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공작새〉 인디토크 기록: 울지 말고 웃어
울지 말고 웃어
〈공작새〉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11월 2일(토) 오후 1시 상영 후
참석 변성빈 감독, 해준·고재현 배우
진행 모지민 아티스트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한들 님의 기록입니다.
슬펐다. 저렇게 웃기기까지 얼마나 슬펐을까를 생각하다가.
이것은 코미디언 문상훈을 향한 작가 이슬아의 말이다. 이 문장을 잊을 수가 없다. 잊고 싶지 않다. 슬픈 것과 웃긴 것이 닮은꼴임을 알아봐 주는 말, 사람에 대한 헌사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공작새〉에서 ‘저 이제 어떡해요.’ 흐느끼는 보석(고재현 님)에게 명(해준 님)이 이런 말을 돌려준다.
울지 말고 웃어.
명이라면 얼마나 충분히 가졌을까. 어떤 기쁨이 슬픔에 계속 쬐이다 끝내 빛바래는 장면을. 그 정도로 슬퍼 본 사람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웃음이 있을 것이다.
이슬아와 신명의 목소리를 오늘 이 현장에 빌려온다. 농담으로 무장한 아티스트 모지민과 그에게 흔쾌히 휘둘리고 맞불 놓고 코웃음 치는 변성빈 감독, 해준 배우, 고재현 배우 그리고 아낌없이 폭소를 터트리는 관객들을 위해서다. 함께 웃고 웃기는 일에 탁월하며 그렇게 되는 사이 홀로 우는 일에도 단련된 사람들에게, 그 두 문장을 주고 싶다.
모지민 아티스트(이하 모지민): 이 가을날에 영화 〈공작새〉를 보러 와주신 여러분, 감사드려요. 총 29개국 62개 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한 영화이죠. 2024년도에 꼭 봐야 할 단 하나의 영화가 있다면 이 작품일 것입니다. 〈공작새〉의 주역들 모시고 인디토크 시작합니다. 감독님부터 인사 말씀해 주시죠.
변성빈 감독(이하 변성빈): 안녕하세요. 〈공작새〉를 연출하고 각본 쓴 변성빈입니다. 반갑습니다.
해준 배우(이하 해준): 안녕하세요. 신명 역으로 출연한 해준입니다. 반갑습니다.
고재현 배우(이하 고재현): 안녕하세요. 저는 보석 역 맡은 고재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모지민: 영화 얘기를 하기에 앞서서 나누고 싶은 얘기가 한 가지 있는데요. 해준 배우님과 변 감독님의 인연에 관해서요. 두 분에게는 엄청난 역사가 있잖아요. 〈신의 딸은 춤을 춘다〉, 〈신의 아이들은 연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번 장편 〈공작새〉까지 두 분이 함께 해왔는데요. 해준의 그 무엇이 변 감독의 마음을 이다지도 사로잡아서 이 〈공작새〉라는 엄청난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삼게 하였는지 듣고 싶어요.
변성빈: 해준은 영화로 만난 친구가 아니라 영화 밖에서 살면서 만난 친구예요. 〈신의 딸은 춤을 춘다〉라는 단편 영화를 통해서 해준이 처음으로 연기를 했어요. 해준을 비롯하여 우겸 배우와 스태프들, 그러니까 그 영화에서 함께한 사람들끼리 사이가 좋았었거든요. 그래서 ‘장편 영화를 만들어보자’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공작새〉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물 흐르듯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해준에게는 뚜렷한 장점들이 있어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어도 그만의 에너지를 통해 〈공작새〉의 명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해준 배우와 함께함에 있어서 전혀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었어요.
모지민: 그렇군요. 해준 배우님은 정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왁킹 댄서이고, 변성빈 감독님은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이시죠. 두 사람이 만나서 역작 〈공작새〉를 만들어냈는데 무려 개봉하기까지가 3년 걸렸죠? 아, 3년의 시간…. 저 같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거 같은데, 해준 배우님은 3년 동안 어떠셨어요?
