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보이즈한줄 관람평


송희원 | 현실은 기(승전)결, 우리만 아는 승전

이현재 | 타인의 진지를 비웃지 마라

이지윤 | 허기가 도는 세상, 빛나는 꿈

최지원 |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김은정 | 온 몸으로 흔들기






 <델타 보이즈> 리뷰: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델타 보이즈>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톤으로 네 남자의 대책 없는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분명 남성 사중창 콘테스트에 도전하는 이야기임에도 ‘도전 해볼까’로 시작해서 ‘제대로 해보자’로 넘어가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대로 노래를 연습하는 과정은 영화 후반부에야 등장한다. 심지어 이렇다 할 배경음악도 없다.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도전을 해내고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마음먹는 과정이 얼마나 지지부진한지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때문에 (공연을 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공연 전 마지막 연습 이후의 이야기는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의 박수소리만 사운드로 삽입될 뿐이다. 도전의 시작, 노력하는 과정, 결말이라는 순차적 구조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의 고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네 남자는 생각보다 능력이 없어서, 이미 여러 번 실패해서,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아서, 아내가 반대해서 등의 이유로 영화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짜증이 치미는 현실에 그들은 고함치고 주정부리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인물들의 공통적 ‘대책 없음’은 <델타 보이즈>의 단점이기도 하며 원동력이기도 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인물들이 굳이 도전을 계속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장사를 뒤로 한 채,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닌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하고 있던 생선가게와 공장을 그만두고 (잘 하지도 못하는) 사중창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자학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흘러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즉 영화는 어떤 도전을 할 때, 확신을 가지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한심해하고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획득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신화적으로 꾸며진 모험담, 꿈의 도전기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후반부에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 노래한다는 ‘대용’의 대사가 있는데, 이를 들은 ‘일록’은 더 큰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의 모험담에서는 대용의 희망찬 대사가 그 자체로 희망적인 것으로 읽히겠지만 <델타 보이즈>에서는 대책 없는 해맑음으로 읽힌다. 게다가 일록의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공들인 탑이 완성되기 직전에 무너지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희망적인 대용의 말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책 없음’은 분명 영화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다. 성인 남성 넷이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해서 고함을 지르고 현실적인 고민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노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장면들이 일으키는 반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인물의 강력한 캐릭터성과 무식한 고군분투는 독특하고 생생한 활기를 띠게 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주인공들의 지친 모습, 미성숙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희망적 메시지까지 담아내고 있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솔직하고 단순한 이 중창단 도전기는 어쩌면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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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한줄 관람평


송희원 | 먼 이국땅에서 펼쳐지는 여성들의 강인한 삶과 노래

이현재 | 잊혀진 꿈의 악보

박영농 | 고려(빼어날 고, 아름다울 려)의 아리랑

최지원 | 가락으로 전해지는 한의 정서와 감동

김은정 | 역사 한 켠, 여전히 노래하는 고려인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리뷰: 잊혀진 꿈의 악보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사진 하나가 투사된다. 오래된 사진을 처음 본 관객은 그 사진이 전달하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정지된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흘러 나와 그 사진에 대한 정보를 추측가능하게 만든다. 내레이션은 한국에서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쫒긴 그들의 기구한 기원을 짧게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되면 카메라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걷는다. 다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고통스러운 이주를 전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고려인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당도한다. 다시 내레이션은 그들이 처음 연해주에 도착하여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움집을 파고 살았던 시절을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 될 즈음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념비 위에 무희로 보이는 여인의 사진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제야 내레이션은 영화가 다루게 될 대상이 고려극장,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누구인지를 서술한다. 이상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이하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이다.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은 정해진 대상을 다루려고 하는 다큐멘터리로서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정보를 전달하는 쪽은 이미지를 돕고 있는 내레이션에 가깝다. 그렇다고 내레이션이 이미지들을 정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프닝임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내레이션은 선형적인 시간을 따라가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전달하는 정보의 시간대는 고려인의 기원이 된 러시아의 황망한 땅에서 고려인이 겪었던 이주의 시간으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황망한 땅으로 돌아간다. 회귀한 곳에서 내레이션의 서사는 다시 고려인들의 본격적인 삶의 터전이 된 중앙아시아로 비약한다. 정리되지 않은 내레이션은 이미지들을 한 곳에 묶지 않고, 묶이지 못한 이미지들은 벌어진 사태나 인물의 초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시퀀스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영화는 고려극장의 공연 장면이나 이함덕과 방 타마라의 노랫소리 혹은 풍경과 자료가 오버랩 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 열리고 닫힐 때 제시되는 사운드나 이미지가 시퀀스에 제시된 형상을 정리하거나 정보들을 좌표에 지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고려인들에 대한 김소영 감독의 시선이나 고려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접고 펼치는 기능을 한다. 이 기능이 형성하는 것은 고려인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떠돌고 이산되어야 했던, 그들이 걸어온 궤적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정돈하고, 나아가 고려인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일종의 거울이 된다. 영화는 정보를 좌표로 지정하지 않는 대신 유동적으로 조응시켜 그들이 왜 한국이 아닌 연해주를 그리워했는지, 어딘가에 정착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인지, 그들의 노래가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복원한다. 이 리듬으로 인해 영화는 고려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적 아카이브라기보다는 고려극단의 노래를 기준으로 정보를 정리한 일종의 악보와도 같다.





