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w Playing/정기상영 | 기획전

1월 인디포럼 월례비행 <에듀케이션> 비평

by indiespace_은 2020. 1. 30.




인디포럼 월례비행 1월: 허용치를 시험하는 기막힌 훈육 <에듀케이션>



글: 정지혜 (영화평론가, 인디포럼 상임작가)



우리가 김덕중의 <에듀케이션>(2019)을 볼 때 애틋하고 쓸쓸한 정조를 느끼는 순간은 있어도 마음 편히 안도하며 지켜보게 되는 때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시종 불편하고 불안하며 때론 불손하기까지 한 관계의 역학을, 관계 내의 힘의 진자 운동을 끝없이 마주하게 하며 느슨하게 풀려 있던 우리의 자세를 고쳐 잡게 한다. 이렇다 할 사건도 스펙터클한 드라마도 없는 <에듀케이션>은 사실상 두 사람에 집중된 관계 역학만으로 98분의 러닝타임을 견인하고 버티더니 끝내 그 관계가 붕괴하며 벌이는 엄청난 힘의 뒤섞임 앞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말하건대,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온순해졌다가 광폭하게 돌변하기를 거듭하는 종잡을 수 없는 관계의 동학, 그 다면성을 하나하나 목격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에듀케이션>의 관계의 중심에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성희(문혜인)와 중증장애인인 엄마(송영숙)와 사는 고등학생 현목(김준형)이 있다. 각자의 이유와 당장의 필요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기본적으로 성희와 현목은 성인과 청소년, 젠더 차, 돌봄 노동자(혹은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이용자의 보호자라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이제 둘 사이의 불안을 가중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행동의 핑곗거리가 돼주기도 한다. 차이가 힘과 권력의 격차로 돌변할 때, 그 불씨를 댕기는 쪽은 대부분 현목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이다. 현목은 활동 보조인인 성희에게 가사 도우미에게 할 법한 요구를 늘어놓는다. 심통처럼도 보이고 되바라지거나 막무가내에 가까운 생떼처럼도 보이는 현목의 태도는 짐짓 위악으로 읽히기도 한다. 성희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만, 현목의 어이없는 행동에 내심 당황한 눈치이고 현목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우스워. 어디서 어른한테 말을 그따위로 해.” 예상치 못한 현목의 일격에 성희는 나이라는 사회적 위계를 들이밀며 자기 위치를 상대에게 각인한다. 성희에게 있다고 생각됐던 관계의 주도권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목의 태도 앞에 순간 순간 허물어지길 거듭한다. “해주시면 안 돼요?”라는 간청으로, “아까는 제가 심했어요. 엄마 혼자 계셔서 부탁드릴게요. 죄송해요”라는 그럴듯한 사죄로, “활동 보조사가 만날 공부만 하다 갈 거예요?”라며 상대의 양심 혹은 약점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현목은 요리조리 성희의 신경을 긁어대며 성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 앞에서 성희는 현목보다 나이 많은 어른으로서의 인내와 활동 보조인으로서의 책무, 그 한계치가 어디까지일지 자기 시험에 빠진다. 한편, 현목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몸짓을 보이기 일쑤다. 지금 당장 뭔가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상이 있다거나 자기 욕망의 방향이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애매하고 불명확한 상태에 가까워 보이는 그에게 성희라는 존재는 과도하게 말해보자면 자꾸만 이리저리 찔러보고 건드려 보고 싶은 놀잇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멈춘 듯한 엄마만이 있는 집, 쓰레기와 잡동사니로 가득한 회복 불가능한 집에 활동을 보조한다는 성희가 온 것이다. 어쩌면 현목은 이 고인 상태, 활기 없는 집에서 성희가 어디까지,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위태로운 관계는 이 영화에 아주 드물지만 중요하게 들어가 있는 성희, 현목, 현목 엄마의 대낮 외출 신에서 한층 강화된다. 현목은 성희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그 요청을 수락한 성희는 느닷없이 ‘선생님’이 되지만 정작 ‘학생’이 된 현목은 짧은 바지를 입고 앉은 성희를 힐끗거릴 뿐이다. 