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악보가 다성악을 그리듯이 인디피크닉 2017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인디토크
일시 2017년 4월 8일(토) 오후 3시 20분 상영 후
참석 임대형 감독, 기주봉 배우, 고원희 배우, 오정환 배우
진행 안소현 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현대 영화가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흑백영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스펙터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흑백영화만의 고유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한적 양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 흑백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특히 인물들 사이 감정곡선의 교차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독립영화들에서 더욱 자주 보인다. 암 선고를 받은 주인공 ‘모금산’의 엉뚱한 도전을 흑백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영화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소개한다.
안소현 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이하 안): 이렇게 모인 게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소감을 부탁한다.
임대형 감독(이하 임): 올해 첫 상영이라 감회가 새롭다. 시간 내서 보러 와주셔서 감사하다.
기주봉 배우(이하 기): 봄날에 겨울영화다. ‘사형선고 받은 뒤에 뭘 해야 될까’라는 생각에 초점을 맞춰 연기했다. 모금산이 생에 꼭 남기고자 한 것은 영화였다. 그런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
고원희 배우(이하 고): 작년 이맘때쯤 크랭크업을 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고 감사하다.
오정환 배우(이하 오): 날씨 좋은 날 찾아주셔서 감사하다.
안: 단편에서 출발해 확장시킨 영화라고 알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흑백 영화의 기운이 강한데, 이는 현대의 시공간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임: 말씀대로 무성 슬랩스틱 코미디 단편영화로 먼저 구상했고 장편으로 확장시킨 것이 이 영화다. 영화 속 공간인 금산이 고향이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공간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했기 때문에 현대 시공간에서 빗겨난 느낌이 묻어난 게 아닐까.
안: 어찌 보면 상투적인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주는 엇박자 리듬감 때문에 다층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정적인 연기와 대사의 타이밍, 그리고 컷 포인트까지 매우 계산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영화가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는지?
기: 결과물에 대한 예상을 하진 않았지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료함 속의 출구를 찾아간다는 메시지가 깊게 와 닿았고 연기를 하는 동안 '벗어남' 그 자체에 매력을 많이 느꼈다.
안: 고원희 배우는 <흔들리는 물결>(2015), <걱정말아요>(2015) 등에서 다양한 인물을 연기해왔다. 이번 영화의 ‘예원’이 가장 본인다운 역할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고: 처음엔 마냥 재밌기만 했던 대본이 계속 보다보니 정말 와 닿아서 더욱 끌렸던 작품이다. 그리고 예원이라는 캐릭터와 실제의 내가 비슷해서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잠든 장면을 연기하다가 진짜 잠이 들었을 만큼.(웃음)
안: 뮤지컬과 연극에서 주로 활동한 오정환 배우는 장편영화가 처음이다. 공연과 영화의 차이를 실감한 부분이 있는지?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첫인상도 궁금하다.
오: 단편영화 출연을 통해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익혔다 생각했는데, 차이점이 분명히 있었다. 다른 배우 분들로부터 많이 배운 작품이다. 내가 연기한 ‘스데반’은 아버지와 자주 마찰을 겪는다. 연기를 하면서 실제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안: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열혈스태프상을 받았다. 첫 장면부터 음악이 인상적이다. 감독님은 단편 <만일의 세계>(2014)에서 직접 음악 작업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음악이 두드러지는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가 궁금하다.
임: 작업을 하면서 일 년 내내 캐롤과 블루스를 들었다. 이 영화의 정서와 블루스가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고 원래 좋아해온 뮤지션 하헌진 씨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마치 무성영화를 만들듯 같이 영상을 보면서 작업을 했다. 그러다 하헌진 씨의 손에 물집이 잡혀 고생한 일화도 빼먹을 수 없다.
관객: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영화에서 모금산이 좋아하는 배우들을 나열한다. 이 명단에 기주봉 배우님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모금산은 소통을 스스로 거부하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부분은 ‘자영’과 맥주를 마시는 에피소드다. 아들과 아들의 여자친구를 제외하고 첫 소통의 시도인데, 나중엔 본체만체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나. 그 심리가 궁금하다.
기: 혼자 지내다 보면 일상에서 쉽게 못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임: 말씀대로 모금산은 혼자 사는 데에 익숙한 인물이었을 것이고 자영을 통해 어떤 벗어남을 꾀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배경이 된 시골의 작은 마을은 소문이 매우 빨리 돈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의 관계가 어떤 면에서는 자영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외면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모금산이 읊는 배우 목록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서 아는 배우를 물어보니 줄줄 읊으시더라. 그 명단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기주봉 배우님이 잉그리드 버그만을 추가했다.(웃음)
관객: 아날로그적인 따뜻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영화 속의 영화를 만드는 모금산에게 강냉이와 폭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영화를 만들 것인지 궁금하다.