해준: 감독님을 많이 탓했죠. (관객들이 웃고) 3년 동안 개봉도 안 하고 뭘 하고 계시나.
모지민: (바통 받듯이) 내가 왜 이런 감독을 만났나?
해준: 그렇죠. 내가 그 11월 한 달 동안 추운 바닥에서 열심히 춤을 췄는데 왜 개봉을 못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사실은요. 이 영화가 그동안 정말 많은 영화제를 돌았거든요. 감독님이 3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니시면서 홍보하셨고, 이 영화가 관객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시간은 아니었고요. ‘우리 영화가 해외 분들한테도 많은 반응을 얻고 있구나.’ 그게 감사했었어요. 오히려 전 세계로 통하는 영화가 꼭 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생겼죠.
모지민: 그 염원, 비로소 10월 23일날 이루어졌군요. 그래서 지금 반응이 뜨겁죠?
해준: 음……. 따뜻해요.
모지민: (못 들은 척하고) 그리하여 이 영화가 곧 ‘백만 영화’가 될 것 같아요. 돼야죠. 스타 감독과 스타 배우들이 함께 했으니까요. 고재현 배우님은 이 영화 개봉에 대한 소감이 어떠실까요?
고재현: 3년 만에 염원이 이루어져서 저도 너무 기쁘고요. 개봉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꼭 개봉을 해야 되는 영화라서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조급함은 없었고요. 소감이라면 ‘아, 개봉하는구나. 기쁘다.’
모지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은 끝에 이렇게 개봉을 하게 되었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 얘기를 해볼 텐데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주요 장면들을 순서대로 톺아가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오프닝 씬은 콘테스트 장면이었죠. 이때 신명과 치타 심사 위원의 짧은 대화가 오가요. 2등에 머문 신명이 치타 심사 위원에게 ‘왜 나는 안 되냐’라고 묻고 ‘넌 너만의 색깔이 없어.’라는 답변을 돌려받아요. 그 대사를 듣자마자, 신명이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앞으로의 여정이 너무 험난할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씬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한편으로는 신명이 사지 찢어지도록 춤을 추는 그 장면에서 테이크를 여러 번 갔다면 정말 힘든 촬영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어떠셨어요?
해준: 왁킹 씬은 사실 그렇게 테이크가 많이 가지 않았어요. 제가 잘했나 봐요. (다 같이 웃고) 다시 찍더라도 NG는 아니었고, 좋으니까 여러 번 찍는 개념이었어요. ‘여기서 찍어봐야지, 저기서 찍어봐야지.’ 하면서 버전을 세이브했어요. 춤이 너무 길어지면 제가 힘드니까 감독님께서 배려를 해주신 것도 있고요. 오히려 다른 씬들에서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저한테는 오히려 다른 씬 중에 힘든 씬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자면, 대회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클럽 장면이요. 명이가 웃고 있는 줄 알았지만 가까이 가면 울고 있는 씬이었죠. 이런 씬은 호흡과 감정이 충분히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번 테이크를 갔었어요. 감독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었고 저도 최대한 그 지점까지 도달하고 싶었어요.
모지민: 이 작품이 엄청난 내면 연기를 요구하잖아요. 오프닝 씬에서도 명의 내면이 잘 표현되어야 했고요. 감독님께서는 그것을 위해서 어떤 점들을 신경 쓰셨어요?
변성빈: 독립예술영화 여건 상 제작비가 부족하니까 원래는 카메라를 한 대만 쓰거든요. 그런데 콘테스트 씬은 A캠 B캠 두 대를 같이 돌렸어요. 최대한 많은 테이크를 확보하기 위해 앵글을 바꿔가면서 촬영 소스를 만드는 데에 집중했어요. 해준 배우가 춤을 워낙 잘 추니까 NG가 날 일은 없었고 오히려 해준 배우가 요구해서 더 찍었던 기억이 나요.
