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다훈이들'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는 다큐멘터리 <난잎으로 칼을 얻다>  대담 기록


일시 2017년 5 20일(토) 오후 7 30분 상영 후

참석 임경희 감독,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

진행 강유가람 감독 (<이태원> 연출)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아버지의 오랜 역사를 담은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시력이 점점 떨어져가 내가 끝마칠 수 없을 것 같은 이 책을 네가 완성해 줄 수 있겠냐’고 하면서. 처음에는 단순히 학자로서 아버지의 부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녀는 단순히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마주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상영 후 강유가람 감독의 진행으로 <난잎으로 칼을 얻다>의 임경희 감독과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김영옥 대표와 함께 대담을 이어갔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발제문: 난잎과 칼의 변증법적 동행을 느끼고 사유하다  http://indiespace.kr/3435






강유가람 감독(이하 강유가람):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강유가람입니다. 한 영화를 깊이 있게 읽고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이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임경희 감독과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 김영옥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김영옥 선생님은 여성학자이자 최근에는 나이듦에 대한 연구도 같이 하고 있어요. 임경희 감독님은 <난잎으로 칼을 얻다>가 첫 장편이죠? 어떻게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됐나요?



임경희 감독(이하 임경희): 여기 나오는 주인공 ‘정다훈’은 저의 20년 된 친구에요. 그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교수이죠. 사실 교수가 살아가는 이유는 읽거나 쓰는 게 거의 전부인데 눈이 안 보이게 되면 큰 제약이 생기잖아요. 눈이 멀어감으로 인해 삶이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서 딸로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 공감이 됐어요. 또 저와 친구가 만나면 늘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항상 싸우는 거지?’ 의문이 있었어요. 문제들의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시작된 것 같아요. 역사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평생 북한을 주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큰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었어요. 비단 저희 아버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기성세대 전반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한 벽을 넘어 이야기하고 싶어서 대화의 장을 열어보고자 영화를 찍었습니다.



강유가람: 세대 간 대화의 장을 열고 싶었던 감독님의 열망이 영화에 잘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김영옥 선생님,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김영옥 대표(이하 김영옥): 굉장히 재미있게 봤어요. 재미있다는 것이 단순히 시각적, 내러티브적인 이유가 아니에요. 새로운 여성감독이 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여성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봐왔는데 3,4년 전 봤던 것들과는 조금 달랐어요. 이를 악물고 싸우려고 하는 여성주의 영화와는 다르게 유동적으로, 자신감 있게, 휘둘리지 않을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대화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을 보여줘서 기분이 좋았고 향후 어떤 작품을 만들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영화에서 부녀 관계를 빼놓고 말할 수가 없는데 사실 부녀 관계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아요. 특히 자의식과 역사의식이 강한 딸일수록 분열의 정도가 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딸이 그 손을 잡았다고 볼 수 있죠. 처음엔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만 보다가 두 번째 볼 때에는 매우 정동적으로 봤습니다. 부녀간의 모습이 매우 다정하게 다가왔고 32년 동안 부녀가 함께 살아온 시간들에서 농익은 단어들이 튀어나와 어떤 단어 하나도 놓칠 수 없었어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성인이 된 딸로서 ‘병약해진’ 아버지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어요. 얼핏 보면 멘토인 아버지가 질문하고 멘티인 딸이 어떻게든 정답을 말해야하는 것처럼 읽히는 장면이 있지만 사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아버지가 딸에게 해석권을 넘겨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제는 그러한 정세를 네가 읽어라.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읽어왔는데, 너와 대화하니까 내가 매우 제한적으로 생각해 왔구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노력과 인생을 인정 해달라 요구하는 것으로 읽혀서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딸 또한 아버지한테 공격적으로 다가가지 않죠. 아무래도 그래서 더 이 영화가 소중하지 않나 싶어요.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쉽게 동일시가 가능해지는 분입니다. 평생 신념을 누르지 않은 분이죠. 딸에게 자신의 것들을 어떻게든 전승해주고 싶어 하는 가장이자 여행자이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은 이야기꾼인 것 같아요. 본인이 추앙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그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오래오래 곁에 머무는 역사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임경희: 이제 아버님의 한 쪽 눈은 거의 안 보이고, 은퇴 후 집에서 지내고 계세요. 중국 공산주의 행정학을 굉장히 많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공을 가르치지 못해 제자 없이 메아리 같은 말씀을 해왔죠. 그러니까 딸이 유일한 제자인 거예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위로 받는 느낌이에요. 