임: 모금산이 혼자 강냉이를 먹는 게 습관인데, 하루는 목에 걸리는 장면이 나온다. 모금산이라면 강냉이를 폭탄에 연결시키는 상상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차기작은 아직 고민 중이지만 심심한 코미디 영화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관객: 작품 속 인물 설정에 사적인 부분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실제로 모티브를 삼은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흑백영화인데 색보정 담당 스태프가 있는 것을 엔딩 크레딧에서 보았다. 색보정은 톤보정을 말하는 것인가?
임: 극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영화 속에 영화를 찍는 인물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모티브로 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사적인 체험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의외로 흑백영화가 색보정 작업에 손이 많이 간다. 음영과 입체감 등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컬러영화에 비해 명도와 패턴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작업했다.
안: 원론적인 질문을 드리겠다. 영화 속의 영화가 있고 캐릭터들이 각자 배우, 감독, 촬영 등의 역할을 맡지 않나. 배우님들에게 영화와 연기란 무엇인가?
기: 필름시대에 활동했기에 나에게 영화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연기는 아마 다른 배우들과의 감성이나 정서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고: 드라마도 해봤지만 영화는 뭔가 다른 것 같다. 매번 연기를 할 때마다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할지 고민한다. 결국 연기가 연기 같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오: 일단 연기는 즐겁다.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연기를 직접 하는 사람으로서 연기란 영상에서든 무대에서든 뭐라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생각이다.
관객: 예원의 캐릭터가 매우 주도적이고 능동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스테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쌍화탕의 노른자를 깨는 행위나 왜 자신의 미래를 네(스데반)가 걱정하느냐는 대사가 특히 그렇다. 그래서 여성 감독의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남성분이어서 놀랐다. 예원이 사용하는 노트북에 페미니스트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영화 작업을 하면서 페미니즘에 관한 의식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영화 속 라이언 고슬링의 담배 연기는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건가?
임: <드라이브>(2011)다.(웃음) 시나리오를 쓰기 이전에 페미니즘적 시각을 스스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여성 캐릭터를 그냥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은 실제 내 것이다. 극중 예원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대로 썼다. 여성 스태프들의 자문도 많이 구했다.
고: 처음 이 영화에 임할 때 예원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능동성에 따로 집중하진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예원의 주체적인 여성성에 많이들 주목해주셨고 그때부터 나도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자란 가정환경이 딱히 남녀의 성역할이 구분되어있지 않아서 페미니즘적 시각이 무뎠던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고 집안일도 균형 있게 분담해서 한 편이다. 예원이 실제 나와 가깝기도 하고 본래 성격이 주도적인 편이라 캐릭터를 보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관객: 아버지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흥미롭다.
임: 아버지는 가수를 꿈꿨다고 한다. 실제 아버지에게 많이 물어보면서 작업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대상화된 아버지가 아니라 한 인간을 만난 것 같다.
안: 기주봉 배우님과 모금산이 매우 닿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 감독의 디렉팅이 매우 함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따라 표현하다보면 자연스레 한 캐릭터가 생길 것 같아서 편하게 작업했다.
안: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묻겠다.
임: 이 영화는 올해 서울독립영화제가 개막할 때 즈음 개봉하게 될 것 같다.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지내고 있다. 스펙터클하진 않지만 다정하고 소박한 영화니까 많이들 사랑해주시길 바란다. 감사하다.
오: 자리 채워주시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시간 할애해주셔서 감사하다. 개봉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국내외로 여기저기서 상영될 것 같다. 이 영화로 이렇게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게 행복하다. 개봉까지 잊지 말고 기다려 주시길.
고: 오랜만에 관객 분들을 만나서 많이 떨었다. 여러분의 말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된다. 감사하다.
기: 관객 분들 하시는 일 다 잘될 것이고 그러길 바란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독립영화야 말로 정말 멋진 통로라 생각한다. 겨울에 다시 뵙겠다. 감사하다.
이 영화는 딱히 슬픈 장면이 없다. 하지만 딱히 슬프지 않은 장면도 없다. 비록 영화는 다소 엉뚱한 해프닝을 다루고 있지만 그 서사의 전반에 담뿍 적셔진 흑백영화만의 정서가 관객들의 마음까지 스며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딘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닮았다. 모 부자의 우여곡절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지만 은은히 감도는 따스함이 짙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흑백 화면과 어우러지는 배경음악은 그 어떤 컬러영화보다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 마치 흑백의 악보가 다성악을 그리듯 말이다. 올 겨울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꼭 극장에서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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