이때 현목의 시선에서는 다분히 성적인 의도가 엿보이며 그의 행동은 성희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유치하고 유아적이며 어설픈 제스처의 뉘앙스가 짙다. 그런 현목 앞에서 성희는 괜찮은 척을 하며 나름 훈계도 해보고 현목의 시야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앉은 자리를 옮겨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하고 난감한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다. 때때로 성희가 둘 사의 주도권을 쥐는 듯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며 그녀는 현목의 돌발과 변죽, 남성적 시선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허둥댄다. 이때 <에듀케이션>은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랄한가, 누구는 피해자이고 누구는 가해자인가와 같은 윤리적 질문과 판단 앞으로 우리를 추동하지 않는다. <에듀케이션>에서 그것은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며 그런 구획과 나누기로는 짐작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의 문제이며 그것은 관계의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현묵의 말은 비수처럼 성희의 가슴을 후벼 팔 것이다. 현목이 술에 취해 업고 있던 엄마를 놓치며 엄마를 다치게 했을 때다. 성희가 구급차를 부르자 현목이 말한다. “왜 이렇게 착한 척해요? 뭐가 진짜예요? 진짜 모습 아니잖아요.” 성희는 착한 척을 한 것인가. 성희는 착했던가. 그저 다친 사람이 있어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행동을 했을 뿐이 아닌가. 현목은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며 성희가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벌이고 있다고, 갑작스럽게 자신과 엄마의 관계에 개입해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목은 자신이 성희를 자기 쪽으로 당길 때 성희는 자신을 밀쳐내기 바빴는데 어째서 지금 갑자기 자기 삶에 개입해 들어 오냐고 따지는 것이다. 성희는 현묵의 기습적인 질문을 결국 맞받아치지 못한다.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성희는 현목과 재회하고 마침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성희가 현목을 정확히 되받아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만의 방식으로 응징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한 일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는 현목의 무지와 무감, 무책임과 비윤리성 앞에서 성희는 분노에 앞서 비감 어린 얼굴을 보여준다. 그 비감은 현목의 엄마를 경유해서 온다. <에듀케이션>은 성희와 현목의 관계에 기대고 있지만, 성희와 현목의 관계가 유효할 수 있었던 데는 말 없이 정물처럼 그들 사이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현목의 엄마로부터 가능했다. (예컨대 성희, 현목이 평상에 앉아 공무원 시험에 관해 한창 말한 뒤의 장면을 떠올려 보자. 슬며시 화면 밖으로 현목이 빠져나가자 비로소 현목의 엄마가 보인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있었으나 우리는 그녀를 그제야 볼 수 있다.) 적어도 지금 현목에게 엄마는 성희를 집으로 불러들이고 집 밖으로 불러낼 그럴듯한 이유가 되고 자기 행동의 알리바이가 돼준다. 돌아가면,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성희의 비감 어린 얼굴은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로 거기, 있는, 현묵의 엄마를 바라보며 느끼는 연민과 죄스러움에 기인한다. 현묵이 방치했고, 어쩌면 성희 자신도 외면했던 거기, 있는 존재를 바라볼 때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그 비감 다음에 비로소 현목을 향한 성희의 응징이 온다. 자신을 시험에 들게 했던 현목 앞에서 임계치를 넘어선 성희는 온몸을 던져 현목을 후려치고 발길질해대며 길들지 않는 이 치기 어린 무뢰한을 완강히 밀어내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왜, 왜!”라는 말밖에 없는 현목은 끝까지 성희의 비감과 말 없는 육체의 훈육의 연유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뒤엉켜 뒹구는 이들 앞에서 관계의 주도권을 말하는 건 더는 무용해 보인다. 그저 우리는 그들 사이의 관계와 이 거친 훈육 모두가 얼마간의 실패임을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