여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사명이라면, 흘러나오는 영화는 과연 지금 시점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제시되고 있는 ‘악보’는 적절한 재현인가? 이는 결국 복원의 기준은 왜 리듬이어야 했는지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이 영화가 악보였어야만 하는 이유를 언뜻 찾을 수는 있다. 영화의 초반, 방 타마라가 (우리가 보았던) 고려극장의 공연영상을 보고 난 뒤 “나는 이 영상을 처음 봐요. 제 젊은 시절을 되돌려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영상의 주인공을 본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시간이 중첩되는 순간을 관람을 통해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다분히 체험적인 순간이지만, 방 타마라 본인에겐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받는 회귀의 시간이다.


이러한 회귀는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에 나오는 이함덕의 모습이 투사되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하게 형상화된다. 보는 이는 없지만, 투사되는 영상은 그 곳에 한 때 희망을 품고 왔던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제의이다. 이 제의는 잃어버린 역사를 마주한 이가 그것에 시선을 던지는 가장 적합한 태도이다. <고려 아리랑>은 자신만의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헤르메스가 되고 있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오버랩 된 영상과 자료들은 장소들을 움직이고 교통하게 만들고 중첩시키는 수행자로서 작동한다. 고려인이라는 망명자를 찾아 떠난 카메라는 그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영원히 떠돌 뿐이다. 이 떠돎의 상태는 고려인들이 처한, 그리고 처했던 ‘현실’과의 결연이며 이 현실은 본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자 최종적인 지향점이다. 결국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리듬만을 남겨놓아 자료를 ‘떠돌 수 있게’ 만든 것은 본 다큐멘터리가 수행하는 수사의 기반이자 윤리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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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제인한줄 관람평


송희원 | 비관과 희망의 뉴월드

이현재 | 구교환의 '제인'은 올해의 캐릭터

박영농 | 제인입니다

이지윤 |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여기, 뉴월드에서.

최지원 | 시시하고 불행한, 거짓말과 꿈이 덧칠되는 삶

김은정 | 불행과 함께 살기






 <꿈의 제인> 리뷰: 불행과 함께 살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소현은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배워본 적도 없고 아무도 알려줄 생각을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항상 함께 모여 있다. 즐거워 보인다. 소현만 빼고. 아주 처음, 그 시작에 놓여있었을 때, 모든 것은 신비롭고 자극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불행과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불행이라는 자극에는 쉽사리 익숙해 질 수가 없다. 그것은 비슷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비틀어 예상치 못한 곳을 아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이라는 것은 일견 다르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에 환호하게 된다. 불행에 더 예민한 방식으로 설계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비슷한 정도의 행복과 불행이라는 자극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행복에 익숙해져버려 더 이상 이것이 가져다주는 자극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불행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해 또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설령 비슷한 정도의 불행과 행복이 우리에게 닥친다하더라도 다르게 반응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비약하여 연민을 얻고자하는 오묘한 심리를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이는 일견 불가피해보이는 인간의 특성인 것이다.  





소현은 굉장히 소모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 말인 즉 주변의 인물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소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의 인물들이 자신을 떠나가게 만든다. 소현을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정호도 말없이 떠나고, 소현에게 다가왔던 지수도 떠나고 만다. 심지어 꿈의 제인마저도. 그러나 소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제3자로서 소현에게 공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극 속 인물의 입장으로서 그에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은 경멸스러웠고 언뜻 순진해보이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들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범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 속에 섞이고 싶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눈물을 보이는 것도 자신이 또 다시 실패하고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말았다는 실망감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다. 소현이 그렇게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외톨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과 그가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느껴질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은 어느 것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헤어날 수 없는 딜레마와 같은 것이다.





