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한줄 관람평

송희원 | 성 밖에서 소년, 소녀 덫에 걸리다

이현재 | 정갈한 클리셰와 기시감들

박영농 | 땅과 하늘은 닿아있지 않다

이지윤 | 무너져 버린 돌담 한 귀퉁이에 흩날리는 눈발

최지원 | 단단한 성벽과 구덩이 안, 눈이 내리듯 따스한 빛도 닿을 수 있기를

김은정 | 비겁하게 도망쳤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나



 <눈발> 리뷰: 눈이 오지 않는 마을에 눈발이 흩날리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마을이 있다. 하얀 눈의 흔적이 없는 탓에 햇살이 가득한 마을의 풍경은 어느 봄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성’(固城)이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마을에 불길한 기운을 막아주는 견고한 성벽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바람과 햇살만이 감도는 마을에는 고요한 평화가 존재한다. 어느 날, 겨울이 봄처럼 느껴지는 평화롭고도 낯선 마을에 한 소년이 온다.



소년은 이방인이다. 마을에 적응하려 노력하지만, 모든 것이 녹록치가 않다. 평화로운 분위기와 상반된 날 선 일상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소년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에겐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이 있다. 충분치 않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로 몰렸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소녀는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동급생들의 가혹한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상처투성이의 소녀에게 소년은 손을 내민다. 머뭇거리던 소녀는 이내 소년이 내민 손을 맞잡는다. 견고한 마을 안에서 상처 받은 그들은 교감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차가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길을 잃고 구덩이에 빠진, 자신들의 처지와 꼭 닮은 작은 염소를 보살피기도 하고 마을 외곽을 둘러 싼 높은 돌담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무너져 내린 돌담의 한 귀퉁이를 발견한다.


그들이 발견한 허물어진 돌담의 한 귀퉁이는 완성형이라 믿고 있던 공동체의 허점을 연상시킨다. <눈발>의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약자에 대한 날 선 어조와 배타적인 분위기, 폭력을 용인한다. 지속되는 약자에 대한 가해는 ‘불길한 기운을 막아준다’는 성벽 그 자체로 둔갑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상처와 자기혐오, 눈물과 트라우마는 자연스럽게 묵인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그의 잔재를 짓밟고 올라 평화를 가장하는 모습은 위선적이고 아이러닉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비단 작품 속 세상만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품은 이런 공동체의 위선과 아이러니를 한 시간 반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외치면서 소녀를 외면하는 교회의 모습은 작품 속에서 틈틈이 등장하며 사회의 위선을 꼬집는다. 소년이 건강을 위해 꼬박꼬박 챙겨먹던 보약은 그가 애정을 담아 보살피던 염소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살인자로 통하는 남자의 딸은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희생시키며 삶을 영위하는 아이러니, 가해자와 피해자의 얄팍한 경계와 뒤바뀜에 대한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주되게 다뤄지며 관객들에게 어떤 기시감을 안긴다.



작품 밖의 사회까지 흐르는 아이러니와 위선은 결말부에서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결부되며 비극적인 여운을 남긴다. 카메라는 소녀를 등지고 견고해 보이는 성벽 안으로 숨어버린 소년을 비춘다. 그리고 그 위로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 12장의 한 부분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성 안의 천장 꼭대기는 하늘에 닿은 듯이 까마득한데 허엽스럼한 연기 같고 안개 같은 것이 잔뜩 서려 있다. 자세히 보니 아래서부터 까마득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칸칸이 모두 벌집처럼 뚫린 방인데 다스리는 소리와, 다그치는 소리에, 대답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에, 비명 지르고 흐느끼는 소리들이 온갖 야수가 모여 울부짖는 깊은 밀림에 들어선 것 같다.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쓰러질 것만 같다. 이번에는 까막까치의 도움말 없이 품안에 손을 넣어 넋살이 꽃을 꺼낸다. 그리고는 허공중을 향하여 힘껏 던진다. 꽃송이가 위로 오르더니 바람을 타고 천천히 맴돈다. 꽃이 펑하고 가볍게 터지면서 수만 개의 꽃잎이 흩어져 눈송이처럼 흩날리다가 밝고 흰 빛으로 변한다. 나는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한다.



마지막 신에서 휘날리는 눈발은 분노와 저항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비극적인 현실에 지쳐버린 많은 이들을 위로한다. 눈발은 꽃잎이 흩어지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맴돌다 무너져버린 돌담의 한 귀퉁이를 포근하게 덮는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소녀의 마음속에서도 눈발이 흩날리다 밝고 흰 빛으로 변한다. 온갖 죄책감이 울부짖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으로 쓰러진 소년 위로도 눈발이 흩날린다. 눈이 내리지 않던 마을에 그렇게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은 쌓이고 쌓여 모두를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로는 마법 같은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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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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