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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Hot Issue & About Movie

by Banglee 2009. 7. 21.


About Movie


8월 15일, 잔혹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기묘한 축제의 공간 ‘야스쿠니 신사’를 바라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하여 철저하게 기록해보고자 했던 리잉 감독은 1989년부터 유학생활을 하면서 중국에서는 알지 못했던 일본인의 역사의식, 야스쿠니에 대한 사고 방식에 충격을 받고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후유증에 사로잡힌 야스쿠니 신사를 10년간 철저하게 추적하여 기록한 영화 <야스쿠니>. 영화는 구체적으로 일본문화정신을 상징하는 ‘국화와 칼’, 두 개의 부호를 탐구하며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보루’인 야스쿠니 신사와 신사를 찾는 각종 인물들을 관찰하여 스크린에 담았다. 그리고 현재 일본의 역사와 동아시아인,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패전까지 야스쿠니 신사 경내의 단련회에서 ‘야스쿠니도’를 제작하고 있는 현역 최고의 칼 장인 가리아 나오하루와 다양한 인물들의 전쟁후유증에 대한 행동반응을 다각도로 투시한다. 감독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잔혹함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융합되어있는지를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또한 영화 안에서 격론하는 것을 피하고, 취재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다양한 결론의 창을 열어준다.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합작 다큐멘터리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최초의 심도 깊은 고찰!

<야스쿠니>는 1887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완성된 한중일 세 나라의 합작 다큐멘터리. 제작단계에서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리잉 감독은 일본문부과학성 관할의 ‘일본예술문화진흥기금회’에 지원을 신청, 결국 그 기금회로부터 750만엔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완성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다큐멘터리네트워크’ 기금의 조성작품으로 뽑혔으며 한중일 3개국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영화 <야스쿠니>는 야스쿠니 신사의 갈등과 모순에 초점을 맞춰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그곳을 둘러싼 정서를 묘사함으로써 배경에 깔린 역사적인 의미를 묻고 있다.



Hot Issue

32회 홍콩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수상의 화제작!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리잉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야스쿠니>는 2008년 3월에 개최된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전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영화 <야스쿠니>에 대하여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용기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심도 있는 분석을 한 영화’라고 극찬하며 리잉 감독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또한 선댄스국제영화제, 요코하마국제영화제 등의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은 물론 리잉 감독의 독특한 시각은 많은 이들로부터 큰 갈채를 이끌어냈다.



충격 다큐멘터리 영화 <야스쿠니> 일본 상영!
상영금지 및 삭제 압력 논란! 그리고 일본 흥행돌풍!

2008년 2월에 개최된 베를린국제영화제와 32회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파란을 일으킨 문제의 화제작 <야스쿠니>. 지난 10년간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의 야스쿠니 신사의 풍경을 담아낸 이 작품은 일본에서 우익세력의 의해 정치적으로 이슈화되어 반일영화로 낙인 되어 상영중지의 위험에 처했었다. 또한 여당 의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삭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끝없는 파문으로 일본 영화계의 큰 파장을 일으켰던 영화 <야스쿠니>는 마침내 2008년 5월 3일 일본에서 개봉, 개봉 첫 날부터 3일간 매진 행렬을 달성하며, 전국으로 확대 개봉, 대성황을 이루며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Historical background to the yasukuni shrine                                                          

신사는 1869년에 도쿄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라고 새로 이름이 붙여졌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천황과 내전에서 죽은 사람들과 일본 평화를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한 사람들을 숭배하고 애도하기 위해 세워졌다. (야스쿠니는 평화로운 나라를 의미한다.)


서남전쟁과 같은 국내갈등,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만주사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천황을 위해 죽은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과 출신, 그리고 죽은 날짜와 장소가 새겨진 기록과 함께 모두 사당에 모셔졌다.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큰 정치적 논쟁은 1978년 이후부터 되어왔다. A급 전범이 야스쿠니에 안치된 250만 명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5년 이래로 행해진 몇몇 일본 총리의 신사 방문은 헌법상의 정교분리와 관련,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과거 일본 제국주의 지배하에 고통 받아온 아시아 나라의 몇몇 사람들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국수주의의 상징이었고, 또한 총리의 방문과 같은 일본 정치가들의 방문은 그들이 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게끔 보였다.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전범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는 신사의 거부 때문에 실패했다. 야스쿠니는 어떠한 기념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안치 명단과 기병도에 집중한다. 2,400,400 이상의 전몰자들의 영령이 기병도에 깃들어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밀스런 장소에 안치되어, 야스쿠니 신사의 높은 관계자들도 함부로 볼 수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는 명단에서 조상이나 가족의 이름을 제거해주길 요청한 사람들 중 아무도 신사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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