해준 배우가 말한 타이틀 직전의 클럽 씬은 저한테도 되게 중요한 컷이었어요. 이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멀리서 봤을 때는 생각 없이 웃고 떠드는 것 같지만 그 인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굉장히 속상하게 울고 있고 마지막에는 그 울음 소리가 마치 공작새처럼 들리는 흐름이죠. 그 컷에서 어떤 것들을 제가 좀 집요하게 원했던 것 같아요. 해준 배우가 육체적으로 힘들어할 정도로 여러 번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모지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 이 영화에 저를 캐스팅하지 않았나요?
변성빈: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친분이 있었는데 본인은 영화 안 한다고….
모지민: 핑계 댈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필요하지 않았겠죠. 하다못해 지나가는 씬에라도 캐스팅했으면 영화가 훨씬 더 다채롭고 좋았을 것 같은데! 사실, 영화를 보면서 질투가 났다는 얘기예요. 저는 이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예산을 처들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좋았거든요.
변성빈: (크게 웃고) 아닙니다. 굉장히 적은 예산이었고요. 저는 방금 그 말씀이 너무 감사해요. 독립영화라고 하면 ‘주제성이 무겁고 어렵다’라고 접근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이 영화의 소재가 트랜스젠더인 만큼 서사와 연출에 있어서는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고 싶었어요. 메시지도 어렵지 않길 바랐고요. 그저 이 영화를 통해서 트랜스젠더의 얼굴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에게 명을 통해 그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대중적인 방식으로 연출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지민: (질투가 가시지 않은 듯) 짧게 듣고 싶었는데 답변이 너무 길어지네요. (관객들이 웃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가 볼게요. 신명이 중요한 대사를 내뱉는 장면, 상갓집 씬이죠. 신명이 까만 베일을 쓰고 까만 치마 셋업을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장례식장에 등장하는데요. 그 차림새를 본 고모부가 지랄염병을 하잖아요. (전혀 죄송하지 않은 투로) 죄송해요. 제가 입이 걸어가지고요. 그러자 신명이 고모부에게 ‘난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고 백번 천번을 말했잖아!!!’라고 고함 지르죠. 해준 배우님, 그때 고모부랑 ‘기갈’ 싸움을 했어야 했는데 (관객들이 폭소하고) 어땠어요? 이겼다고 생각하시나요?
해준: 이겼다고 생각해요. 고모부 배역을 맡으신 진수 선배님께서 에너지가 진짜 좋으세요. 에너지를 주시니까 저도 그걸 받아서 발산할 수 있었어요. 사실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그 씬을 염려했었어요. 감정표현을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발산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분출이 된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이룬 게 있었고요. 그래서 저한테 의미가 깊은 씬이기도 해요. 그 씬에는 비하인드도 있어요. 원래는 진수 선배님께서 저를 때리는 걸로 마무리가 돼야 했어요. 제가 선배님께는 실제로 때리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진수 선배님 손이 정말로 이만하시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진수 선배님이 ‘너 이걸로 맞으면 죽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때리는 척 맞는 척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모지민: 네.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서 해준 배우님이 지금 이 GV에 나올 수 있게 되었군요. 신명이 까만 베일을 쓰고 나오는데, 제가 너무 좋아하는 닐 조단 감독의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킬리언 머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장면에서의 신명, 너무 예뻤어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여자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장면, 감독님은 어떻게 다루셨어요?
변성빈: 그때 명이 입은 옷이 한국적이지 않아요. 명이 일종의 기갈을 부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 호창의 사람이 아니야. 호창의 냄새가 나한테는 남아있지 않아.’라는 표현이요. 명의 의상은 영화 전반에 걸쳐서 변화해 가요. 서울에 있을 때의 명은 블랙 아니면 누드 톤의 옷을 입어요. 호창에 가면서부터 컬러풀한 옷들을 입기 시작하고요. 명이 굉장히 페미닌하고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는 것은 명을 명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 호창 사람들에 대한 투쟁이라고 생각했어요. 강렬하고 화려했던 색은 명이 굿을 치고 나서부터 점점 옅어져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거죠. 외양의 변화를 통해서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런 일맥함 속 안에서 장례식장의 명의 헤어, 분장, 의상도 디자인됐었던 거예요.
