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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Review] 〈그녀에게〉: 사랑의 시선

indiespace_가람 2024. 9. 23. 16:09

〈그녀에게〉리뷰: 사랑의 시선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실재하는 현실로 이끌어내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유의 의지력을 통해 마치 당연한 인과인 것처럼 이끌어내는 사람이 있다. 신혼여행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아침을 맞이하며 자신의 커리어와 이상적인 가정에 대해 나열하는 ‘상연(김재화)’의 말엔 강한 확신이 있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이상적인 4인 가정을 만들고 정치부 부장을 지나 보도국 국장, 은퇴 이후에 갖게 될 마당이 있는 집까지. 마치 지나온 과거를 회고하듯 상연의 미래엔 한치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컷


 흐릿했던 언어의 잔상은 상연의 현실에서 곧바로 재현된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쌍둥이를 출산하고 처음 경험하는 육아와 함께 할 때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상연의 상상과 시간이 협업하듯 직장으로 복귀를 준비하던 그때, 예상치 못했던 어떤 가능성이 상연의 인생에 등장한다. 언어 발달이 또래에 비해 느렸던 둘째 ‘지우(빈주원)’가 그저 습득이 더딘 것이 아니라 지적장애 2급에 해당한다는 장애 진단 판단을 받는 순간, 그 사실은 상연의 현실과 미래에 어떤 분명한 균열이 찾아올 것을 예고한다. 


 장애에 상관 없이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그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발달과 독립성을 가르치는 동안 아이러니 하게도 상연 자체로서 독립적인 영역은 조금씩 줄어든다. 치료와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놀이 과정과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도 불확실한 성장의 가능성만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명확하고 확실하던 상연의 미래 역시 상상의 범위가 급격히 제한된다. 자신의 아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들에 당혹감과 초조함, 불안감은 대비할 수 있는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손 쓸 수 없는 지금 당장의 문제가 된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컷


〈그녀에게〉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케어하는 엄마와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을 다루는 이야기인 동시에 한 사람이 변화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여주는 아주 느린 성장담이다. 지우가 장애 판정을 받자 사이가 소원해진 대학 선배에게 무작정 연락해 눈물로 사실을 고백하던 날부터 마트에서 지우의 소동을 목격한 직장 후배가 자신의 아이 역시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내용을 전하는 연락을 받기까지, 상연은 지우와 함께 엄마로서 성장한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 받고 미움 받고, 때론 멀어지고 또 가까워지는 관계 속에서 일상적인 행복과 슬픔은 언제나 상연의 곁을 맴돌며 느슨한 연대의 체계를 마련한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컷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리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규칙이나 믿음이 있다. 하지만 사랑은 특수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얻어지는 달콤한 보상 같은 것만은 아니다. 상연은 한 인간을 향한 지극히 작업적이고 수고스러운 과정을 매번 수행하지만 그 과정은 누군가에겐 이미 잊혀진 특수성과 기초성을 동시에 수반하는 사랑의 형태이다. 세상엔 오히려 어떤 당위를 뛰어 넘을 때 가능해지는 사랑도 있다. 사랑이라는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상연은 계속 변화한다. 이때 사랑은 주체와 결합하여 그의 주변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행위의 능동자가 된다. 


 지우의 시선을 대신하여 바라보는 상연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 시끄럽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옹알이처럼 발화되는 그의 언어는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더라도 명백한 사랑의 언어처럼 들린다. 사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시간을 그저 소유하는 그녀에게 역시 충분한 사랑과 시선이 머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