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독립영화인: 거장들의 독립영화 
-<지리멸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심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여행자>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추병진 님의 글입니다.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류승완, 이창동.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감독들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들의 롤모델인 이들. 그들의 시작도 독립영화였다.



1. 봉준호 감독 <지리멸렬>(1994)



<지리멸렬>은 1994년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 봉준호 감독이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영화는 조롱과 풍자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비교적 짧고 단순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각 에피소드 안에는 봉준호 감독의 재치 있는 유머가 녹아들어있다. 또한 각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로 만들어졌는데,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등)를 보면 인물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이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멸렬>에서도 긴박감 있는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하지만 고작 30분밖에 되지 않는 분량을 굳이 세 개의 에피소드와 한 개의 에필로그로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연결된 세 개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 도달하면 그 이유가 명확히 드러낸다. 그것은 청년 봉준호가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사회를 보며 던졌던 어떤 제스처일 것이다. 영화는 즐겁지만, 영화의 바깥으로 벗어나면 마냥 웃을 수 없는 씁쓸한 현실. <지리멸렬>은 영화 안의 세계와 영화 밖의 세계를 교묘하게 연결하면서 우리 사회를 냉소적으로 응시한다.

덧붙여서, 졸업 작품인 <지리멸렬>은 소수의 스탭들과 16mm 필름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속에는 봉준호 감독이 시도한 다양한 영화 기법들이 엿보인다. 그중에서도 트래킹 쇼트, 180도 팬, 핸드헬드 그리고 의외로 긴 롱테이크 등이 돋보이고, 재치 있는 장면 구성과 편집이 인상적이다. 그의 꼼꼼한 장면 구성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홍상수 감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지난 20년 동안 홍상수 감독은 열일곱 편의 장편영화와 세 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다. 스무 편의 필모그래피에도 여전히 홍상수 감독 영화에 대한 감상은 언어로 풀어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독특한 작업 방식에서 나오는 영화의 자연스러운 톤,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의 특징 등 감독의 영화에는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 이런 스타일은 스무 번의 체험을 통해 관객들에게 체득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낯선 감독과 낯선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국내의 어떤 시상식에서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기자와 평론가들은 홍상수라는 인물의 등장을 ‘한국영화사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모의 세계에 등장한 동그라미는 도형의 역사를 다시 썼으며, 이 영화는 그 시작이 되는 작품이다(홍상수 감독은 보통영화들이 삼각형이라면 자신의 영화는 원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효섭(김의성), 동우(박진성), 민재(조은숙), 보경(이응경)은 내연과 짝사랑으로 얽힌 사이다. 영화에는 인물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시점이 등장하며 암전으로 시점이 바뀐다. 홍상수 감독은 네 명의 공동 각본가에게 인물 별로 시나리오를 담당하게 했다. 촬영현장에서 바로 시나리오를 쓰는 홍상수 감독의 현재작업방식과는 꽤 다르다. 선한 인상과 나긋한 말투로 등장한 소설가 효섭이 점차 살기를 띄어가는 모습이 초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송중기를 떠올리게 하는 서른 살의 배우 김의성은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가 현실을 향한 분노를 쌓아가는 모습을 점증하는 연기로 표현한다. “우리가 문학을 얘기하는데 왜 고기굽는 사람들이 끼어듭니까”처럼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찌르는 대사를 비롯,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홍감독 특유의 대사들은 데뷔작에서도 등장한다. 처음 40분간 아예 나오지 않던 음악은 스릴러에 어울릴 법한 무드를 띄며 뒤로 갈수록 짧게 자주 쓰인다. 아니나 다를까, 제 5의 인물이 개입하며 치정극의 익숙한 결말을 따르지만 결말을 보여주는 방식이 신선하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는, 흡인력이 대단한 영화다.




3. 박찬욱 감독 <심판>(1999)



<심판>은 박찬욱 감독이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3인조>(1997)를 연출한 이후에 만든 단편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배우와 연기의 중요성을 이해한 것이 <심판>을 찍은 이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이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쌍의 부부와 장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도 미묘한 웃음을 유발하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유머가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영안실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2005)의 교실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영화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행위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와 장면 구성이 돋보인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담당 공무원, 기자, 장의사, 한 쌍의 부부 그리고 여성의 시신-이 어떻게 조화롭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내뱉는 말과 행동이 실마리가 되어, 이 영화의 예측 불가능한 결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제목 <심판>에 걸맞게 이 영화는 묵시록에 가까운 기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데, 그 지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휴머니즘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즉, 현실과 상상의 미묘한 접점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4. 류승완 감독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중학생 류승완은 동시상영관에 박혀서 하루 두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게 일상이었다. 상영관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는 스크린 속 세계를 동경하게 됐다.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은 후 고등학생 때는 점심을 거르고 모은 돈으로 캠코더를 사 초등학생 동생(류승범)과 영화를 찍고, 성인이 된 후엔 생계를 위한 일과 연출부 생활을 병행하며 데뷔의 꿈을 키워나갔다. 1996년, 류승완은 첫 단편영화 <변질헤드>(1996)로 감독이 됐다. 그리고 2년 후, 또 하나의 단편 <패싸움>(1998)을 만들었다. <패싸움>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자 류승완 감독은 그 상금을 바탕으로 다음 단편을 만들었다. 한 작품의 성과를 다음 작품의 밑천으로 삼는 식으로 연달아 네 편의 단편영화를 완성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편들이 모여 그의 첫 장편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가 됐다.

