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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02 [인디즈 Review] <수성못>: 아무도 위로 받을 자격 없다

 




 <수성못 한줄 관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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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못 리뷰: 아무도 위로 받을 자격 없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기 님의 글입니다. 




영화는 마치 누가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물속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삶과 죽음 사이에 젊은이들을 놓는다. 영화 내내 죽음은 주인공들에게 거리낌 없이 나타나지만 아무도 죽지는 않는다. 오직 죽지 못하는 마음을 병신짓이라고 부르는 한 여자만이 죽을 뿐이다. 고통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모두들 괴로워하지만 다들 죽을 마음은 없어 보인다. 영목은 함께 동반 자살할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음에 대한 어떤 진지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동반 자살 클럽 승인을 핑계로 사람들에게 이나 뜯을 뿐이다. 사실 그것이 이 영화를 작동시키는 힘이다. 죽어야 하는데 사실 죽고 싶지 않다. 영목은 그저 가엽고 안쓰러울 뿐이다.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한 이들은 수성못에 모인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말이다. 죽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신은 이런 일을 한다며 명함을 건넨다. 서로 배려하기도 한다. 이 세계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그저 그런 대화가 필요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자기 얘기 들어주는 사람 딱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 안 죽어요.”라는 영목의 대사처럼 말이다.

 




사실 죽음은 이 영화의 표면일 뿐이다. 영화는 캐릭터를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이끌고 간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모두 비윤리적이다. 캐릭터가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이를 통해 그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성못에서 누군가 자살을 한다. 남자는 희정이 자는 틈에 몰래 배를 몰고 나가지만 희정은 자신이 구명조끼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때 희정이 취하는 선택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그녀는 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던진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목은 그 장면을 캠코더에 담는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협박한다. 신고하겠다는 영목에게 희정은 무릎을 꿇는다. 물에 빠진 남자가 희정의 꿈에 등장해 목을 조른다. 다음 날, 희정은 수성못에서 향을 피우고 소주를 뿌리며 제를 드린다. 그리고 더 이상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일말의 죄의식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에게는 어떤 도의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조차도 이러한 연장선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녀는 심지어 죽은 줄 알았던 남자의 새로운 죽음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것은 돈으로 마무리된다.

 




여기까지는 영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주인공의 부덕함이 현실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편입 시험 장면에 있다. 편입 시험이 끝나고 통화로 너무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하는 남자를 보며 희정은 행복한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는다. 언젠가 오스카 와일드의 글이라는 짧은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잘 성장했다는 것은 오늘날 큰 결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을 너무 많은 것으로부터 차단시켰다는 뜻이다.' 우리는 삶을 어떤 한 이상향을 설정한 채 수세기를 살아왔다. 쉽게 생각하면 이는 한국의 뿌리 박힌 유교 사상에도 나타난다. 그들의 사상에는 군자라고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있다. 결국 이런 절대적인 기준치를 설정한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을 배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차단 당한 채 살아왔고 희정 역시 어떤 이상을 향해 이유도 없이 나아가고 있다. 물론 희정의 비윤리적인 모습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상당 부분 그녀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고 그녀를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잘 성장하고 싶었지만 잘 성장하지도 못한 채 다양한 방식으로 거세당했고 희미한 도덕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잘 성장한 척한다. 아무도 위로 받을 자격 없다. 우리 기준에서.

 




영화는 일반 영화의 결말이 그러한 것처럼 주인공들을 한자리에 모으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생기는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끼어드는 코미디는 이를 더욱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결국 실패할지라도 살아가길 바라는 것일까? 주인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릴 때의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난 희준이 짓는 옅은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만 같고 죽음에 대해 추궁을 당하는 영목의 모습에서 그가 앞으로 삶을 이어나갈지 확신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 기타 치는 남자를 보는 희정의 모습에서 들을 수 없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영남대행 열차가 지나가는 역에서 신도림 가는 열차를 묻는 남자를 만난 희정의 모습처럼 그들이 존재한 적이 있기는 한 걸까?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귀에 맴돈다. “어떻게 됐는데요?”








Posted by indiespace_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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