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Review] 〈늦더위〉: 뒤로 걸어가는 청춘의 발자취를 따라.

〈늦더위〉리뷰: 뒤로 걸어가는 청춘의 발자취를 따라.

*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윤아 님의 글입니다.

 

 

벌써 한 해의 중간 지점을 지나왔다. 날이 갈수록 낮이 길어지고, 따뜻함을 넘어선 햇빛은 우리를 찔러댄다. 사람들의 옷은 점점 가벼워진다. 생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있는 힘껏 빛을 받고 초록을 내뿜는다. 조금만 걸어도 더위를 피하려 그늘을 찾지만, 이 푸르름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사람들은 더위를 맞이한다. 땀이 나는 만큼 살아있음을 느끼는 여름이다. 〈늦더위〉의 동주는 점점 파래져 가는 얼굴로 이 생명들을 담은 화분을 옮긴다. 동주는 손 안에서 활개 치는 생명을 보며 그의 지난날들을 비추어 본다. 옛 시절 유행했던 필름 카메라에 찍히며 뜨거웠던 여름의 절정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미 그 속에서 숨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늦더위〉 스틸컷

 

 

공시생인 동주는 공부에만 집중할 형편은 되지 못해, 낮에는 플라워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한다. 매 생활에 성실하지만 성실성 하나로는 합격할 수 없는 공무원 시험에서 동주는 매번 낙방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시험도 결국엔 합격에 실패한다. 꽤 오랜 세월 수험 생활을 겪어왔기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회사에서의 정직원 제안도 거절하고 만다. 목표를 잃어버린 두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한다. 쉽사리 첫 발을 더 이상 내디딜 힘이 없다. 이때부터 동주는 본인이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과거를 향해 뒤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과거의 본인을 기억하는 사람과 만난 동주는 방어기제 탓인지 고장 난 기계처럼 응답이 늦는다. 또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거짓말을 하며 본인의 위치를 정립하려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동주는 여행을 해보라는 군대 후임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난다. 

 

 

영화 〈늦더위〉 스틸컷

 

 

여행길에서 동주는 그간의 날처럼 길을 정해두지 않고, 유영하듯 자유롭게 장소를 옮겨간다. 초등학생들을 만나 농구를 하고, 그들의 말을 따라 공룡알 박물관으로도 향하며, 제안받았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한다. 그렇지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공룡알 박물관으로 함께 향하는 또래에겐 쉽사리 말을 건넬 자신이 없다. 자꾸만 그의 뒤를 밟기만 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대를 안고 게스트하우스의 파티로 향한다. 파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축축한 비와 다섯 명의 사람이 아닌 남성 한 명이었다. 계절은 점점 가을로 향해가지만, 여전히 늦더위의 눅눅함이 동주의 발끝을 적신다. 

 

 

영화 〈늦더위〉 스틸컷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들인 중학교 동창들과 꽤 즐겁고 반가운 술자리가 이어진다. 한 명은 본인이 그렇게 갈망했던 공무원, 한 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직장에서의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또 한 명은 이혼하고 여러 번 일을 옮긴 카페의 사장. 자유로워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본인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느낀 동주는 현재 카페를 하는 친구를 뒤따라 나가서 잔잔한 대화를 잇는다. 현재의 불안함으로 연결된 둘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끼고 헤어진다. 

 

동창들과의 술자리에서 동주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다녔던 산을 등반하기로 약속하지만, 다음 날 등산길에는 동주만이 나온다. 전날까지만 해도 맘껏 웃으며 함께 과거를 여행했던 친구들은 이제 모두 현실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동주는 혼자 등산길에 오르고, 그 길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초등학교의 선생님을 뵙는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톺아보지만, 정확히 기억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그런 동주에게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이 아니면 어떠냐며 환히 웃어준다. 거의 정상에 올라왔는데도 우거진 나무로 인해 탁 트인 마을을 보긴 어렵지만, 동주는 이전과는 다르게 맘이 편하다. 

 

 

영화 〈늦더위〉 스틸컷

 

 

획일화된 현대 사회에서 다소 전형적인 모습의 2030 청년을 그리는 동주를 보며 자연히 나와 내 친구들을 비추어 보았다. 마찬가지로 등 떠밀리듯 취업 시장으로의 발을 내디뎌야 하는 우리들은 정말 성실하고 열심이지만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만 돌부리에 발이 걸린다. 늦더위를 보면서 그저 나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나는 동주의 어깨에 기대어 내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거나 여행길에서 오랜 걸음을 지속하는 모든 여행자의 손을 잡고 우리는 늘 푸르고 파랄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낡고 야윈 옛 말이 오늘은 왜인지 우리의 영양분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