<패싸움>, <악몽>, <현대인>, 그리고 단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까지, 영화는 독립된 네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돼있지만 하나의 중심 플롯이 작품들을 관통한다. 우연히 살인에 휘말리게 된 두 친구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하며 벌어지는 비극이 주된 내용이다. 영화 곳곳에서 저예산의 비애가 드러난다. 감독 본인이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밝힌 바 있듯 화면 내에 붐마이크가 등장하기도 하고, 마지막 씬에서는 이전과 달리 갑자기 눈이 내린 설원이 등장하나 돈이 없어 재촬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렌즈에 먼지가 묻어 멀리 있는 주인공이 안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제작상의 어려움이나 자잘한 실수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다. 대사가 끝나는 지점에 타이밍을 맞춘 화면 전환, 빠른 속도의 교차편집으로 재기발랄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질서 없는 막싸움부터 정교하게 합을 맞춘 액션까지 다양한 액션을 선보인다. 마지막 장면의 충격적인 비주얼까지. 데뷔작품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한 사람의 영화에 대한 지독하고도 뜨거운 열정이 영화가 된다면 이런 모습일 테다.




5. 이창동 제작 및 공동각본, 우니 르콩트 감독 <여행자>(2009)



<여행자>는 이창동 감독이 공동 각본 및 제작으로 참여하고, 우니 르콩트 감독이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이창동 감독이 직접 연출을 맡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중점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여행자>를 선택하였다. 이 영화는 아버지에 의해서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 픽션이 더해진 이 영화는 정적인 스타일을 통해 주인공 진희와 보육원 사람들의 모습을 매우 섬세하게 담아낸다. 특히, 주인공 진희의 얼굴을 담은 클로즈업 장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글픈 정서를 전달한다. 또한 이 영화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정 장면들은 그 횟수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의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마도 이창동 감독의 섬세한 시나리오 작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여행자>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주인공 진희와 우니 르콩트 감독이 하나의 인물로 겹쳐 보이는 착시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니 르콩트 감독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보육원 안의 이야기는 상당수 픽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인물에 다가갈 필요가 있다. 또한 우니 르콩트 감독은 이 영화가 단순히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관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진희를 따라 각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할 것이다.



데뷔 감독이 독립영화로 시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탄탄한 자본을 등에 업고 시작하는 행운은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본의 한계에도 자신만의 세계를 얼마만큼 구현해냈는가 하는 것이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다. 지금도 숱한 연출지망생들이 미래의 거장을 꿈꾸며 영화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비롯해 어떤 분야든 꿈꾸는 곳을 향해 막 출발선을 떠난 사람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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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D


인디플러그 <영화판>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bit.ly/1t0R7b9





영화인들이 전하는 생생한 영화이야기 <영화판>



허철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작품 <영화판>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니는 영화이다. 일단, 그 첫 번째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변모를 둘러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화에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크게 번성하였던 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를 특정한 주제로 묶어 설명한다. 이러한 방식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관객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배우와 감독들이 전하는 추억 속 이야기들은 당시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때로는 놀라움을 때로는 웃음을 선사한다.

 

두 번째로, 이 영화는 기성세대와 현세대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단순히 역사적인 변모를 살피는 것을 넘어 이장호, 임권택, 김수형 등과 같은 전 세대를 풍미했던 감독들과 안성기, 한석규, 강수연과 같은 오랫동안 활동한 배우들의 출연으로 현 세대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고 간다. 그리고 <자유부인>,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들의 행진>과 같은 오래된 작품들이 곳곳에 보이면서 한국 고전영화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현 감독들에게 들어보는 과거의 영화, 그리고 기성 감독에게 들어보는 현대의 영화시장은 현재와 과거를 영화라는 끈으로 묶어주어, 세대를 뛰어넘는 그들의 대화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 보이는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함께 고민해 보게 해준다. 물론 이 과정은 앞서 말했던 과거 회상 방식으로 시작한다. 이를테면 옛날에는 스태프와 한 식구와 같았던 배우들이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자본의 유입과 남성 위주의 액션, 스릴러와 같은 영화들로 인해 기존의 멜로 영화가 없어져 여성배우들과 중견 배우의 설 자리가 좁아져 간다는 내용 역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나온다. 그러나 <영화판>은 과거가 더 좋았다고 더 옳았다고 외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산업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안에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스템에 의해 새롭게 생겨난 문제들, 그리고 기존부터 존재 해 왔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서 우리는 몰랐던 영화산업의 문제점들을 혹은 알았더라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영화판>이 여러 문제들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적절하게 채워 넣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의 영화판도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그들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라는 거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도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예전처럼 그들이 나서서 해결 해야 함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영화판>을 시작점으로 한국영화의 다양한 얼굴을 살펴보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할 예정이라는 허철감독은 일단은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로 먼저 돌아왔다. <영화판>은 아니더라도 여행 다큐멘터리 <미라클 여행기>를 보면서 앞으로 나오게 될 한국영화의 또 다른 얼굴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Posted by 도란도란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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