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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단평] 〈럭키, 아파트〉: 우리를 닮은 집

indiespace_가람 2024. 11. 14. 16:51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닮은 집

〈럭키, 아파트〉 〈딸에 대하여〉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글입니다.

 

인간이 독립된 성체로 거듭나기 위해선 정체성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정한 땅, 대지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유 영역을 ‘집’이라 일컫는다. 견고한 지반 아래 설립된 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이곳에서 부모와 처음 만남을 가지고 언어를 배웠으며, 사회로 나갈 준비를 거치고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이해한다. 집은 인간과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 그들이 긴밀한 시간을 보내는 사적 영역으로 자리 잡았고, 인간 개인의 자아가 침잠한 모계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변모하는 시대에 따라 집의 양상, 기능은 상이해졌다. 집이 자본주의 사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집은 허상이 되어 해체되었다. '주거’ 기능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 집의 개념은 전복되어 기존의 내-외부의 경계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우리의 집은 어느새 계급을 조장하고 상징하는 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과연 동시대 우리에게 진정한 나의 집은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아파트는 최소의 면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가둘 수 있는 감옥으로 자리한 지 오래되었다. 해가 바뀔수록 고도의 기술력은 더 높이, 더 많은 가구를 응집할 수 있는 실용주의의 지표로 상징된다. 소음과 악취에 취약하고, 섣부른 행동이 동 주민들의 커뮤니티에서 왈가왈부 되고, 사생활은 지켜질 수 없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천장, 하늘만을 바라본다. 고개 들어 각기 다른 삶을 꿈꾸려는 인간들의 행보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좌절된다. 감옥, 우물 속에 갇힌 개구리는 그 외의 삶을 알 리 없다.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영화 〈럭키, 아파트〉의 주인공 선우(손수현)와 희서(박가영)는 동성 연인이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들은 지난 거주지에서 연인이라는 사실을 들킨 이후 불쾌한 시선을 받았던 경험이 있고 새로운 곳에서는 그들의 관계를 숨기는 안전 주의의 입장에 선다. 그러나 선우의 실직과 사고 이후, 내부에서 갇힌 생활을 보내던 그에게 집에서 심한 악취가 풍겨 오기 시작하고 그 상황을 알 리 없는 희서는 자신의 직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것에 예민해진다.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옥죄어 오는 상황을 마주하자, 연인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아파트는 악취에 취약하다. 불편한 몸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선우에게 냄새는 오감을 곤두세우고, 관리인에게 항의해 원인을 찾아 달라 요구하지만 아파트는 그녀를 예민한 사람으로만 취급한다.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선우는 그저 쓰레기를 문밖으로 내놓을 뿐이다. 성소수자인 그들의 이야기가 틈새로 새어 나갔을 때, 어떤 위협이 닥쳐올지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선우에게는 예상치 못한 것들이 문 안팎을 오가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은 빠르게 그들의 권역에서 해치워야 한다. 선우는 틈새를 막기 위해 덕지덕지 테이프 칠을 하는데, 이는 침입을 막기 위해서면서도 자신들의 것이 새어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그러나 선우는 그 악취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이전의 행동을 멈출 리 없어 보인다. 아파트 동내에 사람들에게 민원을 알리고 하다못해 직접 아랫집에 발을 들인다. 홀로 삶을 마무리한 할머니의 집안 풍경이 기억에서 떠나보내기 어려운 듯 집안에 남들 몰래 침입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왜 혼자 살게 되었는지, 거실에 놓인 그녀의 과거 사진을 통해 확인한다. 왜 한 여름날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가던 할머니의 등이 그녀의 꿈속까지 찾아왔는지.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영화의 후반에 이를수록 선우의 행위가 악취의 불편함을 호소하기 위한 목적을 벗어나고 있다. 그녀의 시신 분자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덮어 버릴까 두려워하던 것을 넘어, 화분 할머니의 장례를 모시고 마주하는 것을 고대한다. 선우는 직접 할머니의 메모장을 뒤져 과거의 연인을 찾고 그녀의 죽음을 고해드렸고. 가족이 아니면 장례를 모실 수 없다는 시스템의 한계에 답답함을 호소하다, 연인 희서와 함께 사진을 찾아 나름의 장례를 모신다. 그렇게 그만의 애도를 보낸다.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보금자리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연인의 생계를 위협하던 아파트 주민들, 눈엣가시 같은 1410호를 추방하려는 듯 서슴지 않는 혐오 발언. 영끌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았으나, 가시화된 차별만으로 그들도 똑같은 사회 구성원임을 잊었다는 듯 발악하는 사람들. 선우와 희서는 그들의 추궁에 나무랄 사람은 서로 밖에 없다는 듯 되려 서로의 관계에 날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화분 할머니의 과거를 마주한 이후 선우는 현실적인 돈 문제에 가려져 있어 놓칠 뻔한 자신의 고유의 영역에 대해 돌이켜본다. 사회의 눈치를 보다, 결국 홀로 삶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르는 미래. 화분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을 귀추 할 수밖에 없었던 선우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라도 그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진심에 도달한다.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선우와 희서가 함께 아파트 밖 양지바른 곳에 그녀의 사진을 묻고 온다. 결국 개인의 사생활이 숨겨질 수도 없고, 드러났다가는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삶에서 선우와 희서가 보인 타인을 향한 애도와 인간성은 결국 그들의 사회를 살아가는 중추적인 힘으로 발산한다. 악취가 그들을 괴롭히고, 사실과 무관한 무성한 소문들이 공포스럽게 그들을 옥죄어 오자 서로를 향한 원망이 들쑤시지만, 결국 문밖을 열고, 소문의 실체를 마주하고 곁에 있는 이와 손을 맞잡을 때, 연대의 힘으로 그들은 또다시 내일을 살아간다. 