소현은 꿈을 꾼다. 끔찍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함인지 현실의 사건들을 조금씩 비틀어버린다. 그 곳에서 제인은 새로운 ‘가출팸’의 엄마로, 지수, 쫑구, 대포는 그의 식구들로, 바에서 일하는 주희는 쉼터의 자원봉사자로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소현이 받아들일 수 있고 소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소현은 정호와 헤어진 모텔로 찾아가 자살시도를 한다. 소현은 말한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그 때 제인이 그 방으로 들어온다. 그런 존재가 제인이다. 현실에서도 제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소현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슬픈 눈빛을 마주쳤을 때, 소현에게 말했다.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야.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학생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부모의 그늘 아래서 고민 같지도 않은 것들을 고민하며 산다. 학생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존재에게 부모가 없다면, 그 그늘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추락할까?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만다. 어떤 단어에 따라오는 보편적인 이미지. 그것이 마치 세계의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듯한 거대한 착각. 그러나 가끔씩 우리에게 이렇게 일러주는 메시지가 없다면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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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입니다한줄 관람평


송희원 | 사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시민들의 이야기

이현재 | 노무현을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가끔, 딱 그리운 만큼 그가 무서워질 때가 있는 것이다.

박영농 | 꿈의 무현

이지윤 | 그저, 노무현입니다

최지원 | 한 사람을 기억하는 예의

김은정 |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 실로 놀랍다.







 <노무현입니다> 리뷰: 안녕하세요, 제가 노무현입니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그리움’이란 상실한 대상에게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수많은 저작물과 연달아 흥행하는 영화를 보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는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100만을 돌파할 만큼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다룬 영화는 이미 몇 편 나왔다. 그가 변호를 맡은 1980년대 부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2013)과 2000년 부산과 2016년 여수에서 각각 출마해 낙선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 백무현 후보의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2016)가 대표적이다. 이 두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노무현입니다>에서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던 노무현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영화는 2002년 2월에서 5월까지의 민주당 경선의 여정을 되짚는다. 노무현은 2000년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타파, 동서화합을 이루겠다며 부산 북·강서을로 내려가 낙선한다. 대의를 위해 당선 가능성이 낮은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한 그를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부르며 응원했고 결국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노무현은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200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쟁쟁한 후보들 곁에서 지지율 2%로 꼴찌였던 노무현은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제 방식을 통해 대선주자가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상 깊은 연설과 자발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돕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는 노무현의 명연설 장면들과 그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경선 당시의 역전극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다. 





<노무현입니다>는 크게 ‘노무현은’, ‘노무현과’, ‘노무현의’, ‘노무현을’이라는 제목이 붙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장마다 영화를 상당수 채우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일대일 인터뷰다. 인터뷰이는 총 39명으로 이화춘 전 정보국 요원과 노수현 전 운전기사, 유시민 작가, 안희정 충남도지사, 문재인 대통령, 노사모 회원들이 등장한다. 가까이서든 먼발치에서든 그를 지켜봤던 사람들은 사적인 일화들을 들려주며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증언한다. 인권변호사 시절 자신을 감시한 정보국 요원과도 친구가 된 일화와 운전기사의 결혼식 날 차를 대신 운전해준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영화는 이러한 다양한 증언들을 들려주며 ‘노무현은’, ‘노무현과’ 같은 미완의 문장을 관객 각자 스스로가 완성해 갈 수 있게끔 유도한다. 장의 제목은 관객에게 일종의 열린 형식의 질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추억을 환기하고 그리움에 사로잡힌 상황만을 전개하지 않는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습도 배치한다. 감독은 그들의 성숙한 참여의식을 보여주며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노무현’이라고 말한다. 보수 언론의 색깔론, 지역주의 프레임을 정면 돌파하며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도와주십시오”를 단호하고 힘 있게 외쳤던 노무현. 계파도, 당내지지 기반 세력도 없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대선 후보로 만들어낸 시민들 모두 ‘노무현’이다. <노무현입니다>은 노무현과 시민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를 복기하는 수많은 영상물과 자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왜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쉬이 보내주지 못할까. 그 이유를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대신하고자 한다. "떠나보내려고 해서 떠나보내지는 게 아니다. 떠나보낼 때가 되면 저절로 떠나가는 거다. 노무현에 대한 애도가 마감되는 건 사회가 바로 잡혀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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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 투게더한줄 관람평

송희원 | 흩어져 악몽을 꾸던 이들, 함께 모여 꿈을 꾸다

이현재 | 간혹 서늘한, 갑자기 함께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차가운 위로

박영농 | 힘들다

이지윤 | ‘헬조선’에서 해피엔딩을 꿈꾸다

최지원 | 폭력이 파도치는 삶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위안

김은정 | "조금, 조금만 더" 어쩌면 거짓말일지 모를



 <컴, 투게더> 리뷰: [주의] 외면하지 말 것!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너’답게 살아봐!