강유가람: 영화를 보면서 본인의 대화 욕구를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은 제3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있어서 정말 좋았고 이후 작업 또한 기대가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영화의 주인공 정다훈 씨가 와 계신데요,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정다훈: 아버지는 조금 무료하게 지내긴 하지만 나름 인생 3막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퇴임과 제 강의 시작이 겹쳐서 마치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답이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관객: 영화를 편집할 때 초점을 역사에 더 두었는지, 부녀 관계에 두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부녀의 대화가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 편집하지 않고 길게 남겨둔 이유가 있나요?



임경희: 두 가지를 모두 잘 섞어서 녹여냈다면 좋았을 텐데.(웃음) 역사 안에서 부녀가 캐치해내는 것을 따라가길 원했어요. 이회영은 아버지가 가장 이입한 인물이고 윤동주와 안중근은 딸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대화가 지루할 수 있는데 길게 담은 건 학자들이 이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확인을 하고 노력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예요.



강유가람: ‘평화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던데, 무엇인가요?



임경희: 20년 지기 모임이 있어요. ‘블랙홀’이라는 중학생 때부터 이어져온 농구모임인데 모이면 항상 이러한 화제를 두고 이야기를 해요. 저는 이념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반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평화 여행 루트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끝이 북한, 우리나라로 끝나면 그것이 아시아의 평화 루트가 되지 않을까 거대한 꿈을 꿨어요. 항상 우리나라에서는 국내의 사건만이 부각되는데 다른 나라에도 같은 사건들이 되게 많거든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으니 그런 것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김영옥: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아시아를 생각할 때 한·중·일만 생각하고 그 외 국가들은 거칠게 이야기해서 진열된 민족성처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제 세대는 서구 제1세계 백인들의 언어를 경유해서 아시아와 만나왔기 때문에 아시아 역사들을 면대면으로 만나는 것이 어려웠어요. 아시아 각 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성이 다른데 지리학적으로 같다는 이유로 하나로 여겨지고 또 다른 언어를 빌려와야만 한다는 점이 어려워요. 아시아 사람들이 만났을 때 각각 자신의 언어를 버리고 제3의 언어를 이용하는 것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요.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고, 물론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조심해야하는 문제죠.





관객: 아버지에게 자신감 있게 대화를 청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모습이 부녀만의 특성이지 않나 생각도 드는데 이 관계를 어떻게 확장시켜 바라보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임경희: 사실 이 친구는 과거에 굉장히 저항적으로 살았어요. 아버지와 굉장히 많이 부딪혔어요. 아버지가 공부를 하라고 해서 하긴 했지만 이 친구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부단히 노력했던 거예요. 저는 이 이러한 고집이 아버지가 이 친구를 돕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이 친구의 의견이 아버지의 의견보다 더 많이 언급되었고 아버지를 납득시키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어요. 종국에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학자가 이 일을 부탁했을지라도 기꺼이 완성했을 거라 이야기하더라고요. 단순히 부녀 관계가 아니라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간의 화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관객: 과연 아버지에게는 글을 완성할 사람이 딸밖에 없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아버지는 딸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이 두 분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경희: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 두 분을 보면서 제가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본 것 같아요.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편에서 굳건히 입장을 지켜주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대 간 화해를 하자는 것은 의견을 같게 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보자는 거죠. 



김영옥: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본인이 딸에게 가르치려고 한 책을 버리려고 했다는 부분이에요. 딸이 좋아하는 책을 버린 게 아니라 본인이 가르치려했던 책을 물에 젖게 내버려둔 거잖아요. 딸이 어렸을 때부터 진지하게 계승의 관계를 가지려고 했던 모습을 볼 수 있죠. 세대 간의 갈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들이 살아온 환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자랐던 그 과정을 부인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무조건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저만큼 이르게 되었나 알아보는 게 중요해요. 세대 간 갈등은 필연적이죠. 그 갈등을 풀려는 노력도 필연적이어야 해요. 동상이몽이지만 한배에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 될 것 같네요.



