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적 없는 삶의 단면 2017 으랏차차 독립영화 <이태원> 인디토크
일시 2017년 2월 9일(목)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강유가람 감독
진행 박소현 감독 (<야근 대신 뜨개질> 연출)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이태원>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에서 몇 십 년을 살아낸 세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미군 달러가 지배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 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너무나 쉽게 지워지는 삶에 대해.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영화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17 으랏차차 독립영화’ <이태원> 상영 후 강유가람 감독, 그리고 <야근 대신 뜨개질>의 박소현 감독과 함께했다.
박소현 감독(이하 박소현):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박소현이라고 합니다.
강유가람 감독(이하 강유가람): <이태원> 감독 강유가람입니다. 추운 날씨에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박소현: 날이 추워진 탓에 관객이 너무 적을까봐 걱정을 했고, 추우니 토크를 너무 길게 하지 말고 빨리 보내드리자, 저희끼리 이런 얘기를 나눴어요. 같은 작업실을 쓰고 있어서 감독님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 싸매며 고민하는 모습을 봤어요. 우선 관객 분들이 이 영화의 시작에 대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질문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강유가람: 이태원에 맛집, 핫한 예술 공간이 많지만, 독특하고 다중적인 공간으로 인지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저만 해도 약간 무서운 공간으로 인지하고 있었어요.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인데, 용산참사 이후 ‘후커힐(Hooker Hill)’이라 불리는 곳을 같이 걸어가며 이 지역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워크숍을 하고 영상을 만든 적이 있어요. 몇 년 후, 제 지인이 그 공간을 지원하는 단체에 있었는데, 그 단체를 통해 소개를 받았고 이들의 삶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박소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인상적인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오프닝이었어요. '삼숙' 님이 셀프카메라로 독백을 하면서 시작되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안개 속에서 '나키' 님이 등장하고, 그 안개를 배경으로 ‘이태원’이라는 타이틀이 나와요.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함축시킨 탁월한 구성의 오프닝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프닝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강유가람: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세 여성의 시선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숙 님 같은 경우에는 평소에도 본인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많아서 실제로 직접 찍은 DVD를 자주 주셨어요. ‘유언 비디오’라고 하면서 주신 1시간 반에서 2시간짜리 DVD였는데, 인생에 대해 혼자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좋았고 인터뷰와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꼭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안개는 메르스 당시 마침 소독차가 지나가서 촬영했던 것에서 가져왔어요. 안개 속에서 나키 님이 휙 튀어 나오는 느낌이 좋았고 그 장면이 흐려지는 여성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님은 바로 집 앞에 재개발에 반대하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고, 그 앞에 서있는 장면을 많이 찍었어요. 그 장면이 이태원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오프닝에 담았습니다.
박소현: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오프닝에서 삼숙 님 뒤로 보이는 미군 남편분의 사진, 플랜카드 앞에 서 계신 영화 님의 뒷모습, 안개가 차는지 걷히는지 모를 애매한 틈으로 살짝살짝 보이는 성인용품 가게 같은 것들. 설명 없이도 장면 자체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삶의 모습과 닮아 보여서 좋았습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가 계속 세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데, 중후반쯤에 청년 예술가들이 등장해 옥상에서 파티를 하고 나키 님이 오르락내리락 계단 칠을 하는 등 한바탕 왁자지껄한 장면이 지나가요. 그러고 나서 다시 바래진 계단을 나키 님이 내려오는데, 그 모습이 되게 강렬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왁자지껄함을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약간 애잔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계속 그 곳에서 살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이고 오프닝에서 느껴졌던 것과 같이 그들이 오롯이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어요. 청년이 등장하는 것에 대한 감독님의 의도와 고민이 궁금합니다.
강유가람: 처음에 그 공간을 찾아갔을 때에는 청년들이 이태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잘 몰랐어요. 촬영 중에 조연출 분이 플리마켓 등을 알려줘서 그 공간에서 정말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이태원의 현재성을 표현하려면 이들도 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분들을 만나서 인터뷰도 다양하게 했어요. 그 공간이 사실은 재개발 예정지였기 때문에 슬럼화 되고 낙후된, 치안이 안 좋은 상태였고 그분들은 이 공간을 밝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좋은 취지로 많은 활동을 했으나 워낙 역동적인 공간이다 보니까 그 활동들이 약간은 무의미해지는 지점이 있었어요. 월세가 많이 올라 초기의 상인 분들은 지금 거의 안 계세요. 이런 모습들을 세 여성의 삶과 대비시키고 싶었고 제 자신도 그 공간을 지나쳐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박소현: 제가 감독님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본 바, 감독님이 장사꾼 분들과 세 여성을 엮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고 알고 있어요.