많은 가구가 밀집되어 있는 아파트. 아파트의 종류로 인간사가 구분되고, 무서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렬된 모습으로 우리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결국 가장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는 거주 형태이자, 가장 가까이에 서로를 두고 있는 친밀도의 공간이다. 양가적인 속성이지만, 결국 우리 사회가 서로의 삶을 마냥 모른척할 수 없다는, 선우와 희사가 보낸 희망의 메세지로 느껴진다.  

 

 

〈딸에 대하여〉

 

대학 교수이자 성소수자인 딸, 그리고 요양 병원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엄마. 엄마는 자신의 생계도 내팽개쳐 버린 채, 동료의 부당해고 시위에 앞장서는 딸을 이해할 수 없다.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어느 날 집값 문제로, 딸과 그의 연인이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제도 안에서 가족임을 인정받을 수 없는 두 사람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딸의 연인에게만 비정한 태도를 보이던 엄마도 자신의 직장에서는 미련할 정도로 한 노인에게 집착하고 헌신한다. 무연고에 지나간 인연들조차 노인에게 무관심해지자 엄마는 그들에게 분노한다.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 인간사의 관계를 인정하는 제도는 법적으로 큰 효력을 가진다. 〈럭키, 아파트〉에서 어떤 이가 장례를 지내겠다고 고해도 결국 가족이 아닌 이상 그를 애도하는 권리를 가지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딸에 대하여〉 속에서도 가족으로 이어진 법적 관계가 아닌 이상, 서로를 향한 책임은 붕괴되기 일쑤며, 긴 여생을 함께 보낼 동반자를 찾기란 어렵다. 엄마는 동반자를 잃은 현재의 자신과, 거동도 하지 못한 채 보살필 가족이 부재한 할머니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함을 딸에게 물려 보내기 싫다. 평범한 가정과 평범한 삶. 자신의 살아온 삶 속에서 배운 것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 정형화된 성별만을 배운 엄마의 답이다. 

혐오와 차별 속에서, 성소수자들의 법적 권리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규칙 속에서 사회가 인정하지 않은 정체성을 안고 살기란 쉽지 않다. 선우가 고독사한 화분 할머니를 쉬이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결국 이들의 여생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쌓여간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공동체의 압박 속에서 공포를 느끼던 것과 달리 해결책도 결국, 그 안에서만 발견이 가능하다. 결국 서로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인간성도 미련하지만,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살피는 마음도 곁에 존재하는 타인에게서 얻는다. 비록 끝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만남에서도, 서로 곁에 서서 힘을 실어주는 결합과 연대가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