. 설거지를 하는 장면의 경우는 제가 설거지를 하던 때의 경험이 떠올라서 주의 깊게 본 것도 있는 것 같네요.
변 : 이 영화에서 생략된 우경의 행위들도 꽤 많은데요,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장면은 나오는데 밥을 먹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거나, 지하철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은 있는데 걸음을 걸어 내려가는 장면은 없습니다.
김 : 그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게 맞습니다. 밥을 먹거나 우경이 구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장면이라던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보여주기 싫은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 : <천상고원> 이외에 감독님의 작품들을 보면 밥을 먹는 장면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천상고원>에서 식사장면이 있는데요, 그 영화는 감독님이 주연을 한 영화여서 스스로 밥을 먹는 장면이 들어가있죠. 그 영화를 제외하면 감독님은 거의 남이 뭘 먹는걸 못 본다고 생각될 정도로 먹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더라고요.
김 : 두 분과 대화를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제가 그런 장면들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뭐랄까, 리얼해 보이거나 삶이 이런거야 강변하는 듯한 장면들을 지극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삶은 고통스러운 건데 왜 계속 그런 걸 보여주지? 영화는 다른 걸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경>의 경우도 우경이 처한 현실보다는 우경에 대한 존엄성 같은 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 또한 저는 우경에게 다가가려고 노력을 했는데 실패를 했다면 했을 뿐, 우경과 거리를 두려는 식의 기획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그런 한계가 또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변 : 한마디씩 듣고 자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김 : 두 분과 함께 이런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어서 예전 생각도 나면서 울컥하네요.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 저도 마침내 이 영화가 완성돼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겨울이라는 시기에 맞춰서 보게 된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올해가 몇 십 년 뒤에 복기를 해보면 굉장히 한국영화사에서 암울한 시기라고 기록될 정도로 추락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별별 해괴한 망작들을 다 보았는데, 그 영화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건 제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안 하겠지만,(웃음) 그런 와중에도 두 편의 영화가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우경>과 <내 친구 정일우>가 그 두 편인데요, 두 편 다 멋이 없어서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우경>의 경우는 영화가 될 것 같은 것들이 영화가 되기 직전에 끝나는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인물이 애초에 많이 등장하지도 않고 이야기도 거의 없다시피하고요. 저는 이 영화가 미학적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 뭔가 상쾌하거나 멋이 없어서 좋아하기도 합니다. 지적이고 머리를 잘 쓰는 분들이 아마추어적인 자세로 만든 영화가 <우경>과 <내 친구 정일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2017년의 한국영화는 이 두 영화만으로도 괜찮은 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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