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단평] 〈오랜만이다〉: 시절과 재회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시절과 재회
〈오랜만이다〉와 〈윤희에게〉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어떤 시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문장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많은 부분이 나아진다. 시대적 상황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서. 때로는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혹은 그런 상대라도 받아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성장이란 말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정직함 중의 하나라 누구에게나 마땅한 단계를 따라 진행된다. 어느 날 만난 우리의 발걸음이 자꾸 엇갈리는 탓도 각자의 속도대로 자라나다 상호 동의 없이 불현듯 교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시절의 한 토막을 공유하는 서로일지라도 그 외의 것들이 모두 다르다. 상대의 이전 시절도 경험한 적 없기에 서로에게 명백히 낯설다. 그렇기에 우리의 잘못은 단지 타이밍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믿음에 우리는 한껏 기대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도 추억은 상흔처럼 남는다. 그리워하는 일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다 더 이상 그리움이 참을 수 없어질 때, 그래서 기억의 흐름을 끊고 인위적으로 교차를 시도할 때. 세상은 새로운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영화 〈오랜만이다〉의 ‘현수’도 고등학교 시절 친구 ‘연경’에게 기타와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시도 덕분에 그들 나이 서른셋에 그 시절은 소환되고 다시 이어진다.
그들 기억의 풍경 대부분에서 ‘음악’이 BGM처럼 흐른다. 연경은 중학생 시절 라디오 경연대회에서 칭찬을 받았던 순간부터 줄곧 음악만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번번이 오디션에서 떨어진다. 포기하려던 찰나, 현수가 보낸 기타는 그에게 악기 그 너머의 의미를 지닌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던 현수와 함께 음악을 공유하던 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깊어져 가던 시점에서 그들은 사소한 오해로 한순간에 멀어지고 만다. 그 때문에 연경은 음악을 향한 기회를 하나 놓치지만, 역시 그로 인해 음악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꿈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는 연경에게 현수의 기타는 오래 망설인 사과이자 적재적소에 찾아온 응원이다. 현수가 건넨 그리움의 증표에서 당시의 열정을 목격한 연경은 다시 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한다. 그는 시절의 서투름과 현수의 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삶의 불가피성에 순응하면서도 자비와 낙관으로 빈자리를 가득히 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 〈윤희에게〉도 엇갈린 시절의 애틋함이 이야기 전반을 지배한다. 어릴 적 ‘윤희’와 ‘쥰’은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누지만 동성애가 하나의 질병처럼 취급받던 시대적 운명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은 한국과 일본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을 떨어져 지내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교차를 시도한다. 〈오랜만이다〉에서 멀어진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매개가 음악이었다면, 〈윤희에게〉는 편지를 택한다. 남몰래 써 내려간 ‘쥰’의 편지는 우연히 윤희와 그의 딸 ‘새봄’에게 닿게 되고, 새봄이 오타루 여행을 제안하면서 둘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단숨에 가까워진다. 다시 만난 그들이 밤을 건너오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그렇게 만난 서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은 동일하게 지속될 수 없기 마련이다. 둘 사이의 공백도 운명이 메우지 못할 만큼 잔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회’라는 낭만적 단어는 필연적으로 시간을 내포하고 있다. 시간의 간극이 부재한 관계는 계속 만나거나 혹은 언젠가 헤어질 뿐,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행위가 주는 기다림과 애절함과 그리움과 벅참을 알지 못한다. 꿈에서 만난 후 멍하니 눈 뜬 아침도, 옛 사진첩에 함께 끼워둔 팔찌의 둥그스런 촉감도,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다 문득 허공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상상하는 고요함도 알 수 없다. 벌받듯이 고단한 인생이었을지라도 20년 간의 그 모든 감정 끝에 마주한 서로는 잠깐의 교차만으로도 마법 같은 치유와 용기를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어떤 순간만이 이유도 모른 채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한 시절의 끝을 선언할 수 있다. 모든 게 준비된 후에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닌, 홀가분해져야 비로소 가능한 시작이 있다.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을 지나온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무자비한 장벽까지 놓여도, 그걸 허물고 나아가는 일 역시 한 뼘 성장한 우리의 몫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오랜만이다〉의 현수도, 〈윤희에게〉의 쥰도 나서서 허무는 자만이 홀가분해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