강유가람: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부탁드릴게요.



김영옥: 말씀드렸다시피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푸는 방법과 의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임경희: 영화 마지막에 부녀가 훈춘이라는 지역에 가요. 그곳에서 아버지가 ‘이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밖에 없잖아’라는 이야기를 해요. 단지 딸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 하는 말로 들렸어요. 이제 우리 차례가 된 것이죠. 제목인 ‘난잎으로 칼을 얻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난잎'은 지식이나 생각을 말해요. 그대로 있으면 그냥 생각과 지식에 불과해요. '칼'과 연장도 그것만 있다면 아무렇게나 휘두를 뿐이죠. 이 두 가지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해보고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노력해보자는 거예요. 늦은 시간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단지 한 아버지와 딸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와 새롭게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딸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주고 싶어 한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쩌면 그녀의 생각보다 간절하게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물려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딸의 도약을 바라본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모든 ‘다훈’이들에게 난잎으로 칼을 얻는 사람들의 세상이 되기를 당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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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교차로에서 태어난 <버블 패밀리>




천주희 (문화연구자)



도시, 가족, 그리고 욕망의 교차로에서: 버블 패밀리 탄생기 

<버블 패밀리>는 한 가족의 늦둥이 딸이자, 감독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80년대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키드’로 자란 감독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강남’은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장소이다. 문화, 자본이 응축된 도시랄까. 그러나 감독인 화자는 성장할수록 자신이 강남과 어울리지 않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결국 그녀는 독립과 함께 강남을 벗어났고, 몇 년 만에 “온전히 나만의 삶”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삶에 안착하는 듯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1980년대 후반, 감독의 부모님은 경제성장과 건설업 부흥기에 소위 ‘집장사’라 불리는 중소건설업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다. 집을 짓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라 한 달에 억대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부모님은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구입했고, 중산층에 입성했다. 박정희, 노태우 정권에 부흥했던 부동산 시장은 부모에게 전성기를 선물했다. 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중소건설업 사장님이 되었고, 주부였던 어머니는 사모님이 되었다. 하지만 IMF 이후 몰락한 가족은 아파트 건너편 빌라로 이사했다. 부모는 15년 째 낡은 빌라에서 다시 아파트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이미 부동산 붐은 끝났고, 더 이상 3저 호황의 행운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건물을 분양받아 투자하면 다시 성공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를 바라보는 딸은 다른 세상에 산다. 학자금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고, 독립한 지 7년이 되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가 사는 강남에 집을 얻을 경제력은 없다. 겨우 얻은 집은 천장에서 물이 샌다. 부모가 거주하는 강남 집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집주인은 이사 갈 것을 권하고, 부모님은 다음 달 월세조차 버거워한다. 당장 이사를 하거나 대책을 세워야 함에도 아버지는 딸에게 제작비로 받은 돈 100만 원을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권한다. 강남에 머물고자하는 욕망과 이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는 딸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간다. <버블 패밀리>는 이런 간극의 지점에서 사회적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위태로운 경제상황에서도 그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지 포착한다. 

언제부터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어긋남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족을 잇는 건 ‘버블패밀리’라는 이름뿐이다. 버블 속에는 가족의 간극, 균열, 원망이 담겨있다. 엄마는 가족 몰래 딸 명의로 땅을 사두고, 딸은 그 돈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길 바라고, 아버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나지 않은 부채를 안고 산다. 하지만 감독은 이 어긋난 욕망을  ‘도시’, ‘가족’, ‘거품’이라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새롭게 재구성한다. 가족은 아버지 명의로 경매에 넘어간 땅에서 조금이나마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기도 하고, 딸은 엄마가 자신의 명의로 사둔 땅을 보러 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의 태도가 부모의 관점이나 입장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다. 과거 행복했던 가족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애쓰거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경제위기를 봉합하려 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는 서로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존재하고, 긴장 속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여성의 시선으로 본 한국경제

