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한줄 관람평
이지윤 | 풍경만으로도 참 곱고 풋풋하다
박범수 |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
조휴연 | 원작과 해석 사이, 치열한 고민 끝에 제작진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순수한 감정들
이가영 | 우리의 추억으로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김신 | 여러 의미에서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현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척도를 제공한다
남선우 | 오래 펼치지 않았던 동화책을 찾아 읽는 기분으로
<소나기> 리뷰: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소년 소녀의 애틋한 이야기를 어떻게 스크린에 옮길 것인가? 안재훈 감독의 중편 애니메이션 <소나기>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우직한 정공법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 보면, 동시대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는 손길이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소나기>는 원작의 평이한 답습이 아닌,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불릴만하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내용이겠지만, 영화의 줄거리(이자 소설의 줄거리)를 한 번 간략하게 옮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년은 등굣길 징검다리에서 윤 초시네 증손녀를 만난다. 하루는 소녀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소년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소년의 무덤덤함에 괜히 새침해진 것이다. 며칠간 나타나지 않던 소녀는 다시 개울가에 나타난다. 대뜸 비단조개의 이름을 묻는 소녀에게 이끌려 소년은 산 너머로 향한다. 논밭과 무 밭을 지나 산자락에 다다른 소년과 소녀는 꽃줄기를 따고 송아지를 타고 놀다가 소나기를 맞는다. 둘은 원두막에서 간신히 비를 피한 뒤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지만, 병약한 소녀는 앓아 눕고 만다. 며칠이 지나고 소녀는 개울가에 다시 나타난다. 스웨터에 든 물이 징검다리에서 업혔을 때 옮은 것이라고 말하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이사 갈 소녀에게 줄 호두를 따 온 소년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듣게 된다. 여러 날을 앓던 소녀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거든 입은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소나기>와 원작 소설의 차이를 짚어내기 위해 줄거리 요약을 옮겨 놓았다. <소나기>가 원작에서 덜어낸 것은 간결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스민 어떤 서늘함이다. 가세가 기울어 이곳 저곳을 떠돌아야 할 소녀의 비극적 운명이나 소녀의 유언을 전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은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영화 속 소년과 소녀의 감정 또한 첫 만남의 설렘이 주는 미묘한 긴장에 보다 집중하는 듯 하다. 감정묘사 대신 행동묘사에 집중한 소설의 문체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틀 안에서 짧은 대화와 행동만으로 숨겨진 뉘앙스들을 오롯이 표현하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덜어낸 부분을 영화가 어떻게 채워 나갔는지에 대한 대답이 나올 차례다. <소나기>는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원작과 완전히 다른 감상을 요구한다. 소설에서 생략되고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들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시골의 정경이다. 밥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정겨운 오두막집,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녘, 징검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이미지들은 그 예다. 보라빛깔의 도라지 꽃이나 빗물을 머금은 푸르른 녹음처럼 소설에 직접 등장한 것들도 한층 더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각적 묘사들의 섬세함을 상찬하는 것만으로는 <소나기>가 전하는 감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교정에 울려 퍼지는 풍금 소리와 송아지 치는 농부가 튼 상투는 어쩌면 그 설명을 위한 숨겨진 단서일 지도 모른다. 풍금과 상투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과 어울리는 지가 다소 불분명하지만, 2010년대를 사는 도시민들이 시골의 느낌을 명징하게 환기하는 데에는 더없이 적절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소나기>는 시골에 얽힌 우리의 어렴풋한 기억들을 환기하면서 그 안에 담긴 감성을 함께 불러낸다. 그 감성이란 때묻지 않은 순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수채화풍으로 묘사된 시골 정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색감이나 구도의 문제가 아닌, 그 아름다운 풍경이 소년 소녀의 이야기와 맞닿으면서 우리 내면의 잃어버린 무언가를 환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한 표현일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나기>는 원작과 많은 부분에서 닮았지만, 그 무게에 과하게 억눌리지 않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신만의 길을 발견해 내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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