그 장례식장 씬은 촬영 1, 2회차 정도에 찍었어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합을 맞춰가는 시기의 촬영이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콘티를 엄청 많이 바꾸면서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 와중에 만들어진 장면이네요.
모지민: 감독님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군요. 감독님께서는 〈공작새〉가 첫 장편 영화이시죠? 첫 장편을 이렇게 만들어낸 변성빈 감독님을 보면서 많은 감독님들이 긴장하고 질투의 도가니탕에 빠져있겠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다음에 또 이야기해 보고 싶은 장면은 트랜스젠더 무당이 등장하는 때예요. 여기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나와요. ‘피는 조상이요, 뼈는 아버지, 살은 어머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변성빈: 그 연기를 해주신 분이 실제 트랜스젠더 무당분이세요. 연기를 하시는 분은 아닌데 그 영화 속의 캐릭터처럼 살고 계시는 분이에요. 그 대사는 제가 쓴 것을 그 선생님께서 당신의 언어로 바꿔주신 거예요.
모지민: 저는 ‘감독님이 보기와 다르게 문학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오해였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호창에서 명이 머무는 덕길의 집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 집에 곶감이 주렁주렁 걸려있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연출하신 건지, 원래 걸려있던 것인지?
변성빈: 그 집을 섭외하기 위해서 로케이션 했을 때가 늦여름이었어요. 거기 사시는 선생님들께서 ‘우리가 가을에는 곶감을 널어둔다’며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 곶감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다른 씬에도 가져오게 됐어요. 서울 집에서 명이가 알바 자리를 구할 때 홍시를 먹는 장면이라든지, 장례식장의 나무 앞에서 명과 우기가 대화를 할 때 그 나무에 감이 달려있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감’이라는 소재를 시나리오 단계에서 쓴 건 아니었지만 그 요소가 너무 좋아서 미장센으로 넣으려고 했습니다.
모지민: 식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감이었죠. 명이 호창에 내려가면서 또 다른 주요 인물인 보석과 엮이게 되죠. 첫 대화는
전수관 건물 복도에서 이루어져요. 명과 마주친 보석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데요. 고재현 배우님, 그때 보석이 하려다가 만 말은 뭐였을까요?
고재현: 보석은 명을 장례식장에서 처음 다시 만나는데요. 보는 순간 자신과 명을 관통하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느꼈다고 생각했고요. 보석은 기대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명이한테 그 마음을 꺼내고 싶은데 아직 이 사람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기 때문에 주저하는 마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지민: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명과 보석이 마주치는 한편 같은 장소에서 한우기는 신명이 덕길의 추모굿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모부와 갈등했죠. ‘굿은 모두를 받아준다. 사람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요. 이후, 신명은 여러 사건과 부딪히며 ‘추모굿’을 향해 가요. 그 과정 안에서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신명이 자연 속에서 EDM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달리다가 춤을 추던 씬이 생각나네요. (장난기 어린) 해준 배우님, 그때 신명이 칼춤을 췄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왜 칼춤을 안 췄어요?
해준: 명이는 무속인이 아니고 농악인이니까요. 무속과 농악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칼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모지민: 맞아요. 그 농악의 가락과 EDM 음악이 어우러지는 그것이 신박한 조합이잖아요. 그때 EDM 음악에 맞춰 즉석에서 안무를 한 것인지 미리 틀을 짜두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해준: 현장에서 즉흥으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췄고요. 감독님과 합을 맞춰서 동선만 정하고 제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췄습니다.
모지민: 역시. 천재 소녀라서 안무 따위는 짜지 않고 모든 것은 즉석에서. 그것마저도 원테이크로 찍으셨나요?
해준: 두 번 찍었던 것 같아요.
모지민: 해준 배우가 춤을 워낙 알아서 잘하니까 감독님은 너무 편하셨겠어요? 감독님, 날로 드셨네요?