한국의 경제사를 설명하는 데 <버블 패밀리>는 독특한 시선을 지닌다. 하나는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에서 출발해 거시적인 경제의 욕망과 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에서 딸로 이어지는 여성의 관점에서 버블경제를 조명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동안 한국의 버블경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드러날 수 없었던 시선이었다. 경제란 늘 거대한 통계와 지표로 움직이는 것이라 맹신하는 집단을 통해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여성의 서사와 가족의 서사는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버블 패밀리>에는 엄마의 기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엄마는 중산층 주부의 시선에서 딸과 가족의 일상을 홈비디오에 기록한다. 중산층의 단란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외동딸에게 공주님처럼 분홍 드레스를 입히고, 호화로운 생일파티를 해주고, 유원지와 바다 여행, 발레 공연과 노래하는 모습까지 담았다. 그곳에는 화목한 가정이 있다. 하지만 1997년, IMF와 함께 엄마의 기록은 멈춘다. 그 후로 다큐 감독이 된 딸은 2010년 이후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기록되지 않은 가족의 몰락사를 현재 가족의 언어와 풍경으로 복구시킨다. 거품이 꺼진 이후, 가족의 이야기는 엄마의 시선과 대비된다. 낡아서 누렇게 변색된 벽지, 망가진 싱크대, 고장 난 보일러, 연체된 세금 고지서, 아버지의 부채까지. 어느 하나 멀쩡한 것 없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미소 지으며 빨리 나오라던 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20년 전과 전혀 다른 가족의 모습이다. 

한편 <버블 패밀리>에는 아버지의 시선이 없다. 아버지는 늘 조연처럼 등장한다. 엄마에게는 출근하는 남편이었고, 딸에게는 집이나 종로를 배회하는 아버지였다. 그동안 경제 담론에서 전성기는 남성들의 서사로 채워진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실제로 거품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뒷수습은 늘 여성의 몫이었다. 남편의 빚을 몰래 갚는 엄마의 이야기는 IMF 이후 여성들이 가족경제의 붕괴와 부채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남편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는 건 아내였고, 주부들은 대거 서비스직이나 노동시장으로 떠밀리듯 나갔다. 감독의 엄마도 그랬다. 텔레마케터로 일하면서 부채와 생계를 책임져왔다. 그리고 이 가족의 또 다른 여성인 딸은 결국 어려워진 집안 경제를 다시 수습하고자 집에 들어와 가장 역할을 맡는다. 

경제에도 시간이 있다면, <버블 패밀리>는 여성의 시선에서 거품경제의 낮과 밤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보낸 시간이 낮이라면, 딸이 보내는 시간은 밤의 시간이다. 가족을 바라보는 둘의 다른 시간과 시점은 <버블 패밀리>에서 만난다. 고성장기에 사업수완으로 덕을 본 부모는 가족이 가장 찬란했던 때를,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자녀는 가족이 가장 힘겨운 때를 기록하고 지탱한다. 다큐 후반부에서 어머니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딸에게 묻는다. “밤에 나오니까 어떻습니까?”라고. 오히려 그 질문은 어머니가 스스로 묻고 싶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고요해 보이지만, 다시금 무엇인가 움트기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에 그녀는 딸과 함께 서로를 비춘다. 

<버블 패밀리>는 과거와 현재 달라진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끝난다. 이 가족의 행보가 궁금한 이유는 수많은 버블패밀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욕망과 개인의 욕망 교차로에서 태어난 ‘버블패밀리’는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경제라는 것은 한낱 거품과도 같아서 큰 행운도 큰 몰락도 없다는 것을. 하루하루 서로 마주하고 살아가는 관계양식 그 자체가 경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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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개개(個個)의 역사

<개의 역사>


정경희 (세컨드 필름 매거진 에디터)


“그 개가 어떤 개인데 다큐를 찍어요?” 영화 초반 개를 산책시키는 아주머니가 감독에게 묻는다. 동네를 떠돌다 잡아먹힐뻔 한 걸 지금은 사라진 대관령 슈퍼 할아버지가 거둬 돌보았다는 개. 기구하지만 흔한 사연을 지녔다. 사회가 주목할 만한, 뉴스가 다룰 법한 이야기는 아니다. 감독은 이 개를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었다. 관객 역시 감독에게 묻고 싶어진다. 왜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느냐고.