두 번째 입시에도 실패한 ‘한나’는 자기 방식대로 삶을 꾸려가는 ‘유경’을 동경하며 ‘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음을 밝히며 유경은 한나에게 덧붙인다. “이왕이면 너답게 살아봐”. 한나는 감동한다.


아프리카가 날 기다린다!

한나는 집을 나서는 유경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실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아프리카가 자신을 기다린다며 택시에 짐을 싣는 유경. 먼 길을 떠나는 자신을 곁에서 배웅하는 한나를 바라보다 유경은 입을 맞춘다. 한나는 결심한다.



<컴, 투게더>는 한 가정 속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한 ‘범구’는 좌절감에 시달리던 중 같은 아파트 주민인 ‘호준’과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범구는 곧 호준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깨닫고 우정을 나누지만 미묘한 여운을 남기던 호준은 이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범구는 비애를 느끼며 안마방에서 난동을 부리다 경찰서 신세를 진다. ‘미영’은 카드 회사에서 일한다. 줄곧 실적이 높아 사내 평판이 좋았지만 경쟁자 ‘은정’의 약진에 영업 실적 2위로 전락하고 만다. 그 내막에 은정과 영업소장의 내연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미영은 퇴근 후 그들이 탄 차량을 뒤쫓는다. 미행을 따돌리려다 은정과 소장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미영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마침내 미영은 다시 영업 실적 1위로 올라서게 되지만 그는 사직을 결심한다. 재수생 한나는 이번에도 명문대 입시에 아깝게 실패한다. 예비 번호를 받고 추가 합격을 기다리지만 입학을 포기하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한나는 합격자인 양 거짓말을 하고 다른 합격자 ‘아영’과의 만남을 갖는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한나와 아영은 남자들과 합석하게 되고 만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영은 나쁜 꿍꿍이가 있던 남자에게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한다. 외면하려던 한나는 다시 찾아가 아영을 구하지만 끝내 바래다주지는 않는다.



각자가 처한 감당하기 힘든 현실 탓에 끝임 없이 삐걱대던 이 가정은 한바탕 사건을 겪고 나서야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범구는 미영에게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좀 쉬라며 다독이고 미영은 그런 범구에게 이번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결국 추가 합격이 된 한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한다. 명문대 진학을 다그치던 범구와 미영은 그런 한나의 결심을 응원하기에 이른다. 정리해고와 실적경쟁, 입시경쟁의 현실에서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유경의 조언처럼 ‘나답게 살기’로 일단락 지어지는 듯하다. 극을 이끌어가는 세 인물의 갈등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문제의식을 분명히 느끼고 있지만 부조리한 현실구조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비교 가능한 다른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가 아닌 타인을 향한 시선은 현실에 대한 주체적 개입을 불가능하게 한다.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내재된 갈등을 사적 복수의 차원에서만 다룬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나답기 살기’의 전략으로 당면한 사회를 외면 혹은 도피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 한들 이전의 부조리를 다시 마주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때도 그들은 ‘나답게 살기’의 전략으로 일관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졸업>(마이크 니콜스, 1967)의 마지막과 대비된다. 범구, 미영, 한나는 가족의 정을 다지며 오랜만에 나선 나들이에서 소나기를 피하려다 진흙탕에 구른다. 그마저도 즐겁게 웃어넘기고, 한데 엉켜 누워버린 이들을 카메라는 버드 아이 뷰로 비춘다. 청년 혹은 미래세대를 대표하는 한나의 미소를 클로즈업하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래세대에 대한 희망을 담아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한나와 같은 세대인 나는 그 장면이 전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 <졸업>의 그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세대인 유경은 영화의 후반부에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런 그를 동경하며 결심을 굳히는 한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나름 세운 계획이 있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한나의 앞날이 아직은 생기 넘치는 세렝게티처럼 설정되어있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것임을 현실의 한나들은 이미 감지하고 있다. 입시경쟁의 과거와는 전혀 상관없는 미래로 향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부조리는 그를 실적경쟁(미영)과 정리해고(범구)라는 다음단계로 안내할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유경의 말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너답게 살아봐!”는 “딴 데 가서 알아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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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플랜한줄 관람평

송희원 | 합리적 의심으로 선거의 투명성을 요구한다

이현재 | 음모론이든 증명이든 일단 썰이 재미있다. 그래서 듣고 싶어진다.