강유가람: 먼저 ‘장사꾼’이라는 네이밍은 원래 그분들이 쓰는 말이에요.(웃음) 오해 없길 바랍니다. 그분들이 이 공간에 더 오래 살아온 세 여성의 삶에 대해서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나기도 했고, 그 모습이 굉장히 대비적이었어요. 이분들의 활동에 대한 시각이 너무 비판적으로 담긴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고 편집 과정에서 여성들의 삶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코멘트도 종종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분리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공간이 섬처럼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굳이 넣었는데, 청년 분들이 영화를 보고서 더 빼달라고는 하시더라고요.(웃음)
박소현: 삼숙 사장님이 술집 40주년 생일 파티를 한다고 음식을 굉장히 많이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너무 없어 북적댔던 과거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사장님이 애잔해보였어요. 나키 님이 계단을 내려올 때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요.
강유가람: 촬영 당일에 저희도 손님이 많이 올 줄 알았어요. 6개월 정도 홍보를 하셨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많이 안 와서 음식들을 다 저희에게 나눠주셨어요. 오히려 사장님이 밝은 척을 하셨어요. 가게를 마치고 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찍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너무 웃으면서 ‘그래, 잘 가~’하셔서 그런 분위기로 촬영도 마무리 됐습니다.
관객: 영화에서 축제 장면이나 우사단길 등 젊은이들이 짧게 짧게 등장하는 장면과 세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을 교차되게 편집한 이유가 궁금해요. 또 전통적인 한국 가부장제 밖의 삶을 산 세 싱글 여성 캐릭터에 대해 촬영 과정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강유가람: 교차편집으로 관객에게 이질적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분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는 길 근처에 살죠. 그분들이 이태원의 주민으로 살아온 부분들을 강조하고 싶었고 그들의 삶의 맥락이 그 산업에 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람으로 정체화되는 것, 낙인찍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일반적인 주민으로 보이길 원했고 멀리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슈퍼에 가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일상적인 부분을 강조하면서 교차편집으로 넣었습니다. 캐릭터 질문에 답하자면 삼숙 님 같은 경우는 DMZ에서부터 미군 장사를 시작해서 소위 ‘금맥’을 보고 이태원까지 온 분이고, 장사를 계속 하면서 장수 같은 이미지로 소문이 났어요. 늦은 결혼을 하기까지 쫓아다니는 남자들도 있었고 가게 운영을 방해하는 ‘조폭’들도 있었고 여러 힘든 점들이 있었어요. 그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욕도 많이 하지만 속은 되게 여려요. 본인의 취약한 부분을 가리는 방패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박소현: 세 여성이 가족을 대하는 모습이 이어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 님이 PC방에서 남동생이랑 전화로 양육권을 두고 싸우다가 잠자고 있는 조카의 손을 어루만지는 클로즈업 신, 삼숙 님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바쳤는데 밥 먹자 하는 사람 하나 없다'고 말하다가도 '그래도 내가 챙기길 잘했다'고 하는 장면 등. 이런 게 연결되면서 영화가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전작 <모래>(2011)에서 감독님의 어머니가 ‘너 때문에 내가 다 참았어’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이번 영화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게 많은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고 또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감독님도 전작과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했거나 이전과 변화를 주려고 한 부분이 있나요?
강유가람: 저는 계속 공간의 변화를 그 공간에 살아가는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 것 같아요. 이 여성들이 벌어들인 달러들이 한국사회에 흘러 들어와 밑거름으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국가에서 관리도 한 일들인데, 그와 동시에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공적인 역사에서는 부끄러운 것으로 기록되는, 이런 것들을 확장시키고자 했어요. 삼숙 님만 봐도 가족을 부양하려고, 어떻게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노력한 분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아예 모른다는 것에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관객: 세 여성이 큰 흐름 속에 있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연민의 대상이기보다 말하는 주체였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강유가람: 세 분 성격이 달라요. 나키 님은 원래 많은 얘기를 해주시는 편이 아니에요. 그리고 삼숙 님을 소개해주셨어요. 삼숙 님은 본인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편이었고 촬영에 원하는 방향이 있으신 것 같아요.(웃음) 영화 님은 처음부터 친밀하게 훅 들어오는 타입이었어요. 안 찾아가면 왜 안 오냐고 전화하시는. 원하는 대답을 얻으려고 의도하고 찍은 인터뷰는 거의 망했어요.(웃음) 일상 속에서 말하는 부분이 오히려 영화에 많이 실렸어요.
박소현: <모래>, <진주머리방>(2015), <이태원>까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존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쌓이면서 계속해서 이야기가 쌓이고, 공간은 그 존재 자체로 많은 말을 걸고 있는데, 강유가람 감독님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감독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감독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 다음 작품에 대한 코멘트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유가람: 개인적으로 세 분을 만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감정의 교류가 무엇인지 생각을 많이 했고 삶을 견디고 극복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에너지가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성의 삶의 역사가 좀 더 많이 이야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퇴진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하고도 싸우고 여성혐오와도 싸워야 하는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데, 이들의 에너지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의 이태원은 재개발 문제에 다시 부딪히게 된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예술가들이, 지금의 이태원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거대자본으로부터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리’에 여성들의 자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여성들의 삶을 만난 적 없거나, 본 적 있어도 못 본 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영화를 통해 관객은 이전에는 마주한 적 없는 삶의 단면을, 이들이 치열하게 버텨온 날들을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영화 <이태원>은 여성의 삶을 부끄럽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면서 삶과 삶 사이에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많은 만남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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