변성빈: (웃고) 이 영화는 댄스 씬들이 꽤 있다 보니까, 어떤 씬은 안무를 먼저 땄고 또 어떤 씬은 즉흥으로 찍었어요. 컷을 많이 나눠야 하는 씬 같은 경우는 안무를 먼저 땄고요. 해준 배우가 ‘현장에서 즉흥으로 할 때 그 매력을 더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얘기를 하는 씬에 대해서는 즉흥으로 하게 됐던 거죠. 제가 해준 배우를 워낙 믿기 때문에.
모지민: 그렇게 신명이 농악을 배우게 되는데요. 큰 나무 아래에서 신명과 여럿이 모여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인물의 의상과 자연의 색감이 어우러지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가 가을이었나요?
변성빈: 가을을 배경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어요. 10월에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촬영 여건 상 11월에 슛을 들어갔죠.
모지민: 영화가 개봉한 지금 이 시기가 자연이 색을 갈아입은 때잖아요. 그 색들이 너무 아름답고요. 〈공작새〉 안과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는 날이네요. 사실 오늘 저의 옷도 영화 속 농악인들의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서 맞춰 입고 온 것이에요.
이제 또 다른 인상적인 씬 얘기를 해볼게요. 저는 그 장면 정말 좋았거든요. 신명이 흐르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는 씬이요.
해준: 원래는 얼굴을 담그는 씬이 아니라 입수를 하는 씬이었어요. 명이 춤을 추면서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 들어가고, 관객들이 ‘죽었나봐!!!’하는 생각을 할 즈음에 다시 살아나듯이 물 밖으로 올라오는. 굿을 통해서 명의 결핍들이 씻겨나가고 순수한 인간성이 회복되면서 명이 새로 살아나게 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씬이에요. 그런데 그때가 11월 막바지쯤이고 너무 추웠거든요. 얼굴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로 엄청 추운 날씨였어요. 그리고 저의 몸이 많이 노쇠했을 때고요. 그래서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입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다행히 입수는 피했습니다.
모지민: 감독님, 왜 배우를 개고생시키려고 했어요?
변성빈: 본래는 이 영화가 10월 촬영으로 계획이 되어 있었고 사실 해준이가 잠깐 말했지만 그 씬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그 씬 전에 명이가 굿을 쳤고 굿을 침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고 또 그 변화를 통해서 명의 많은 것들이 바뀌는데요. 그걸 말이 아니라 춤으로 설명하고 싶었거든요. 명이 흐르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 과정은 일종의 ‘땀’을 씻어내는 여정이기도 하지만요. 명이 다시 생명을 얻는 걸 표현하는 씬이었거든요. 정말 잘 찍고 싶었어요. 너무 찍고 싶었던 씬이었는데 촬영이 한 달 미뤄지면서 현실적으로 입수가 불가능했죠. 그래서 지금의 버전으로 대체하게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찍었으면 정말 좋은 걸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모지민: 해준이 엄살을 부린 것 아닌가. 해준 배우님, 나 같으면 얼어 뒤지더라도 들어갔을 것 같은데요?
해준: 제가 그 전에 이미 한번 쓰러져서 응급실을 갔었던 상황이라서요. (모지민 아티스트가 급히 말을 줄이고) 사실 저도 아쉬워요. 그 씬을 잘 찍고 싶은 욕심이 저에게도 있었거든요. 나중에 이 비하인드를 들었을 때는, 감독님이 애초에 생각하신 버전으로 찍었더라면 되게 아름다웠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경이 되는 풍경이 좋잖아요.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살아서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와야 했기 때문에.
모지민: 그렇죠. 그 중요한 씬 이후에 또 다른 중요한 씬이 그려지는데요. 서낭당을 배경으로 고재현 배우님의 엄청난 배드씬이 그려져요. 저 너무 충격을 받아가지고요. 너무 질투가 나는 거예요. 고재현 배우님, 보석에게 이런 장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남성 배우로서 약간의 주저함이 있었을 것도 같은데요. 어떠셨어요?