이지윤 | 플랜의 존재, 그 이전에 보장 받아야 할 우리의 개표권

최지원 | 흥미로운 동시에 서늘한

김은정 | 1:1.5 황금비율



 <더 플랜> 리뷰: 합리적 의심과 투표 이전의 개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약 3,000만 명의 투표지를 담은 13,500여 개 투표소의 투표함들은 251개의 개표소로 이동된다. 이동된 투표함은 개표소에서 개봉된 후 1,300여대의 전자 개표기에 의해 분류된다. 오후 9시 4분, 기호 1번이었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된다. 개표가 완료될 때까지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제치고 박근혜 후보는 한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약 4년이 흐른 2017년 4월, <더 플랜>은 다시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12년 12월로 시간을 되감는다.



18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과정을 둘러싼 의혹은 적지 않다. 대선을 며칠 앞두고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졌으며 대선 이후엔 무효표 분류와 연관된 부정선거 의심 정황을 주장하는 글과 사진이 온라인을 떠돌기 시작했다. ‘부정선거’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에서 여러 차례 눈에 띄기도 했다. 이러한 18대 대선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 사이에서 <더 플랜>은 전자 개표기가 토해낸 3.6%라는 높은 비율의 미분류표에 주목한다. 그리고 전자 개표기가 분류한 미분류표 중 박근혜 후보가 얼마나 더 많은 표를 가져갔는지를 설명하는 K값 1.5와 그것이 전국 251개의 모든 개표소에서 같은 패턴을 가지고 등장했음을 증명하며 새로운 의심을 탄생시킨다.


미스터리 추적 형식을 띤 다큐멘터리 <더 플랜>은 의도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팩트 체크에 포커스를 둔다. 증명이 어려운 누군가의 기억이나 의견이 아닌 선거관리위원회의 문서와 통계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의심에 대한 합리성을 갖춰나간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와 국내외 컴퓨터 전문가, 통계학 전문가, 해커의 말들이다. 그들의 말은 사견이 아닌 사실과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말하는 인물들을 다각도에서 담아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말하는 인물들이 마치 한 공간에서 반박하고 동의하고 말에 말을 덧붙이는 듯한 연출을 취한다.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그래픽은 어렵게 느껴지는 전문가의 말을 관객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더 플랜>은 18대 대선의 무효와 법적 수사를 촉구하기보다는 다가올 ‘앞으로’를 이야기한다. 전자 개표기가 해킹과 개표 조작 프로그램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드러내며 새로운 개표 방안 모색을 주장하고 개표 시스템에 있어 필요한 것이 철통보안이 아닌 투명성임을 강조한다. 국민이 지닌 투표권에는 개표권 또한 당연히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절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작품이 개봉되기 하루 전인 19일,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선관위는 19대 대선이 종료된 이후 <더 플랜> 제작팀의 요구가 있다면 조작 여부 검증에 필요한 범위에서 제 3기관을 통해 공개 검증에 응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이 요구한 개표의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다. 동시에 선관위는 ‘어떤 조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의혹을 제기한 분들은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기를 기대함’이라는 협박의 어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어째서 문제시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플랜>이 그저 불온하고 과장된 음모론을 그려내고 있다는 의견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의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믿기 힘든 수많은 사건들이 사회를 흔들었고 그런 배경에서 터져 나오는 의심들은 과장이라 치부될 수 없다. 의심이 필요한 시대에서의 의심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히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설사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유세로 길거리가 떠들썩하고 투표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곧 투표 독려 캠페인과 영상이 주변을 가득 채울 것이다. 쏟아질 ‘투표하세요’라는 외침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더 플랜>이 드러내는 개표의 투명성 보장과 그것을 가능케 할 합리적 의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플랜의 유무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투명하고 공정한 개표를 약속받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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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벚꽃한줄 관람평

송희원 | 뮤지션 장범준, 그의 다음 음악을 앵콜 

이현재 | 모든 불행은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불행하지만, 행복은 모두 비슷하다