감독은 애매하게 답을 유보한 채 개에 관한 주민들의 기억을 수집하려 동네를 돌아다닌다. 주민들의 기억은 대체로 개가 있다는 건 알지만 언제부터 있었고 어떻게 사는지는 모른다는 식이다. 오히려 개에 관한 헐거운 기억의 틈 사이로 동네에 얽힌 각자의 기억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개를 알고자 한 감독의 카메라에는 개와 주민들의 얼굴, 가파른 계단, 학교 앞, 비둘기, 고양이, 골목 모퉁이, 감독이 열 세 번째로 이사한 집이 담긴다. 십 년도 더 전 이 동네에 살았다는 친구의 목소리가 그 위를 흐르고, 오래 함께한 개가 죽었던 감독의 기억이 끼어든다. 여전히 왜 이 개인지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한 채 대상과 어긋난 카메라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과 어긋난 사운드가 얼기설기 이어 붙여져 교차한다. 감독의 시선도 주민의 증언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힘을 행사하지 못한 채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에서 멀어져 언저리를 맴도는 영화 <개의 역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힘을 분산시키고 주변부를 끌어들인다. 개에 관한 각자의 느슨한 기억들이 그에 얽힌 주민들 자신의 역사와 후암동의 이곳과 저곳, 예전과 지금을 드러낸다. 감독이 이사를 가며 비슷한 결의 다른 시공간이 새롭게 개입되고 그곳에 사는 얼굴들과 발생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한 데 모인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에 의도치 않은 얼굴들이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관객은 그 난데없음에 카메라 밖 세계를 의식한다. “동시에 일어났던 다른 중요한 어떤 일들”이 있음을 고려한 감독의 연출, 편집 방식은 중심을 해체하고 주변을 수집해 조명한다. 개의 역사를 알고자 했던 영화는 개개의 역사들을 건드리고 교차시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한다. 하찮다 여겨지는 것들로 쓰인 이 새로운 서사는 도무지 하잖아 보이지 않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 가는 시간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 감독은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백구뿐만이 아니다. 이사 간 홍은동 집 이웃 할머니의 역사도, 정자에 모인 할머니들의 역사도 감독은 결국 알아내는 데에 실패한다. 이는 그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분”이기 때문도, 그래서 “그동안에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도 아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완벽히 다 안다는 것은 필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파악할 수도 없는 수많은 개개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쉽게 묻혀버린다. 앎의 필연적인 실패는 알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의문을 던진다. 어차피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개의 역사를 알아내는 일이 애초에 실패할 것이었다면, 감독의 노력은 무의미했던 것일까.

역시 영화의 말미 감독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삶을 사랑하고자 찍게 된 <개의 역사>는 무언가를 알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다. 백구라는 개에, 이웃들에, 동네 구석구석에 관심을 가지고 살핀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지 않은 앎의 대상은 하나의 존재가 되어 다가왔고 촬영자와 피사체는 존재 대 존재로 관계를 맺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며 오디션 지원을 돕기도, 개를 같이 묻으러 가기도 한다. 대상이 아닌 존재를 담는 카메라는 먼발치에서 뒤따르거나 지켜볼 뿐 알려달라고 강요하지도, 원하지 않는 걸 공개하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알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살피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삶을 함께한 기억은 소중한 이의 마지막을 지키는 힘이 되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 가는 시간들”을 지연시킨다. 감독이 <개의 역사>에서 수행한 사랑의 방식은 삶을 소중한 관계와 기억들로 채워 사랑하는 것이었다.