고재현: 일단 저도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충격에 휩싸였었어요. 조금 부담스러웠죠. 그런데 그것보다는 대본 전체를 두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너무 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했어요. 보석의 그 씬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딱 마음먹고 하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저한테도 힘든 씬이었어요. 막상 촬영을 해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어렵고 힘들더라고요. 연기적인 것, 앵글적인 것 전부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동원되는 스태프들을 최소화해 주시는 배려를 해주셔서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어요. 감사했습니다.
모지민: 그 장면에서 보석이 남자친구에게 말하잖아요. ‘사랑해’라고. 뭘 안다고…. (관객들 웃고) 고재현 배우님, 사랑이 뭐예요?
고재현: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사랑이 뭘까.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죠. (다 같이 웃는다)
모지민: 제가 그 씬을 보면서, ‘아니 이것들이 뭘 안다고. 참나, 사랑?’
고재현: 그 상황 속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보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준: 제가 모어님께 여쭈고 싶네요. 오랜 사랑을 하셨잖아요.
모지민: 제가 그런 말을 책에 썼습니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포기이다. 제 남편은 평생 저한테 요리를 해준 적이 없어요. 제 복이죠, 뭐. 감독님, 사랑이 뭐예요?
변성빈: 사랑은… 복이다? (다 같이 웃는다)
모지민: 그 씬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보석과 남자친구 사이에 있었던 그 일을 명의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이 오인하는데요. 그때 명이 그 장소에 떨어트린 목걸이가 알리바이가 되잖아요. 그 목걸이를 활용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변성빈: 이 영화에서 ‘눈’이라는 소재를 중요한 상징으로써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주요 사건의 발화점으로 목걸이를 선택했어요. 그 목걸이가 명에게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눈의 상징을 왜 쓰고 싶었느냐면 저는 이 영화를 통해서 명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모지민: 그 사건에서부터 이어져서 보석이 커밍아웃을 하게 되죠. 그러고서 보석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명이 엄청난 말을 건네잖아요. ‘난 여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그냥 내 자신으로 살고 싶은 거다. 사람들은 여자 남자로만 나눈다. 무식한 사람들을 위해 여자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이 내용이 참 와닿았어요. 저도 그렇거든요. 한국 사람들이 특히 타이틀을 붙이잖아요. 남자냐, 여자냐. 어우! 그게 왜 지금 너한테 중요한데? 싶어요. 저는 이렇게 대답하거든요. ‘나는 인간이다. 너와 다른 색깔을 지녔을 뿐이다.’ 대체 왜 그게 궁금하고 명확하게 구분 지으려 하는지…. 이 지점에서 고재현 배우님의 의견이 듣고 싶어요. 고재현 배우님, 명과 보석의 그 장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재현: 영화 안에서 보석은 여러모로 해방되는 결과를 맞이하는데요. 그 대사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그 순간에서는 그 말이 보석에게 정답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보석이 그 후에 해방감도 얻고 잘 살 것 같은 여지를 남기는 연기를 했습니다.
모지민: 영화 바깥에서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고재현 배우가 헤테로 섹슈얼이라면, 이 사회에서 헤테로 섹슈얼로 산 사람으로서 저나 해준과 같은 사람과 어울려 사는 데에 있어서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는지 궁금해요.
고재현: 이 영화를 만들면서 해준이라는 친구를 통해서 ‘해준과 같은 사람’과 처음 어울리게 되었는데요. 저는 해준에 대해서 좋은 친구 그리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것 말고 다른 생각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모지민: 해준 배우님은 고재현 배우님과 같은 친구 필요하신가요?
해준: 너무 중요하죠. 왜냐하면 너무 평화롭잖아요. 다른 선입견이 없이. 모어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를 한 인간으로 대한다는 의미가 저한테는 커서요. 이런 친구와의 관계가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모지민: 감독님은 명과 보석이 겪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답답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평생 그런 말을 들어왔잖아요. ‘호모새끼, 어쩌구저쩌구.’ 그런 폭력 속에서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데요. 사실 이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지긋지긋하거든요.
변성빈: 그래서 그 대사를 썼습니다.
모지민: 그래서 그런 명대사가 나왔고 내 마음을 처울렸다!
