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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 프로덕션 노트!

by Banglee 2008. 10. 29.


     Production Note_01                                                                  


잊을 수 없던 소록도의 풍경,

임신 중이었던 감독과 이행심 할머니와의 운명적 만남
출산 후까지 이어진 3년에 걸친 기록

2002년 여름, 단순히 여행을 위해 찾았던 소록도는 감독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기게 된다. 아름다운 바다와 나무들에 감탄하기도 잠시, 부스스한 흰머리를 하고 꼬부라진 허리를 구부려 앉아 빨래를 하시던 어느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쩐지 처연하다 생각될 무렵, 그녀의 손가락 없는 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뭉뚱그려진 손의 충격, 그렇게 접하게 된 소록도의 아픈 역사...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할머니의 작은 뒷모습을 잊을 수 없던 박정숙 감독은 2004년 3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카메라를 든 채 소록도를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소록도에서 짐이 무거우니 차를 태워주겠다던 친절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이행심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그야말로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아직 다큐의 주인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시절, 할머니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참을 울던 박정숙 감독의 마음 속에, 그리고 뱃속에 있던 아이에게, 또 그녀의 부른 배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던 이행심 할머니의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흘러갔고 그들은 그렇게 '교감‘하기 시작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갖고 있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도 카메라를 들기엔 충분했다.

할머니의 역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록도, 한센인 전체의 역사로 확대되어 갔고 ‘여태껏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느낀 감독의 끈질긴 촬영은 아이를 낳은 후까지 계속되었다.

 


     Production Note_02                                                                    


숨어사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할머니와 소록도 식구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할머니와 감독이 마음으로 공감했다고 해서 촬영이 일사천리로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소록도 주민들은 자신들을 촬영하는 카메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촬영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소록도와 주민들의 역사가 세상에 알려져야 하는 이유를 설득 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감독,

그녀의 호칭은 “애기엄마~”

서울에서 소록도는 꽤나 먼 거리지만, 만삭의 몸을 한 감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서울과 소록도를 오갔다. 촬영도 촬영이었지만 어느새 가족처럼 정이 들어버린 할머니와의 만남이 소중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임신 7개월에 이루어진 만남은 그 아이를 낳은 후로까지 이어졌고 박정숙 감독의 출산은 소록도 안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이자 동시에 신나는 잔치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이제 아이도 낳았겠다, 더욱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고자 다짐을 한 감독을 소록도 할머니들이 타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은 애를 키우는 것”이라며, “혼자 있을 아이가 얼마나 엄마를 찾겠냐”며 아이를 두고 홀로 소록도를 찾은 감독을 서울로 쫓아보내려까지 하셨던 것. 할머니들의 그런 반응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자리한 그녀들의 아이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알기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던 감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코 끝이 시큰해지는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고.
덧붙여, ‘감독’이 뭐하는 사람인지, ‘카메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저 ‘임신한 여자’로 기억되던 박정숙 감독의 섬 안에서의 호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욱 ‘애기엄마~’라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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