중심을 해체하고 주변을 조명해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 이성을 맹신한 채 안다고 믿으며 쉽게 정의 내리지 않는 것, 하나의 관점이 아닌 개개의 상황을 고려해 보살피는 것 모두 페미니즘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취하는 중요한 방식들이다. 흔히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로 오해 받는다.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세상의 구도를 옮겨 오자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요는 무언가를 중심에 두는 구도 자체를 타파하는 데에 있다. 만일 중심이 있더라도 이분법적 구도 하의 하나의 중심이 아닌 다원화된 중심을 추구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권리를 전면에서 외치는, 흔히 떠올리는 페미니즘 영화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을 발굴해 호명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과 닿아있다. 그러면서도 여성 특유의 시선이라 단정 지을 수만은 없는 감독 자신만의 언어로 삶에 대한 고유한 통찰을 제시하며 작가적 성취를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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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잎과 칼의 변증법적 동행을 느끼고 사유하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영화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처음 볼 때 내 지각은 역사와 정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보면서 나는 이북출신 실향민/이주민이었던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 이야기가 어렴풋이 함께 들리고 보이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아버지의 딸이었던 나는 정다훈 씨가 아버지와 나누는 모든 것들에 깊은 공감과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이북을, 만주를, 중국을 함께 여행했다면 아버지는 그곳을 내게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이 영화는 딸이 오랫동안 불화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아버지가 남한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면서 품었던 신념과 꿈, 세계관을 이해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여성주의 인식론은 지식체계가 특정 언어주체들(현실 속에서는 남성들, 그 남성들 사이에서도 물론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펼친 ‘자기만의 리그’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입장’과 ‘상황’에 입각한 상호교차적 지식 생산을 제안해왔다. 여성이 언어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늘 ‘남성 멘토들’의 허가와 승인이 필요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으며 애드리안 리치는 행간에 깃들어있는 울프의 불안과 주저함에 한숨을 내쉰다. 서구에서 많은 여성 작가들은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를 추적해왔다. 불화와 갈등의 사적· 공적 맥락들과 정황들,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는 심층 분석, 그리고 이해와 화해 등으로 그 추적의 서사는 이어진다. 한국 텍스트의 역사에서 나는 치밀한 부녀 관계 추적을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근 40여년에 이르는 한국 여성주의 이론, 담론, 운동의 역사는 모성 이데올로기나 ‘어머니 역할’,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해서 괄목할 만한 결과들을 내놓았다. 천지에 깔려 있는 게 ‘아버지 목소리’ 아닌가. 귀를 틀어막아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 목소리를 깊이 ‘듣고 싶어 할’ 열정도 시간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소리도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환기시킨다. 장녀에게 자신의 꿈과 신념, 역사관을 ‘전승’하고 싶어 하는, 딸이 속한 세대에게 지킬 가치가 있는 관점이나 삶의 태도 하나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어 하는 영화 속 아버지는 학자로서, 선배세대로서, 한 남성 개인으로서 진심을 다한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에서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의 분리는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딸이 강력한 언어주체로 등장하면서 아버지/아버지 세대의 해석 위치의 유동성을 명백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딸 정다훈씨가 말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는 딸이 부족함 없는 언어주체가 되어 ‘가부장적 상징질서 체계’ 속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하도록 이끌려는 멘토의 의지에서(‘평생 지도교수님 파파’!) 기인한다. 딸은 저항하면서 아버지와는 다른 가치관과 해석적 시각을 얻으려 고군분투했고, 그 다른 가치관과 해석적 시각은 명료한 민족주의적 가치관이나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읽고 쓰고 발표하는 국제적’ 지식인의 위치를 넘어선다. 딸이 이해하는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상이한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두고 논쟁하는 구체적 사람, 장소, 윤리, ‘진실’을 질문하기 등이 있다. 윤동주의 국적이 무엇이냐를 두고 (가부장적 국가/민족인) 중국과 한국이 힘겨루기를 할 동안 2015년 32세인 한국여성지식인 딸은 ‘열린 민족주의’를 제안한다. <아리랑>에 묘사된 독립운동가 김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딸은 조용히, 그러나 매우 명료하게 아버지와 자신의 입장 차이를 밝힌다. 아버지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연도가 중요했고, 딸은 독립운동가 김산의 ‘개인 인격’에 주목한다. 아리랑 자체에 민족주의적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펄펄 뛰는 혁명의 열정을 품고 국제적으로 행동하던 개인 김산에게 아리랑은 어떤 의미였으며, 탈제국주의적 탈영토화의 혁명 추구에 어떤 효과를 발생시켰는가가 관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화는 종종 멘토인 아버지가 묻고 멘티인 딸이 대답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견해와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조금씩 수정하거나 자신의 견해와 만나게 하는 딸의 후배지식인 위치를 드러내는 식으로 장면들은 이어진다. 아버지와 딸 모두 제3의 통찰에 이르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이제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힘’을 지닌 딸/딸 세대의 정치적 역량이 돋보인다. 더 이상 무조건 참거나 피하거나 고통당하지 않는 딸들의 이야기.   
(아주 개인적인 지각 하나. <아리랑>을 두고 부녀간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시지각에 문제가 있는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딸의 무릎 위로 다리를 얹고 있다. 살갑고 다정한 이 장면 전에 아버지는 혼자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있다. 붉은 소파는 내게 순간적으로 자기 분석이 이뤄지곤 하는 ‘붉은 소파’를 떠올렸고, 딸의 도움을 받아 ‘자기’를 분석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다음 장면이 읽혔다.)              