해준: 위로가 되셨나요?
모지민: 너무 위로가 되었고요. 영화 포스터에도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그 장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대나무 숲속에서의 씬 얘기도 얼른 해보고 싶은데요. 거기서 신명이 윤선도의 시조를 읋죠.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감독님, 어찌하여 이 시를 인용하셨을까요?
변성빈: 제가 시를 좋아합니다. 늘 시를 읽고요.
모지민: …혹시 제 책은 사셨나요?
변성빈: 〈털 난 물고기 모어〉요? 물론이죠.
모지민: 어머!!!!! (변성빈 감독의 두 손을 꽉 잡으며) 우리 친하게 지낼까? (진정하고) 그런 시가 나옴으로써 장면의 분위기가 더 살아났어요. 그 씬에서 우기가 진실을 알게 되죠. 신명이 누명을 뒤집어썼음을. 다시금 추모굿을 하자고 우기가 신명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는 신명이 새 진실을 알게 되고요. 자신과 꼭 닮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한 신명은 하염없이 오열하는데요. 해준 배우님, 그때 어떠셨어요?
해준: 첫 진실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김우겸 배우가 눈으로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기 때문에 저도 그 감정을 받았어요. 덕분에 그 씬에서 감정을 올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요. 그런데 그 이후에 혼자 뛰면서 우는 장면은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숨이 많이 차는 와중에 계속 울어야 해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제 가슴안에는 응어리가 있었지만 그걸 바깥으로 꺼내 보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까요. 더 많이 찍고 더 좋은 씬을 만들기를 바랐는데 충분히 못 한 게 한스러워요.
변성빈: 그런데 그때 해준이 체력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해준은 제가 요구하는 만큼 해내는 사람인데 더 하다가는 큰일 날 수 있겠더라고요. ‘정도를 지켜야겠다, 뒤에 더 중요한 씬이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어요.
모지민: 감독이 배우를 아주 아끼고 사랑하시나 봐요.
해준: 맞아요. 제가 더 오열을 못 한 게 잘못이죠. (관객들이 웃는다)
모지민: 깊이 반성하세요. 변성빈 감독의 차기작을 또 하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 사지를 찢어발겨서라도 감정을 꺼내주실 수 있죠?
해준: 네, 기약하겠습니다. 기다릴게요.
모지민: 서낭당에서의 사건부터 시작해서 모든 지랄염병의 끝에 고모부가 신명에게 사과를 하는데요. 비로소 정신 차린 고모부를 보는 명의 마음, 어땠나요?
해준: ‘가족이구나’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고모부가 용서를 빌고 신명이 용서를 해준다는 느낌보다는 가족은 늘 싸우고 또 되게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기도 하잖아요. 가볍고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과를 받을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고모부가 명의 아빠인 덕길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그 점에서 명에게 복잡한 밤이 됐을 것 같아요.
모지민: 그렇게 해서 마침내 활활 타는 나무 앞에서 환복을 한 신명이 춤을 추며 영화가 완성되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스크린 양 끝으로 나전칠기 같은 띠가 함께 올라가잖아요. 그런 하나하나의 디자인까지 너무 예뻤어요. 모처럼 본 재미있고 아름다운 영화였네요. 마지막으로 감독님부터 한 말씀씩 하고 우리 인사할까요?
변성빈: 이렇게 영화 보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이 영화가 관객분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에게 오늘의 순간이 선물처럼 남기를 바랍니다. 남은 주말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거 드시면서 즐겁게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해준: 영화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친애하는 저의 모어님과 GV를 하게 돼서 감명이 깊은데 이렇게 웃으면서 GV 했던 게 오랜만이라서 너무 좋아요. 관객분들도 이 영화부터 GV까지 그냥 재미있게 즐기셨길 바라고 추억으로 남겨지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테 제일 중요한 의미예요. 돌아가시는 길 조심히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재현: 이렇게 함께 봐주시고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영화를 보면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데요. 저희 영화도 여러분에게 그런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다시 한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지민: 아름다운 가을날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