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잎과 칼의 변증법적 동행을 느끼고 사유하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영화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처음 볼 때 내 지각은 역사와 정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보면서 나는 이북출신 실향민/이주민이었던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 이야기가 어렴풋이 함께 들리고 보이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아버지의 딸이었던 나는 정다훈 씨가 아버지와 나누는 모든 것들에 깊은 공감과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이북을, 만주를, 중국을 함께 여행했다면 아버지는 그곳을 내게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이 영화는 딸이 오랫동안 불화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아버지가 남한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면서 품었던 신념과 꿈, 세계관을 이해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여성주의 인식론은 지식체계가 특정 언어주체들(현실 속에서는 남성들, 그 남성들 사이에서도 물론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펼친 ‘자기만의 리그’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입장’과 ‘상황’에 입각한 상호교차적 지식 생산을 제안해왔다. 여성이 언어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늘 ‘남성 멘토들’의 허가와 승인이 필요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으며 애드리안 리치는 행간에 깃들어있는 울프의 불안과 주저함에 한숨을 내쉰다. 서구에서 많은 여성 작가들은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를 추적해왔다. 불화와 갈등의 사적· 공적 맥락들과 정황들,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는 심층 분석, 그리고 이해와 화해 등으로 그 추적의 서사는 이어진다. 한국 텍스트의 역사에서 나는 치밀한 부녀 관계 추적을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근 40여년에 이르는 한국 여성주의 이론, 담론, 운동의 역사는 모성 이데올로기나 ‘어머니 역할’,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해서 괄목할 만한 결과들을 내놓았다. 천지에 깔려 있는 게 ‘아버지 목소리’ 아닌가. 귀를 틀어막아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 목소리를 깊이 ‘듣고 싶어 할’ 열정도 시간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소리도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환기시킨다. 장녀에게 자신의 꿈과 신념, 역사관을 ‘전승’하고 싶어 하는, 딸이 속한 세대에게 지킬 가치가 있는 관점이나 삶의 태도 하나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어 하는 영화 속 아버지는 학자로서, 선배세대로서, 한 남성 개인으로서 진심을 다한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에서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의 분리는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딸이 강력한 언어주체로 등장하면서 아버지/아버지 세대의 해석 위치의 유동성을 명백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딸 정다훈씨가 말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는 딸이 부족함 없는 언어주체가 되어 ‘가부장적 상징질서 체계’ 속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하도록 이끌려는 멘토의 의지에서(‘평생 지도교수님 파파’!) 기인한다. 딸은 저항하면서 아버지와는 다른 가치관과 해석적 시각을 얻으려 고군분투했고, 그 다른 가치관과 해석적 시각은 명료한 민족주의적 가치관이나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읽고 쓰고 발표하는 국제적’ 지식인의 위치를 넘어선다. 딸이 이해하는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상이한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두고 논쟁하는 구체적 사람, 장소, 윤리, ‘진실’을 질문하기 등이 있다. 윤동주의 국적이 무엇이냐를 두고 (가부장적 국가/민족인) 중국과 한국이 힘겨루기를 할 동안 2015년 32세인 한국여성지식인 딸은 ‘열린 민족주의’를 제안한다. <아리랑>에 묘사된 독립운동가 김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딸은 조용히, 그러나 매우 명료하게 아버지와 자신의 입장 차이를 밝힌다. 아버지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연도가 중요했고, 딸은 독립운동가 김산의 ‘개인 인격’에 주목한다. 아리랑 자체에 민족주의적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펄펄 뛰는 혁명의 열정을 품고 국제적으로 행동하던 개인 김산에게 아리랑은 어떤 의미였으며, 탈제국주의적 탈영토화의 혁명 추구에 어떤 효과를 발생시켰는가가 관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화는 종종 멘토인 아버지가 묻고 멘티인 딸이 대답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견해와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조금씩 수정하거나 자신의 견해와 만나게 하는 딸의 후배지식인 위치를 드러내는 식으로 장면들은 이어진다. 아버지와 딸 모두 제3의 통찰에 이르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이제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힘’을 지닌 딸/딸 세대의 정치적 역량이 돋보인다. 더 이상 무조건 참거나 피하거나 고통당하지 않는 딸들의 이야기.
(아주 개인적인 지각 하나. <아리랑>을 두고 부녀간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시지각에 문제가 있는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딸의 무릎 위로 다리를 얹고 있다. 살갑고 다정한 이 장면 전에 아버지는 혼자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있다. 붉은 소파는 내게 순간적으로 자기 분석이 이뤄지곤 하는 ‘붉은 소파’를 떠올렸고, 딸의 도움을 받아 ‘자기’를 분석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다음 장면이 읽혔다.)
마지막으로 나는 ‘동북아와 전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이 영화가 조명하고 있는 한 아버지/지식인/역사가/여행자/집필자/아픈 사람의 모습이 소중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이 아버지는 안중근과 그의 일본인 적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적 조우를 소개할 때도, 전 재산을 다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66세에 거사를 꾀하다 붙잡힌 이회영을 소개할 때도, ‘선구자’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소개할 때도 뛰어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인다. 그에게 역사는 ‘추구하고 느끼고 열망하며 자신을 기투하는 인격들의 삶 이야기’다. 민족의 비극이라는 거대 서사의 주제가 경직된 민족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체화된 역사이해 덕분일 것이다. 선구자 노래 한 소절만 부르려 해도 눈물이 나는 ‘아버지’를 15년 전과 달리 이제 이해하게 된 딸의 눈에서도 눈물이 배어날 때 ‘우리’도 잠시 ‘우리임’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열린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민족주의란 오로지 정체성이 부인될 때 정치적 저항으로 내세워질 수 있을 뿐, 국가(혹은 여타의 승인된 정체성)가 건설된 이후라면 더 이상 주장될 수 없음을 가르치려들지 않으면서 느끼게 해주는 정동의 장면이랄까. 한반도, ‘통일’, 독립운동, 민족, 압록강, 두만강, 삼천리, 삼천만, 동포, 그리운 금강산, 비둘기, 조선, 선구자 등의 용어들이 정동적 흐름으로 용해되어 어떤 하나의 정치적 평화 미래 비전의 몸체를 얻게 되는 2시간 여. 이 시간 동안 ‘우리’는 ‘현재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세대 윤리관이(물론 어떤 목소리로 전해지는가가 관건이다) ‘기록이 아닌 기억을 통해 미래를 마련하겠다’는 딸 세대의 윤리관과 어떻게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지 경험하며 기억하기의 방식들을 같이 고민해보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극장을 나선 뒤엔? 이 답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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