박영농 | 곧, 더워짐

이지윤 | 벚꽃 연금 수혜자의 본격 봄맞이 귀호강 영화

최지원 | 봄의 마음으로

김은정 | 장범준, 그라는 벚꽃이 피기까지




 <다시, 벚꽃> 리뷰: 봄의 마음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어떤 계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연상되는 노래를 부른다는 건 가수에게 어떤 의미일까.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은 발매된 이후 매해 이례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입춘이 아니라 ‘벚꽃 엔딩’이 음원 차트에 진입하는 때를 봄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동시에 이런 현상을 두고 ‘벚꽃 연금’, ‘벚꽃 좀비’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일종의 밈화 현상은 아마도 버스커 버스커의 활동 중단 이후, 솔로 1집 앨범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장범준의 행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 벚꽃>은 장범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들려준다. 처음 버스킹을 시작했던 캠퍼스를 걸으며 이 노래는 벚나무 아래에서, 저 노래는 전 애인이 살았던 골목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동시에 배경으로 그의 음악을 재생한다. 장범준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장면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버스커 버스커의 장범준이 현재의 장범준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그려진다. 성적이 부진했던 솔로 1집 이후 장범준이 택한 것은 ‘더 많은 고민’이었다. 어떤 가수가 되어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야 할지, 계이름을 모르는 자신이 다른 뮤지션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그는 영화 내내 스스로에게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며 서슴없이 흔들린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는다. 자신의 가능성은 채찍질하고 방향성은 신뢰하면서 착실히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실제로 20대 청춘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식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동세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단지 아쉬운 점은 영화가 장범준의 노력, 음악에의 애정을 솔로 2집의 성공으로 연결시키고 결국엔 희망찬 마무리를 보여주는 것이 크게 놀랍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시간들이 거짓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서사가 으레 그렇듯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진부한 열정 드라마로 비춰질 가능성도 있으며 현재 청년세대가 공유하는 실제적 문제를 희석시킬 여지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벚꽃>은 관객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문제를 모른 체하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봄이라는 계절감과 특유의 감성, 백 그라운드에 깔리는 장범준의 노래가 더해져 탄생한 매력은 영화의 단점을 금세 가려준다. 그러니까, 봄이라는 계절이 이렇게 또 장범준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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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해변에서 혼자한줄 관람평

송희원 | 나답게 살려면 솔직해져야 해

이현재 | 나에게도 당신을 아파할 여유가 있다면 좋으련만, 헿

박영농 | 히치콕과 고다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홍상수

이지윤 |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해변으로 밀려드는 무용한 문장들. 한데 모이는 아득한 고독

최지원 | 고독에 닿은 사랑. 홍상수식 고백적 문법의 경지

김은정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 리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된다. 공포 영화의 공포는 배가 되고 범죄 영화의 잔혹함은 더욱 깊숙이 다가온다. 영화는 더 이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화 시작 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관객은 자연스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탐색하기 위해 한시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이것은 두려움에 떠는 공포 영화도, 마음 졸이는 범죄 영화도 아니다. 얼마 전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 두 사람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의 흥미를 끌기는 충분하다. 

이 영화를 논하기에 앞서 김민희라는 배우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둘의 호흡. 먼저 감독이 김민희라는 배우에 대한 이해력과 표현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점이 느껴진다. 그 배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어떤 힘을 뿜어내는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지인들과의 술자리 장면에서 영화 자체가 ‘영희’라는 인물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고 관객은 그 존재감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김민희 배우는 영희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 매우 호소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그의 연기에 매혹 된 것인지, 영희라는 인물에게 빠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배우인 영희는 한국에서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외국으로 간다. 이후 영희는 한국에 잠깐 방문해 지인들을 마주한다. 그리곤 말한다. 아무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세상에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는 불륜관계로 손가락질 받는 자기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기 위해 저렇게 말한 것이었을까. 사랑이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자격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자신은 사랑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한탄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던 걸까. 영희의 지인들 또한 그를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영희와 감독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거냐고. 영화 내에서 영희와 감독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물들은 그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영희와 감독 자신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유부남 감독과 여배우의 불륜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사랑이라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사랑이 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지에 대해 묻는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호소한다. 이 관계는 사랑이 아니냐고. 

영화에서 영희가 해변에 혼자 누워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우연히 만난 감독과의 일은 그의 꿈에 지나지 않았고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약속했던 대로 그를 찾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영희가 꾼 꿈에서 마주하게 되는 감독의 모습, 그리고 지인들과의 대화로 관객은 그가 오지 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영희가 한국에 와서 지인들에게 사랑에 대한 푸념을 털어 놓고, 해변가에서 감독과의 조우에 관한 꿈을 꾼 이유가 감독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라면. 그는 사실 감독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영희와 감독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유지했을 그 둘의 삶. 어쩌면 그 꿈은 그가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아쉬움의 토로가 아니었을까.



영희는 이 세상에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자칫 피로하고 느슨해 보이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외친다. 우리를 인정해달라. 그러나 설득 당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이었다면, 관객들에게 영희와 감독의 사랑을 호소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너무 솔직하고 필사적이기에,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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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폴로지한줄 관람평

송희원 | 더 늦기 전에 사과를 요구한다

이현재 | 발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동행한다. 앞서나가지 않는 것의 미덕.

박영농 | 위안부 문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접근법. 박수를 보냅니다.

이지윤 |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영화, 간직해야할 책임.

