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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단평] 〈서바이벌 택틱스〉: 지나간 당신의 세계

indiespace_가람 2024. 3. 15. 12:46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 〈서바이벌 택틱스〉 스틸컷

 

지나간 당신의 세계 

〈서바이벌 택틱스〉〈일기 수집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어떤 사건이 있고, 그 부재의 대상과 영화의 시간 위를 거니는 두 인물이 있다. 조금씩 어긋나고 충돌하는 시간은 편지의 주체가 불확실함에 따른 모호한 일상적 세계에서 부딪혀 나온다. 이전 화면에 머무르던 이미지는 다른 풍경으로 대체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장면이 따라붙는다. 여기에는 어느 특정 시간대를 통과하는 목소리가 남는다. 〈서바이벌 택틱스〉에서 내레이션의 주체, 편지 속 ‘당신’의 실체, 문장의 진위와 관계없이 편지는 우리가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비선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성희의 잔상이 남아있는 세계-혹은 그 일부, 어떤 사고 또는 파괴의 현장-일 테다. 편지를 읽는 목소리, 내레이션은 그 세계와 결합하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영화 〈서바이벌 택틱스〉 스틸컷

 

 

성령과 우호는 편지가 전해주는 그 세계의 잔해를 좇는다. 이를테면 성희는 개의 주인으로부터 받은 문자를 본 뒤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그때 카메라가 천천히 상승하며 철근 콘크리트가 펼쳐진 공사장의 캄캄한 전경을 비춘다. 성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성희의 시선으로 추정되는 순간의 잔상이 화면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 어둠 위로 순서가 섞인 편지를 펼쳐 맞추어보듯 두 개의 시간대가 공존하고, 한 사람(성령)을 향한 의심과 오해, 영화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른 한 사람(우호)의 이름이 밝혀진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사건의 실마리가 드러난다거나, 오해가 풀리거나, 진실을 깨닫고야 만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안다고 짐작했던 세계는 넌지시 무너져 내리고, 어둠으로부터 더 깊이 내려갔다가, 어떤 풍경에 다다른다는 것 그 자체다.  

 

그 탁 트인 풍경을 보고야 마는 것, 이를 앞선 불확실성에 대한 답이라고 보아도 될까. 삶의 해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약간의 해소와 이상한 막연함이 공존한다. 여기서 떠올린 영화가 있다. 이미 지나간 당신의 세계를 다시 걷는 것, 혹은 그 풍경 안으로 걸어들어가 보려는 것, 때때로 필름처럼 펼쳐 보이는 희미한 기억은 편집된 자투리 영상처럼 남아있다. 〈일기 수집가〉에서 그것은 카메라로 하여금 재편집되어 선명해진다. 감독 자신의 아버지 담은 사적 다큐멘터리인 영화는 보이스오버와 인터뷰, 일상적 푸티지와 자막으로 여러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음성들을 잇는다. 내레이션의 화자인 감독은, 이해해 보려 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라는 대상과 자신 사이 멀고도 가까운 시간의 틈을 바라본다. 〈일기 수집가〉는 나와 서로 다른 당신에 대한 소중하고 감상적인 기록이다. 

 

 

영화 〈일기 수집가〉 스틸컷

 

 

감독은 색이 바랜 종이와 낡은 앨범 속 인화 사진에 담겨있는 대상과 그에 대한 기억, 오래전 소설과 편지, 메모 속에서 몰랐던(혹은 알지 못했던) 이야기, 미처 간직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흩뿌려진 것들을 건져낸다. “먼지가 풀풀 나는” 것, 슬픔의 정동 같은 것,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들은 다시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수필적 이미지로 회고된다. 그 옛 기억에 담긴 물성과 서정적 이미지-질료로부터 감독은 영화만들기라는 과정을 통해 기록과 성찰을 거듭하며, 결국 자신에게서 반복되는 삶의 행태는 당신과 닮아있다고 깨닫는다. 자신이 발견하고 탐구하던 낯섦에 관한 일기는 어떤 결말에 다다른다. 〈일기 수집가〉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작가는 이제 더 이상 그 소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 이제는 나도 그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 (…) 나는 그 작가의 전생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서 비슷한 삶을 살아도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서 같은 문장이 마음에 들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숲의 풍경에 색을 덧입힌다. 여기엔 우리가 달리 보는 풍경과 그 풍경 너머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 있다. 화자이자 감독의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그렇게 화자가 채집한 오래전의 문장은 다시 현재라는 시간과 결합하여 생동성을 머금은 문장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감독은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들려주는 대신, 언젠가 자신이 바라보았던 순간,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지었던 순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대상은 점점 멀어진다. 〈일기 수집가〉의 화자는 아버지가 “이제 추억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아서 “전부 버리려고”한 것들을 “몰래 펼쳐읽”고 “이미 지나간 풍경을 찾”는다고 말한다. 〈일기 수집가〉는 그 풍경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서 당신과 만나려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다정한 마음이 또 다른 당신에게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