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단평] 〈은빛살구〉: 가족의 모양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가족의 모양
〈은빛살구〉 그리고 〈이씨 가문의 형제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지윤 님의 글입니다.
가족은 특이한 공간이다. 모일수록 시끄럽고, 모일수록 웃고 운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닮은 구석을 찾고 또 찾고 끊임없이 우리를 연결 짓는 일은 핏줄을 사이에 두고 계속된다. 그렇기에 서로를 인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쉬워지는 가족이라는 공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은 유난히 작고 큰 생채기를 여럿 만들기도 한다. 그중에는 달래고 어루만져 회복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처들이 더러 있다. 〈은빛살구〉는 그 상처들을 가지고 동해로 떠난다. 이미 한번 떠나온 가족의 현장이다. 그곳에 이방인처럼 도착한 정서(나애진)가 이번만큼은 서로의 눈을 보고 손을 흔들며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은빛살구〉를 따라 도착한 동해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친구, 시내, 집 그리고 가족이라 불렀던 사람들이 있다.
서울에서 동해로, 〈은빛살구〉가 정서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는 ‘돈’이다. 아파트청약에 당첨된 정서는 경현(강봉성)과 자연스럽게 결혼 준비에 돌입하고, 정서가 꿈꾸던 가족의 모양을 누군가 알아채기도 전에 아파트 계약일은 정서를 무겁게 짓눌러온다. 그런 정서는 아빠가 있는 동해로 떠난다. 차용증 붙은 색소폰을 손에 든 채,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선 집이 된 곳에서 받을 돈을 받기까지 머무를 셈이다. 〈은빛살구〉는 이방인 같은 정서에게 불편한 쉼을 부여한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스스럼없이 구는 동생 정해(김진영)도, 계속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 같은 아빠 영주(안석환)도 여전히 불편하지만, 정서는 자신의 집이었던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역시나 오랜만에 본 동네 친구들 틈에서는 꼭꼭 숨기던 자신의 마음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까.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고, 불편함 속에서도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는 것. 가족인 듯 가족 아닌 사람들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정서의 재킷은 여느 때와 같지만, 그의 선택은 완전히 다르다. 이제 정서는 스스로 가족의 모양을 제대로 그리려 한다.
더 이상 우리가 가족이 아니게 되어도, 누군가 남은 자들을 떠나가도, 우리의 대화에는 ‘돈’이 있다. 〈이씨 가문의 형제들〉의 싸움 역시, ‘돈’에서 시작한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할아버지의 집을 두고 큰소리가 오가고, 엄마에게 이혼 사실을 고백조차 하지 못한 ‘나’ 또한 남편과의 재산분할을 앞두고 걱정이 많다. 〈이씨 가문의 형제들〉은 딸과 엄마의 관계를 앞에 두고, 각자의 가족 사이에서 겪는 일들을 겹쳐둔다. 가족이라 겪어야 했던 일들은 지긋지긋하게도 대를 넘고, 시간을 넘어 찾아온다.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순간, 관계는 계산되고, 판단되어 무엇이 남는지 만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은빛살구〉와 〈이씨 가문의 형제들〉 모두 ‘가족’의 이름을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일은 계속된다. 아물지 못한 상처를 들추는 일은 수십 번 반복되고, 이미 해체되었던 가족이 만나 다시 서로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끝에서 가족의 모양을 새로 찾아 나선 듯한 이들의 모습에는 기분 좋은 낯섦이 가득하다. 그들의 얼굴과 표정, 발걸음은 마침내 제일 편한 옷을 입고 제일 편한 집에서 잠을 청한 것 같이 따뜻하고 산뜻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