마지막으로 나는 ‘동북아와 전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이 영화가 조명하고 있는 한 아버지/지식인/역사가/여행자/집필자/아픈 사람의 모습이 소중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이 아버지는 안중근과 그의 일본인 적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적 조우를 소개할 때도, 전 재산을 다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66세에 거사를 꾀하다 붙잡힌 이회영을 소개할 때도, ‘선구자’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소개할 때도 뛰어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인다. 그에게 역사는 ‘추구하고 느끼고 열망하며 자신을 기투하는 인격들의 삶 이야기’다. 민족의 비극이라는 거대 서사의 주제가 경직된 민족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체화된 역사이해 덕분일 것이다. 선구자 노래 한 소절만 부르려 해도 눈물이 나는 ‘아버지’를 15년 전과 달리 이제 이해하게 된 딸의 눈에서도 눈물이 배어날 때 ‘우리’도 잠시 ‘우리임’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열린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민족주의란 오로지 정체성이 부인될 때 정치적 저항으로 내세워질 수 있을 뿐, 국가(혹은 여타의 승인된 정체성)가 건설된 이후라면 더 이상 주장될 수 없음을 가르치려들지 않으면서 느끼게 해주는 정동의 장면이랄까. 한반도, ‘통일’, 독립운동, 민족, 압록강, 두만강, 삼천리, 삼천만, 동포, 그리운 금강산, 비둘기, 조선, 선구자 등의 용어들이 정동적 흐름으로 용해되어 어떤 하나의 정치적 평화 미래 비전의 몸체를 얻게 되는 2시간 여. 이 시간 동안 ‘우리’는 ‘현재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세대 윤리관이(물론 어떤 목소리로 전해지는가가 관건이다) ‘기록이 아닌 기억을 통해 미래를 마련하겠다’는 딸 세대의 윤리관과 어떻게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지 경험하며 기억하기의 방식들을 같이 고민해보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극장을 나선 뒤엔? 이 답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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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삶’과 ‘노동’에 접속하기

<그녀들의 점심시간>


강남역 10번 출구 활동가 이지원


영화 <그녀들의 점심시간>에는 총 열 명의 여성들이 출연한다. 카메라는 별다른 사건이나 반전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취업준비에 지쳐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모습, 직장에서 상사에게 지적받는 모습, 사람 없는 경로당에 누워 잠든 모습……. 우리는 연령도, 직업군도 모두 다른 그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은밀하게 접속된다.

직업이 배우인 ‘그녀’는 임신 이후 난생처음으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삶에서 일이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미뤄왔던 임신을 한 그녀는 때로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기도 했던 임신의 경험이 배우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녀에게 임신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뤄왔던 것이지만 지금은 어머니로서의 행복과 배우로서의 자원, 양쪽 모두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어머니로서의 행복 이면에 있는 육아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그녀’의 하루는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빵으로 늦은 아침을 때우다가도 아이가 깨어 엄마를 찾으면 먹던 빵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달려가 아이를 얼러 안아야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고 난 뒤 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아이들에게 밥을 다 먹이고 본인의 식사를 챙길 때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를 찾는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강도의 노동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녀의 정신없는 식사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부터 질문해보아야 한다.