최지원 |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멈춘 적 없는 목소리

김은정 | 아픔으로 연대하는 우리 모두의 가족의 이야기




 <어폴로지> 리뷰: 더 늦기 전에 사과를 요구한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어폴로지>는 캐나다 국적의 여성 감독 티파니 슝이 6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길원옥 할머니(한국), 차오 할머니(중국), 아델라 할머니(필리핀)의 현재 모습과 증언을 가까이에서 담는다. 차오 할머니와 아델라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수치스럽다며 가족에게까지 함구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족에게 용기 내어 고백한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극우 혐한 시위대에게 “수치스러운 한국 할망구들”, “꺼져, 한국 매춘부들” 같은 갖은 모욕을 들으면서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다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이다. ‘너무 늦기 전에’ 받아내려는 사과(사죄)는 어떤 의미인 걸까?  


‘어폴로지’(apology)는 사과(謝過), 사죄(謝罪)를 의미한다. 사과에는 사과를 받는(또는 요구하는) 주체와 사과를 하는 주체가 있다. 사과를 요구하는 주체는 역사의 증언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고 사과를 해야 할 주체는 당연하게도 일본 정부이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들은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버티며 오히려 할머니들을 모욕하는 것을 보면 사과해야 할 사람과 받아야 할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착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기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011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1,000차 수요시위(1992년부터 시작된 시민단체와 시민들과 피해 할머니들이 함께하는 정기 시위)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역사적인 진실을 밝히길 촉구한다. 2013년에는 “전시에 성노예가 필요하다”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다. 2014년에는 스위스 유엔인권이사회 공식 석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증언하며 천오백만 명의 서명을 전달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이 문제가 비단 한일양국으로 축소될 사안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것이 길원옥 할머니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역사의 증언을 반복하고 전 세계의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일본의 법적 배상은 마무리가 아니라 출발일 뿐이고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 앞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이런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흘린다. 


김욱 교수는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정치적 사과는 개인적 사과와 다르며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며, 끊임없이 진화·진보하는 현재의 투쟁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정치적 사과는 진정성 없는 사과라 할지라도 일단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한 승자의 전리품이며 미래의 역사를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사과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차원에서, 자발성보다는 강요에 의해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게 ‘정치적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정치적 사과가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차원에서 얻어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폴로지>에서 한국 정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2013년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일본 공항으로 떠나는 길원옥 할머니를 따라간다. 한 언론사는 그를 인터뷰하며 온 국민이 기대하고 있다고 그에게 각오 한마디를 요청한다. 공항에서는 수많은 취재진이 할머니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할머니는 휠체어를 탄 채 탑승구 앞에 홀로 있다. 취재진과 한국 정부의 마중은 딱 거기까지이다. 가상의 포토라인이 처져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곳에 서서 할머니를 떠나보낸다. 과거에 그들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을 때처럼 말이다. 정부(국가)가 아닌 할머니(개인)가 자력으로 사과를 받으러 떠난다. 길원옥 할머니는 말한다.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라고. 영화 속 그녀의 작은 뒷모습, 작은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되었다. 그 이후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이 계속 이어져 왔다. 그들의 증언이 가능했던 것은 그 말을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언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관심을 가졌기에 공식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다. 차오 할머니, 아델라 할머니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증언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홀로 아픔을 묻어놓았다. 그들이 증언하지 못한 이유는 사람들이 무관심했고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귀를 닫아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파니 슝 감독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시민들, 양심 있는 학자들이 그들의 증언에 귀 기울였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진실 해명은 그것을 추구고자 하는 이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가능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상처를 공유하고, 그 아픔을 치유해 주기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서울독립영화제, 『21세기의 독립영화』, p.114) 


<어폴로지>는 시종일관 성치 않은 몸으로 많은 국가를 방문하며 피해 사실을 알리고 증언하는 길원옥 할머니와 그 곁의 사람들을 비춘다. 먼 곳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며 지지와 연대의 힘을 보내는 차오 할머니와 아델라 할머니, 그리고 영화에서 항상 그의 곁을 지키는 정대협 윤미향 대표와 수요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할머니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연대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티파니 슝 감독은 할머니에게 자신을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한다. 이 장면처럼 <어폴로지>는 끝났지만 이제 카메라는 우리의 모습을 찍게 될 것이다.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할머니들이 길거리에 서지 않아도 우리의 목소리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게 촉구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들이 고통스러운 상처의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놓여날 수 있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어폴로지> 포스터에 클로즈업된 소녀상의 두 주먹처럼 이제 우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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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한줄 관람평

송희원 | 예술, 예술가 '진짜'로 거듭나기

이현재 | 고유성이라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박영농 | 블랙코미디 - (스릴러) - 멜로드라마

이지윤 | 허상과 본질 사이에서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최지원 | 더 이상 내가 아니게 설계된 예술 속 '나'와 그 속에서 버텨내는 진짜 '나'의 블랙코미디