사회는 ‘그녀’의 하루에 노동이 있다고 이야기할 것인가? 육아는 어째서 ‘그녀’의 몫인가? ‘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노동임을 주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보자. 모성애 없는 여자, 비정한 모정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집에서 놀고 먹으며, 떼로 몰려다니며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고 아이 단속도 하지 않는 엄마”를 지칭하는 ‘맘충’ 서사가 대중화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한국사회에서의 모성신화는 여성의 영역을 가정으로 규정하고, ‘육아’라는 엄청난 노동을 어머니로서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으로 포장해왔다. 이는 비단 육아 뿐 아니라 가사노동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빛 좋은 개살구”, 골드미스인 ‘그녀’가 결혼과 출산을 하고 싶다고 느끼면서도 “가정에서의 ‘나’가 되는 것은 밥을 차린다는 것”이라고 통찰하듯이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밥 차리는 것’이야말로 젠더화된 노동이다. 누군가에게 식사시간은 휴식의 시간일 수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특히 여성에게는 식사시간이란 으레 노동의 시간인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는 타인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동안 “전쟁을 치른다.” 뒷정리까지 모두 마친 그녀는 늦은 시간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손님맞이는 계속된다. 그녀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여유로운 점심시간은 사실상 그녀의 노동 위에 서있는 셈이다.

신발가게를 하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식사할 때와 혼자 식사하는 지금을 비교하며 “그때는 반찬도 신경 써서 준비하고, 예쁘게 차려 먹”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남은 반찬으로 점심을 먹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여자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요리”하는 것인데, 이것이 비단 그녀만의 생각인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취업준비생 ‘그녀’는 혼자 식사하는 또 다른 출연자다. PD의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강의를 듣는 등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되고 싶은 욕구만 남아있고, 실패한 기억 뿐”인 그녀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과정은 녹록치 않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돌아올지를 확신하기 어려운 채로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취업준비생에게 식사다운 식사란 어쩌다 친구와 만났을 때에야 겨우 가능한 것이다. “이게 7일째 된 밥인가? 괜찮아. 먹고 소화하면 돼.” 되고 싶은 모습과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의 외로움과 불안함은 그러나 그 되고 싶은 모습이 된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의 행복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택시기사인 ‘그녀’는 “택시는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차 안에서 김밥으로 식사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얼른 먹던 것을 멈춘다. 그러나 “운전하는 것도, 손님과 이야기 나나누는 것도,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아하는 그녀는 택시운전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여성 운전자로서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에도 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린다.

한편, 함께하는 점심시간을 통해 노동의 고단함을 잠시 잊어내는 경우도 있다. 경마장 청소노동자인 ‘그녀들’은 돈을 잃은 경마꾼들의 예민함에 힘든 노동의 시간을 보낸다. 관리자는 청소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맛이 없”던 밥도 “여럿이 먹으니 맛있다.”는 그녀들은 서로 반찬을 나누고, 너무 적게 먹는다며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의지한다. ‘식구’의 뜻이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임을 비춰봤을 때, 그녀들에게 점심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식구인 시간이다.

경로당의 ‘그녀’ 역시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아침도 못 먹고 온” 노인들의 식사를 챙긴다. 이틀 안 나오면 궁금해서 전화를 한다는 그녀는 그 이유를 “식구니까”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경로당의 할머니들은 같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앉아 식재료를 다듬는다. 경로당이라는 공간에서 모두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음으로서 그들은 혼자가 아닌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과 노동 속에서 그녀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또래 여성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하드록, 블루스록 같은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고, 누군가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저녁만이라도 맛있는 식사를 찾아 먹기도 한다. 또 함께 먹는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든든한 식구가 되는 ‘그녀들’이 있는가 하면, 고된 취업준비의 시간 속에서 간간히 친구를 만나 “밥다운 밥”을 먹는 ‘그녀’가, 자신의 일을 온 몸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그녀’가 있다.

영화는 “점심시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생활의 기본적인 영역인 식사를 조명함으로서 여성들의 삶과 노동에 진하게 접속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점심시간”을 통해 만나는 그녀들의 삶과 노동이 각자 분리된 듯 연결되어 있고, 어쩌면 ‘그녀들’을 바라보는 ‘나’의 그것과도 닮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맛있기만 한 것은 아닌, ‘그녀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게 와 닿는다.

영화 속 ‘그녀들’, 그리고 영화 밖의 ‘그녀들’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매일 먹는 밥을 짓고, 먹고, 나누며 ‘우리’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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