김은정 | 고상한 예술가인 척 하기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리뷰: 고유성이라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젤’(류현경 분)의 첫 모습은 당황스럽다. 덴마크에서 귀국했다는 그는 행인에게 담배를 빌리며 들고 있는 아메리카노에 대해 비판한다. 아메리카노의 기원을 알고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라고 권유한다. 행인은 본인의 담배를 다 피우자마자 그 자리를 떠난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탄 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택시기사의 수다와 음악취향에 ‘다른 걸로 틀어주실 수 있냐’고 불만을 보이던 그는 본인이 입을 열 기회가 주어지자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다. 오늘날의 미술계는 예술가가 멸종하고 사기꾼들만 넘쳐나는 오염된 곳이라 이를 정화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택시 또한 그가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앞에서 그가 처음 마주하는 것은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 받은 미술대회 장려상 상장이다. 이후 어머니와 친구를 만난다. 이 만남들에서 그가 확인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젤의 첫 모습은 곤궁한 자신의 상황을 환상으로 합리화하려는 유아적인 에고이스트로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입사하려던 회사로부터 거부의 제스처를 확인한 그는 (비록 환상 속이기는 하지만) 그 제스처에 답한다. “저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전생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티스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첫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한 가지 주장을 은연중에 형성하고 있다. 그는 앞서 본인이 제시한 주장을 몸소 증명해보이겠다는 듯, 미술계 인사들이 모인 회식자리에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박중식’(이순재 분)에게 귓속말로 “선생님 그림 되게 과대평가 받은 거 아세요? 쪽팔린 줄 아세요.”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자 박중식은 “그런가?”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그의 말을 반박하진 않지만, 참/거짓의 문제를 그에게 되돌림으로서 주장을 닫아버리는 기능을 한다. 결국 참/거짓의 문제는 그 안에 머무르고 발화되지 않는다.


그의 진술은 왜 그 안에만 머무르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필자는 그가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재범’(박정민 분)이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작품으로 인해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가인 지젤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작품들을 자신의 갤러리로 가져온다. 재범은 그를 미술계 인사들의 공적인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박중식 앞에서 그를 “그림은 좋은데, 작가가 좀 그래요.”라고 평가한다. 이에 박중식은 “작가가 중요한가? 그림만 좋으면 됐지.”라고 답한다. 그리고 곧바로 그림을 산다. 이는 박중식이 지젤의 그림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재범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후배 양성”이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이 타자의 변화를 일으키는 목적을 가진 행위라 생각하고 박중식의 대답에 접근해보자.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에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양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유일무이한 존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누구와도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누구도 이해할 의지가 없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유일무이한 존재는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발화는 혼잣말이 된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발휘되어야 할 그녀의 재능이 기능 부전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녀의 말이 그녀 안에 머무는 이유이다. 박중식이 지젤의 그림을 산 정확한 이유는 재범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재범은 박중식에게 지젤의 그림을 소개하며 ‘갤러리 비지팅도 끝난 상태’라고 말한다. 박중식에게 지젤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 작가인 것이다. 박중식이 지젤에게 원했던 것은 본인의 고유성을 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후배 양성’으로, ‘돈’울 주고 그림을 산 것이다. 박중식은 극중 지젤을 가장 정확히 이해한 인물이다. 그리고 돈은 그들의 언어이다.


그 이후는 지젤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를 견딜 수 없던 재범과 ‘제임스 곽’(문종원 분)는 ‘오인숙’을 죽이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표면적으로 작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시도로 그려지나 그들의 대화나 태도에서 경제적인 가치창출을 바라는 것 이상의 잉여가 보인다. 특히 이는 재범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가 지젤을 발굴한 첫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어릴 적, 진품인 줄 알았던 물건을 가품이라고 판단하는 감정사가 멋있게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제임스에게 하는 것과 같이 그의 욕망은 작품에 진릿값을 붙여서 고유성을 창출하는 데 있다. 그가 오인숙을 살해하려 한 이유는 그의 고유성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임스 곽은 극적으로 지젤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또한 벌어진 사태를 어찌할 바 몰라 지젤의 그림을 기증하는 결말에 이른다.



모두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고유성. 지젤의 그림은 결국 공적인 장소인 길거리로 나온다. 이 때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판별할 수 없다. 길거리 위 지젤의 그림은 사람들로부터 전과 같은 고유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외부의 자리에 어색하게 놓이고 고정된 자리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된다. 지젤의 그림은 어쩌면 영화라는 대중매체가 지닌 고유성에 대한 자기 파괴적이고 모호한 욕망에 대한 우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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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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